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론장의 구조 변동 - 미디어사상총서 1
손석춘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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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 한국 공론장의 구조변동,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시니컬한 정치이론에 따르면 근대의 시민은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구속되어 있는 상태이며 ‘단지’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정치전통에 서있으며 이의 기본적인 전제는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다. 이 점에서 개인의 자유는 해당 정치체제가 정당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 할 만하다. 이점에서 앞서의 시니컬한 평가는 현대 정치체제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불완전하며 오히려 매순간의 위기상태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근대적 정치 기획을 ‘계몽’으로 특징지면서 이를 ‘완수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면서 좀더 나은 사회의 가능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와 연결된다. 푸코에게 계몽이 하나의 감옥 이미지 였다면, 하버마스에게는 동굴 이미지였다. 그런 하버마스에게 시민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구성되는 자유로운 공간은 끝나지 않는 계몽의 기획이 지속되는 장소인 동시에 지금보다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계기로서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 할만하다.

하버마스가 수행한 서구 공론장의 역사적 계보에 대한 탐구는 근대 정치체제가 지니고 있는 역동성과 함께 정치체계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민의 공간’을 전제한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연구자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주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섣불리 들여온 서구 이론은 그만큼 쉽게 부식되는 특징이 있어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죽은 개’ 취급을 받고 있는 지경이다.

그런 점에서 언론운동가 손석춘이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이라는 틀을 가지고 한국의 공론장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 것은 때늦은 참신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손석춘은 하버마스의 공론장이라는 주제를 ‘신문’을 위시한 저널리즘으로 한정하고 브로델의 장기지속이라는 문제의식을 전용하여 한국의 공론장을 “시공간에서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주기적 순환’과 ‘추세’를 도출”(19쪽)해내고자 한다.

특히 한국의 근대적 공론장의 형성 시기를 19세기로 잡고 그 근거로 사학계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정의 체계가 흔들리고 자생적인 지역 소통체계가 마련되는 과정을 서술한 2장의 분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는 하버마스가 절대주의 국가가 체제 정당성을 의심받고 이 때문에 발생한 정치적 균열 가운데서 근대 공론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논리의 한국적 독해이다. 2장의 분석에서 눈이 가는 것은 지방의 수령이라 이서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존재했던 향회의 존재이며, 이것이 잇따른 농민봉기에서 민회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후쿠자와 유키지의 영향 속에서 창간된 근대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에서 부터 <독립신문>,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의 <매일신문> 창간과 일본 제국주의의 순화정책 중 일환으로 등장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등장을 역사적 계열에 따라 살펴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재편되는 신문들의 구조와, 정치권력과 유착하면서 발전해나는 ‘정치적’ 언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4장으로 이어진다.

사실 손석춘의 분석은 엄밀하게 말해서 ‘공론장’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언론사’에 가깝다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언론이 공론장의 대표적인 장치임에는 분명하지만 정치 체제가 포괄하지 못하는 제도와 시민사이의 틈에서 ‘포착되지 않은 체’ 존재했던 수많은 공론장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손석춘이 일제 시대 때 주요한 공론장의 하나로서 ‘지하신문’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민중의 자생적 아고라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더라도(65쪽~66쪽) 이는 오히려 부록의 느낌이 강하다.

또한 5장과 6장을 통해서 정치체계와 생활세계, 그리고 양자의 편향 속에 위치하는 공론장의 위치를 분석하는 작업 역시 ‘해방의 공론장’(142쪽)이라는 규범적 지향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도식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사실 이런 점은 한계라 할 수 없는 한계라 할 만한데 왜냐하면, 이미 서두에서부터 저자가 주기적 순환과 추세에 주목하겠다고 밝힌 방법론적 한계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공론장 분석은 손석춘이 선구적으로 해놓은 언론 중심의 공론장 분석에 제도로 잡히지 않는 불규칙적인 민중의 자생적 공론 구조를 덧붙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를 테면 조선시대에 등장한 방이나 격문, 그리고 일제시대 때의 각종 지하 유인물들, 군사독재시대 때 발행되었던 지하언론 및 선전물 등이 지니고 있던 함의들을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 <한국 공론장의 구조 변동>은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저자의 삶에 한 전환점”(저자서문)이 될 것이고 이에 따라 후속 연구 작업을 기대할 근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하나의 분명한 잣대를 가지고 한국의 근대 언론사를 짚어보는 책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된다.

무엇보다 공론장 이론이라는 서구의 이식된 종자가 가장 실천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렴된 연구서라는 측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그 노고를 ‘치하’받을 만 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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