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입버릇처럼 이사카 코타로를 욕한다. 구성은 뛰어나지만 초기에 그것들에 온 힘을 다 쏟아서 마지막이 헐거워져서 이야기가 갈수록 그 열의가 점점 사라지고 작가 자신이 지쳐가는게 눈에 보인다고. 사실 그렇다. 이사카 코타로를 누군가에게 추천 할 때에도 뒷심이 빠진다는 얘기는 반드시 한다. 하지만 그 반면 이야기의 흥미로운 구성에 있어서는 단연 손에 꼽는다. 나와는 애증 관계랄까. 

 
  이사람은 새로운 것에서 찾아내는 즐거움에 대한 중독증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사카 코타로의 이야기는 늘 한 분야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여러분야에서 그 환타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환타지는 바로 이사카코타로만의 미학인 캐릭터에 집중되어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하루가 그렸던 유화처럼 강렬하다. 하지만 무겁지 않고 빠르고 경쾌하게. 무거운 소재일수록 가볍고 경쾌하게 나타내자는 것, 그것이 바로 중력을 잊은 삐에로인 것이다. 

  사람은 늘 구원받고 싶어한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구원받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다다를 수록 누군가의 전능한 힘을 원한다. 하지만 사람은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구원 받는다.

  가족 중 유달리 그림에 소질이 있던 하루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만두지만 몇년 후 아버지로 부터 "너는 피카소가 죽은 날에 태어났으니까..."라는 말에 구원받았다. "너는 그래도 내 아들이니까."라는 심장을 억누를 정도의 무거운 진심보다 공중 곡예를 넘는 삐에로 처럼 그 한마디는 하루의 가슴속의 넓은 허공을 훌쩍 뛰어 넘어 버렸다.

 

  신은 그 누구도 구원 해 주지 않는다. 그저 방관하거나 눈을 돌릴 뿐이다. 어디에서 나왔던가.  

  "이 세상 하루에도 수십만명을 태어나게 하는 신이 그 아이의 운명까지 정하는것은 너무나 번거로운 일이다."

 

  그렇기에 신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난 사실 위의 말에 동의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전지전능함에 무료함을 느껴 우리를 내보내고 관찰하는 것에 낙을 느끼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이 인류의 죄를 사하거나 우리를 구원한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를 관찰하는 방관자 일 테니까.

 
  하루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아버지가 신에게 지혜를 구하자 신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런것 쯤 니가 생각해!"

   아버지는 결국 "당신이 좋다면 낳자"라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하루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생명을 허락하게 된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하루의 존재를 알고 뒤에서 비아냥 거릴 지언정 그 가족은 행복했다. 남들과 같이 평범한 삶의 행복을 누릴 수도 있었던 이 가족은 하루가 태어남으로서 하루가 있는 미래를 맛보게 되었다. 그 미래를 정한 그 신의 존재가 절대자이건, 스스로의 의지와 안간힘 속에서 태어난 존재이건 간에 그들은 그들의 세상 속에서 부끄럼 없이 유쾌하게 살았다. 그것이 중력을 잊을 삐에로가 아닐까.

 
  수 많은 방관자들이 지켜보는 그곳에서, 그들은 곡예를 한다.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때로는 힘차고 쾌활하게. 하루와 이즈미, 그리고 아버지의 삶에는 중력이 없다. 그들을 잡고있는 덫은 그들을 방관하고 있는 시선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이 삐에로인 것도 잊은 채 그렇게 신나고 아름다운 곡예를 계속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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