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 서머싯 몸이 뽑은 최고의 작가 10명과 그 작품들
서머셋 모옴 지음, 권정관 옮김 / 개마고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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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전에 M군이 "네 책장에서 책 세 권을 꼽는다면?" 질문을 던졌을 때 한참 고민하다 세 권을 고르고 그러고도 또 한참을 더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M군이 다시 "책 한 권을 추천한다면?" 물었을 때는 별 고민 없이 금방 한 권을 골라내었다. 세 권과 한 권의 차이는 과연 뭐였을까...

사실 열 권이든 세 권이든, 누군가 고심 끝에 꼽은 그 몇 권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재미있는 소설은 아닐 것이다. 흔히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는 꼬리표를 단 추천 목록은 거기에 언급된 작품이 가장 뛰어나다라는 절대 우위의 개념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우연적 요소가 포함된 비교 우위의 목록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이하 『불멸의...』)에서 10인의 작가와 작가의 대표 소설을 소개하면서 서머셋 몸 역시 이 부분을 염려하고 있다.
『불멸의...』는 서머셋 몸이 직접 꼽은 열 권의 소설에 관한 비평집(평론집)이다. 몸은 어느 날 기자의 청에 별 생각 없이 열 권의 책을 추천했다가 이후 출판사로부터 그 내용을 엮어 출간하자는 제안을 받고 고민에 빠졌던 과정을 책의 서두에 밝히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불멸의...』출판 과정을 밝히는 의미 외에도 세상의 수많은 책 중에 열 권의 책을 고르는 고민이 담겨 있다.

작가의 독서일기 또는 비평집은 재미면에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한식당에서 비빔밥을 고르는 것과 비슷하달까, 이미 검증된 작가의 필력은 소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어서 소설만큼 혹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비평집도 많다. 그러니까 장정일의 경우처럼 소설이 아닌 독서일기 때문에 장정일의 팬이 된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서머셋 몸은 소설이란 무릇 첫째도 둘째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 자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설이야 이미 검증되었으니 말할 것도 없겠고, 거기에 비평까지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게 잘 쓰니 한마디로 '쓰는 재기'를 타고난 작가가 아닌가 싶다. 

『불멸의...』의 목차는 10인의 작가로 나뉘어져 있는데 작가의 출생과 성장배경, 작가를 둘러싼 해프닝, 작가의 소설과 관련된 일화들로 꽉꽉 채워진 내용은,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다음 얘기로 유기적으로 이어져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책에서 한 눈을 팔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 작가의 사생활을 얘기할 때 몸의 어조는 어찌나 수다스럽고 유창한지 천일야화로 왕의 분노를 가라앉힌 세헤라자드가 이랬을까 싶다.

『불멸의...』에서, 몸은 '작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라는 명제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입장을 취한다. 물론 몸이 고른 10인의 작가들은 모두 그 범주에 포함되는 인물들이다. 

오늘날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18,19세기만 해도 작가가 글의 소재나 자료를 얻는 경로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어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사생활까지도 몽땅 소재로 끌어다 썼다고 한다. 샐린저처럼 철저하게 은둔하는 작가도 있지만 근대에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들에게 사생활의 비밀을 지키기란 거의 불가능했던 걸로 보인다. 그리하여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 작품 속에 자신의 얘기를 대놓고 하니 작품을 통해 작가를 읽는 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작품 자체가 작가를 연구하는 자료인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목차중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발자크와 스탕달 편. 이 두 사람은 A.뒤마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그들 특유의 기질만으로도 배꼽을 쥐게 하는데 거기에 몸의 맛깔나는 서술이 더해지니 재미가 배가 된다. 몸은 그들에게 '위대한 작가' 호칭을 붙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미울 정도로 신랄하게 '까'는데 왠지 그런 모습이 밉지 않고 정겹다. 동네아줌마들한테 남편의 치부를 흉보는 중년의 아내 같다고나 할까, 얼핏 '우리 남편은 무식하고, 교양 없고, 파렴치한 놈이에요' 라고 고자질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호흡 사이사이 '그래도 내 남편이 최고지' 하는 것 같은 애정이 느껴진다.
인상 깊었던 대목은 발자크나 스탕달은 물론 디킨스에 이르기까지 '원고 노동자'라는 표현. 실제 그들의 집필력은 이러한 표현이 가히 부족하지 않게 양적으로 대단하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연재'에 해당하는 방식을 고수했던 당시의 출판 관행이 작가들로 하여금 원고 노동자로 전락하도록 했다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이들 작가 스스로도 글 쓰기를 돈버는 수단으로만 봤다고 하니 그 시대의 풍속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책 넘김이 느려졌던 목차는 허먼 멜빌과『모비딕』편인데『모비딕』은 미드 시리즈 CSI에서 그리섬 반장이 즐겨 인용하던 소설이기도 하다. 유명세에 비해 국내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의 설명에 의하면 멜빌의 문장이 꽤 난해한데다 다층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니, 타국의 번역자에겐 상당히 어려운 도전이겠구나 싶다.
(몸에 의하면)멜빌은『모비딕』이 알고리즘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지만 멜빌의 소설은 실제로 그렇게 읽히고 있고 또한 그 덕에 오늘날까지 각종 '읽어야 할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소설이 되었다 하니 일견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같은 언어권인 몸조차도 난해하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번역자의 어려움이 능히 짐작가고도 남는다. 일간 모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이라니 기대를 해봐도 좋을 듯.

도스토예프스키 편은 다른 의미에서 인상적이었는데 최근 읽은 이병주의『허망과 진실 1 - 서양편』에 등장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듯 사뭇 달라서였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사람, 같은 에피소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해석은 판이하게 달라지는 점이다. 그러니까 몸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린 소녀와 강제적으로 맺은 성관계를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니는)파렴치한에 한심한 도박꾼에 열등감 가득한 찌질이 작가지만 이병주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요절한 형의 가족들을 평생 부양하고, 부정한 부인이지만 그녀가 죽을 때까지 헌신적이었던 순정파 로맨티스트이며, 사형을 사면받고 복역했던 감옥에서의 경험에 빗대어 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고민이 많았던 작가다.
사실 누구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실제에 가까운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작가의 사생활이 작가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독자인 우리는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덧. 역자의 공은 웬만하면 드러나기 힘든데《불멸의...》는 정성을 들인 역자의 주석이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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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3-23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발자크 평전 한 권 읽는데도 엄청 오랜 시간을 소비했는데요. 이런 책이 있었군요. 리뷰당선 축하드립니다.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3-24 14:00   좋아요 0 | URL
발자크평전이면 혹 츠바이크의 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책장 좋은 위치에 꽂아두고 늘 읽어야지 읽어야지 노려보는 책 중 한 권인데 벌써 읽으셨다니 부럽습니다.
'불멸의 작가...'의 장점은 목록 중 관심 가는 작가만 골라 읽어도 된다는 거 아닐까 합니다. 취향이 다르실 수도 있어 조심스럽습니다만, '발자크 편'은 소리 내어 웃어가면서 정말 재미있게 읽은 목록이에요.
(앗, 감사합니다. 리뷰에 당선되었군요!)
 
왑샷 가문 연대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2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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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는 기성 작가들이 '책을 말하는 책'에서 언급하는 걸 가끔 본 적은 있으나 그때마다 아, 이런 작가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을 뿐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작가였다.
프랑스를 제외하면 작가의 국적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만 그래도 굳이 분류를 하자면 미국 작가의 소설은 '틈이 나면 읽어야지' 쪽이다. 그러니까 '틈을 내서 읽어야지'는 아닌 것인데 덧붙이면 나는 대체로 영국이나 독일, 동구권 출신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그리고 읽고 났을 때 깊은 감흥을 받는다. 그러니 그동안 치버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그가 미국 작가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거리의 문학'이라고도 하는 미국 문학은 읽다 보면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곧잘 받는데 이런 느낌은 20세기 초-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고 물론 치버도 그렇다. 거기다 존 치버의 소설은 거의 풍속소설에 가깝다.
'교외의 체호프'라고 불리운다는 존 치버는 수십 편의 단편소설을 썼지만 장편소설은 겨우 다섯 편에 불과하다.
치버의 최초 장편소설『왑샷가문 연대기』를 읽은 감상은 체호프보다는 피츠제럴드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다. 구체적으로 풍경 등의 묘사가 두드러지는 1, 2부는 피츠제럴드를, 내용의 어조와 상관없이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순간 순간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많았던 3부는 나보코프를 읽는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소설 초반은 눈으로 문장 사이 사이에 '/'를 그어 가며 읽어야 할 정도로 겹치고 겹치는 복문이 성가시기도 했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 그럭저럭 읽을만 하다.
『왑샷가문 연대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풍경 묘사인데 말 그대로 사진 한 장을 앞에 놓고 보는 듯 하다. 읽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이 더 제격인 치버의 묘사는 시간과 공간, 사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그려넣는 식인데 이를테면 이렇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트래버틴에서부터 이미 그 기차에 올라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코벌리가 나와서 형과 함께 은 식기 공장을 지나고, "동물드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라는 전설적인 문구가 쓰여 있는 라킨 씨의 낡은 헛간을 지나고, 렘센스의 밭과 '선원의 집'을 지나고, 얼음 연못과 양모제 공장을 지나고, 틀림블 부인의 세탁소를 지나고, 9시 18분 기차가 덜컹거리며 창가를 지나갈 때 민스파이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을 먹는 브라운 씨의 집을 지나고, 하워드의 집과 타운센드의 집과 건널목과 공동묘지와 줄로 톱날을 세우던 노인의 집을 지나갔다. 노인의 집이 마을의 맨 마지막 집이었다. - p.142 

'연대기'라는 거창한 제목에 자칫 겁을 먹을만도 하나 가계도가 필수였던 마르께스의『백년동안의 고독』에 비하면 왑샷 가문의 가계는 아주 단촐하다. 게다가 전체 등장인물의 수는 수적으로는 많지만 모두 주변인물일 뿐, 실제 이야기는 리앤더의 두 아들 모지스와 코벌리를 쫓아가기 때문에 내용도 복잡하지 않다.
형인 모지스는 의지나 노력에 비해 일이 잘 풀리는, 운이 좋은 인물인 반면 치버 자신이 모델이기도 한 둘째 코벌리는 뭘 해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결국 풀리긴 하나 쉽게 갈 길도 어렵게 가는, 인물이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간 두 형제의 족적을 따라가는 중간 중간에 아버지 리앤더의 일기가 삽입되는 구성을 하고 있는 소설은 사건보다는 일상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한다. 즉 사건을 통해 인물이 드러나고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통해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이런 양식이 익숙하지 않으면 시종일관 건조하고 객관적인 작가의 어조가 자칫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약간의 인내심만 유지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두꺼운 페이지 수가 얇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다음은 소설을 읽던 중에 웃고 말았던 한 대목.

모지스는 역까지 그녀의 가방들을 들고 가서 클리블랜드행 기차에 실어 주었다. 비어트리스가 그에게 우아하게 작별 키스를 하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모지스, 내가 끔찍한 짓을 했어. 당신한테 꼭 말해야 할 것 같아. 그 사람들이 항상 사람들을 조사한다는 거 알지? 그러니까 누구한테나 당신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 것 말이야. 어느 날 오후에 어떤 남자가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한참 동안 얘기를 늘어놓았어. 당신이 날 이용했고,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내 돈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이 날 부도덕한 여자로 생각했을 테니까. 미안해. 당신한테 나쁜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어." 이윽고 차장이 모두 승차했다고 외치자 기차가 클리블랜드를 향해 출발했다. - p.261 

내용의 뒷부분을 부연하면,
불쌍한 모지스는 비어트리스의 깜찍한 거짓말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된다. 하지만 얼마 뒤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니 모지스로서는 이 해프닝이 그리 비극도 그렇다고 그리 희극도 아니게 된 셈이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작가의 배경을 알고 나면 이 소설이 작가의 자서전이겠거니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현실과 많이 겹치는데 소설이 현실보다 덜 세속적인 것은 아마도 그의 심성 일면이 그러해서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읽으면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고, 읽고 나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 어떤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재미를 못 느끼다 한참이나 지나서 문득 "그 소설 재미있었는데" 하기도 한다.『왑샷가문 연대기』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다 읽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었어' 만족했던 소설이었다.

- 덧. 이 소설을 읽고난 후 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 그대로 '교외의 체호프'가 딱 어울린다고 공감하게 되었다. 한편,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 뒤로 펼쳐진 모든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 치버의 서술을 읽으면서 장편이 딱인 것 같은 이 작가가 왜 대표적인 단편 작가가 된 것일까, 들었던 의문도 해소되었다. 단편소설로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이력이 충분히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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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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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란드 양, 당신이 품어온 의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해보세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겁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와 이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영국 사람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인이지요. 제발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똑바로 보고 이해하고 판단해주세요. 그런 잔혹 행위를 해도 된다고 교육받은 적이 있습니까? 법이 그런 것을 묵인해 주고 있나요? 사람들간에 직접적인 왕래와 서신 교환이 잦은 이 나라에서, 남의 눈을 피할 길 없는 이 나라에서, 도로와 신문 덕분에 세상에 비밀이란 남아 있지 않게 된 이 나라에서 그런 잔혹 행위가 비밀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몰란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그들은 어느새 복도 끝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는 수치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 제인 오스틴,『노생거 수도원』중에서


위 문장은 소설『속죄』의 첫 머리에 작가가 인용한 제인 오스틴 소설의 한 대목이다.
책 읽는 걸 싫어하는 M군이 영화《어톤먼트:Atonement》를 본 직후 원작소설에 관한 것 그러니까 "실화인가" 등을 물어왔다. 영화의 결말이 아마 열린 구조였던 듯...
얘기를 듣다 보니 호기심이 생기고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가능한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순서를 선호하기 때문에 읽고 있던 책을 놔두고 소설『속죄』를 주문했다.

띠지의 포스터가 오드리 토투 주연의 영화《인게이지먼트 : A very long engagement》를 떠올리게 하는『속죄』는 어린 소녀 브리오니의 사소한 오해로 세실리아, 로비, 브리오니의 인생이 뒤틀려버리는 1부, 1부에서 인생이 꼬여버린 로비가 전쟁에서 겪는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좇아가는 2부,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속죄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입학을 포기하고 세실리아의 뒤를 이어 간호사의 길을 선택한 브리오니의 3부, 마지막으로 59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인「1999년 런던」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를테면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에필로그는 브리오니의 1인칭 서술로 시점이 바뀐다.
소설의 제목『속죄』는 어린 시절 자신이 한 거짓 증언 때문에 인생이 뒤틀려버린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브리오니가 속죄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기인한다.

읽는 동안 아마 서너 번쯤 소설을 팽개쳤던 것 같다.『속죄』는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그것이 픽션인 걸 알면서도, 지면을 벗어나 읽는 사람의 정서를 움켜쥐고 뒤흔드는 불편한 소설이었다.
책을 받아들기 전에 M군과 나눈 몇 마디 대화와 책을 주문할 때 잠깐 읽어 본 서평으로 소설의 방향을 미리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세실리아, 로비, 브리오니 세 사람의 인생이 뒤틀리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내 안의 감정선이 픽션을 픽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설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다. 결국 중반까지 읽었을 때, 책을 내려놓았다. 소설을 끝까지 무사히 완독하려면 아무래도 '브리오니' 이 멍청하고 바보같은 여자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브리오니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정에 빠져있는 13세의 소녀다. 아직은 삶에 이면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모르는 어린 브리오니는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에 더 익숙하고, 선악의 경계는 완벽하게 분명해야 하며, 자신이 쓴 동화 속 질서가 그러한 것처럼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권선징악적 구조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런 브리오니가 어느 날 어떤 장면을 목격한다.
소리가 사라진 영상은 어떤 의미일까. 예전에 모 통신사 광고가 소리를 제거한 영상을 먼저 보여준 다음, 다시 소리를 입힌 영상을 보여주는 CF를 내보낸 적이 있었다. 브리오니가 듣지는 못하고 보기만 한 장면들은 이렇다.

장면 1. 분수대 옆에 사랑하는 언니 세실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후원하고 있는 파출부의 아들 로비가 서 있다. 세실리아는 속옷만 남긴 채 옷을 모두 벗고 분수대 안으로 들어갔다가 젖은 모습으로 나오고 이 광경을 로비가 처음부터 끝까지 파렴치하게 지켜보고 있다. 물론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를 모욕했다고 믿는다.
장면 2. 로비가 실수로 잘못 보낸, 세실리아에게 사과하는 편지에는 음란한 단어와 음란한 내용이 적혀있다. 이 편지를 훔쳐 본 직후 브리오니는 어두운 서재에서 로비에게 붙잡혀 신음하고 있는 세실리아를 목격한다. 물론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를 추행하는 것이라 믿는다.
장면 3. 경찰에게 연행되는 로비에게 달려가는 세실리아. 세실리아는 수갑에 채워진 로비의 손을 만지기도 하고, 로비의 옷깃을 잡고 흔들기도 한다. 물론 브리오니는 세실리아가 로비를 용서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의연한 세실리아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브리오니가 지켜본 위의 장면은 모두 소리는 거세되고 영상만 남은 장면이다. 하지만 영상에 소리가 입혀지면 진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브리오니는 그녀가 본 것만 믿을 뿐 그 이면을 들여다 볼만큼의 통찰력은 없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의 세계는 주어와 동사만 존재하는 직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린애가 보는 세상의 질서는 그렇듯 간단하다. 잘못하면 나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브리오니의 눈에 로비는 악당이고 그래서 브리오니의 주변에 벌어진 흉악한 범죄의 죄인은 악당인 로비여야 한다. 이것이 13세 소녀의 논리다.
어른이 아이와 다른 점은 어른은 어떤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 세계의 축소판인 집, 인간, 자동차 등의 장난감으로 어른들의 흉내를 내지만 그것은 언제든 재생산이 가능한, 불행이 없는 모방의 세계다. 이러한 모방의 세계에 익숙한 아이는 어른과 달리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브리오니는 자신이 썼던 동화 속에서 주인공이 역경과 고난을 딛고 마침내 행복해지고, 악당은 벌을 받은 것처럼 그녀의 현실 세계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속죄』는 소설 본연으로서의 재미도 재미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가 바라보는 '작가'에 대한 시선이 흥미롭다.
브리오니가 그들 세 사람에게 일어난 상황을 실제와 다르게 구성해서 출판사에 투고했을 때, 출판사 편집장이 원고를 되돌려 보내면서 밝히는 거절 사유가 무척 인상적이다.

소녀가 자기 앞에 펼쳐진 이 이상한 장면을 완전히 오해하거나 화를 낸다면, 그것이 젊은 남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을 맺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여자의 부모님에게 폭로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부모는 분명 맏딸이 파출부의 아들과 사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테고, 그러면 젊은 남녀가 소녀를 연락원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p.438, 3부

누구나 원하는 행복한 결말을 원한다면 3부까지만 읽기를 권함.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도 소설은 스토리 텔링이 뛰어나고 흡인력이 강해서 쉽게, 잘 읽힌다.
작가의 사실주의를 느낀 부분은 3부의 뒷 부분. 이전까지의 끈질기고 집요한 문체 대신 서두르는 듯 호흡이 들쑥날쑥한 문체가 등장한다. - 이러한 문체의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중간 중간, 전혀 졸음이 올 내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금씩 졸았는데 거의 100여 페이지나 읽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졸았던 문단은 여지없이 내가 뜨악해하는 의식 흐름의 기법이 쓰였다.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이러한 문체는 버니지아 울프나 프로스트처럼 작가 자신의 고유한 문체라기 보다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차용한 느낌이 있다. 물론 읽는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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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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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월드컵 예선이 있을 때면 온 국민에게 '경우의 수'를 공부시키던 대표팀이 웬일로 차범근 감독의 지휘 아래 파죽지세로 4연승을 올리더니 일찌감치 본선 진출을 확정지어 버렸다. 이때 왜 차범근은 사단이고, (네덜란드)오렌지는 군단이냐? 따지는 우스개 소리도 나왔더랬다. 하여간에, 차범근사단이 '너무' 잘 하는 바람에 갑자기 심심해진 국민들, 이번엔 이웃나라 일본의 본선 진출을 두고 '경우의 수' 공부하기에 돌입했다.
이때 일본은 본선 진출이 거의 좌절 직전이었으나 우리나라에 2:0으로 극적으로 이기고 조 2위가 되어(이때 일부러 져줬다느니 엄청 시끄러웠다) 다른 조 2위인 이란과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이기면 사상 첫 본선 진출이고 지면, 오빠 말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응원할 거라고 했다. 이유인즉 우리나라가 남은 경기에서 이기면 '경우의 수'에의해 일본의 본선 진출이 가능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나.
그리하여 일본과 이란의 경기가 있던 날 나는 TV가 있는 방에 출입금지 당했다. 오빠가 "니가 보면 일본이 이긴다"는 참으로 억울한 이유를 들어 나를 쫓아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이 이란에 1점 차로 승리,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룩했다. 모두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때 일이다.

여자가 싫어하는 남자는 '군대 얘기하는 남자', '축구 얘기하는 남자', '군대에서 축구했던 얘기하는 남자'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만, 남자에게 축구는 군대와 더불어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축구라면, 그것도 프리메라 리그라면 사족을 못쓰는 남자가 역시 프리메라 리그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자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게다가 이 여자, 못 하는 게 없다. 요리도, 연애도, 일도. 취미도 같고, 말도 잘 통하고 거기에 제대로(?) 성(性)을 즐길 줄도 안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남자가 이런 여자를 만났을 때 취하는 다음 행동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
소설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게 모두다.
나는 그녀의 친구가 아니다. 친정 식구도 아니다. 전 남편도 아니다. 그녀의 엄연한 현재 남편이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엉망이 되었다. 

평소 의식하지 못하던, 관습에 의해 학습된 내 안의 보수성과 마주칠 때가 있다.
말하자면『아내가 결혼했다』는 이러한 내 안의 보수성을 자극하는,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을 하는 시놉시스를 가지고 전개되는 소설이다. 그러니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구매를 할지 말지, 막상 읽기 시작한 뒤에도 읽다가 말다가 읽다가 말다가... 독서가 매우 험난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문장이 가볍고 전개가 유쾌한 소설이다. 그렇다고 칙릿은 아니다. 소설이 제시하는 담론은 충분히 논쟁적이고 작가도 진지하다. 소설은 축구와 결혼이라는 두 얘기가 서로의 씨줄과 날줄을 얽으며 진행된다.
"골키퍼 있다고 골 못 넣냐"는 축구보다 연애를 얘기할 때 더 많이 등장하는 안주거리같은 얘기다. 이 소설에도 이러한 축구와 연애(혹은 인생) 간의 상호 비유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골키퍼 있는데 골 넣을 수 있을까? 있다. 그게 축구의 룰이다. 그럼 이 얘기를 결혼으로 가져 오면 어떨까. 배우자가 있는데도 그녀의 연인이 되는 게 가능할까? 역시 가능하다. 불륜이라는 주홍글씨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연인을 누군가(=골키퍼)와 나눠 가질 자신이 있다면.  

그런데 심지어 아내다. 심지어 아내는 불륜이 아니라 결혼이 하고 싶다고 선언한다. 골이 문제가 아니라 골대 앞에 골키퍼 하나를 더 세우겠다는 얘기다. 축구에서 골문을 골키퍼 두 명이 지키는 건 반칙이 아니라 경기의 룰 자체를 거스르는 것이다. 그건 이미 축구가 아니다.

소설은 있을 법 하지 않은 얘기를 있을 법하게 지어내는 거짓말이다. 있을 리 없는 얘기를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잘 하는 작가가 곧 능력 있는 작가다. 작가는 거짓말을 하고 독자는 알면서 속아준다. 그런데 이 소설은 알고도 속아주기엔 거짓말이 좀 많이 허술하다. 

-  아내(인아)가 나(덕훈)와 결혼한 상태로 그 놈(재경)과 결혼을 감행한다. 문제는 복혼의 주체가 '아내'라는 것이다.
인아는 직장 생활과 결혼 생활을 동시에 그것도 완벽하게 해낸다. 당연히 인아의 결혼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그녀는 두 남편을 위해 집안 일을 두 배로 하고, 아내 역할을 두 배로 하고, 며느리 역할을 두 배로 한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유로 첫 번째 남편 덕훈은 그나마 가사에서 아예 손을 떼지만 인아는 불평하지 않는다. 인아가 두 배로 치러야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덕훈은 인아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그놈이랑 하는 게 좋아? 나랑 하는 게 좋아?" "그놈이 오래 해? 내가 더 오래 해?" "그놈이 잘해? 내가 잘해?"
신년 연휴는 덕훈의 본가, 설 연휴는 재경의 본가를 오가며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해내는 인아는 그냥 슈퍼우먼도 아니고 초싸이어인슈퍼울트라캡숑짱 우먼이다. 이런 인아가 과연 쿨한가? 글쎄.
남편을 하나 더 얻은 대가로 인아가 치러야 하는 현실은 실로 끔찍하다. 만약 인아가 정말 독립적이고 현명한 여성이라면 덕훈과 이혼을 하던가, 재경과 헤어지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 아내의 결혼이 '한 번 더'에서 끝나고 마는 것은 소설이 보여준 가장 재미 없는 농담이다.
애초에 인아가 덕훈을 설득할 때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던 '폴리안드리'(일처다부제)는 남편 둘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남편 둘에서 멈추다니. 게다가 인아가 더 이상의 결혼은 그만 두겠다는 이유는 '두 집 살림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처음 덕훈과 인아가 모노가미(일처일부)냐 폴리안드리(일처다부)냐로 대립각을 세울 때 코빼기도 안 보이던 결혼 제도의 사회학적/관습적 굴레가 더 이상의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뒤늦게 등장한 것이다. 하긴 아무렴 어떤가. 처음부터 인아의 폴리안드리는 허술하고 일방적이고 오류 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일방적인 편들기에 힘입어 덕훈을 설득하는데 아무 문제 없었는데. 결국 인아와 덕훈의 논쟁은, 덕훈이 좋아하는 축구에 비유하자면, 처음부터 심판(=작가)을 매수한 경기였던 것이다.

- '복혼'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인아의 논리는 허점이 많다. 특히 '이슬람의 코란은 네 명의 처를 두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p.220)는 부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인아가 덕훈을 설득하기 위해 인용한 코란의 이 구절은 '(감정적으로)공평하게 대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구절로 이어진다. 이슬람 개혁의 선구자였던 무하마드 압두는 이 구절을 신의 진정한 뜻은 일부일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설에선 이러한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공평했다면 인아의 코란 인용에 덕훈은 압두의 해석으로 반박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 마음이라는 건데, 비빔밥을 시켜 놓고 좋아하는 나물만 골라 먹는 식이다. 

- '종교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와 무관한 폴리기니(일부다처)가 가능하다면 폴리안드리(일처다부)도 가능하다'(p.139)는 인아의 주장은 일단 종교적, 경제적인 이유와 무관하게 오직 '애정'만으로 복혼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에선 썩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복혼이 평화적으로 유지되는 것에는 글쎄... 개인적으론 코란이 경고했듯 모두를 다 공평하게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에 공감한다.

- 마지막으로 '기독교가 일부일처제와 무관하다'(p.191)는 인아의 논리. 인아에 의하면 그 이유가 '성경에 이혼은 금지했지만 복혼을 금지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p.191)이라는 건데 이쯤 되면 아, 이거 웃으라고 하는 얘긴가 헷갈린다. 그야말로 '먹으라고는 안 했지만 먹지 말라고도 안 했다'와 뭐가 다른가.
소설 전반에 걸쳐 덕훈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인아의 '폴리안드리' 논리의 전개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인아가 영리한 걸까, 덕훈이 바보인 걸까.

어쨌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든 생각은 읽기를 잘 했다는 것이었다.
감상을 한 줄로 정리하면, '불편하지만 재미있는 소설'.
함께 읽어 보면 괜찮은 소설로 이만교의『결혼은 미친 짓이다』(민음사) 추천.

다음은 읽으면서 공감이 가는 한편 재미있었던 부분.

(…)그리하여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더 고통스러워한다.
남자들이 더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사회화 과정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대개의 여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사랑의 시뮬레이션을 수도 없이 경험한다. 순정 만화와 로맨스 소설이 그녀들의 텍스트이다. 또한 여자들은 연애할 때, 이별할 때, 그리고 남자 친구가 바람피울 때, 그 모든 일들을 친구들과 공유한다. 이랬어. 어머. 저랬어. 저런. 이래야 돼. 정말? 저래야 한다니까. 깔깔. 그리하여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사랑에 관한 수십 개의 시나리오들이 완성되어 있으며, 또한 각각의 시나리오마다 배역과 연기의 색깔이 어느 정도 설정되어 있다. 즉 그녀들에게는 수십 가지의 대처 방안이 이미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남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스포츠 만화나 무협지를 보며 영웅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 가까운 친구들과의 대화는 욕설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 속에 연애 이야기가 들어갈 자리란 없다. 사랑에 대한 시뮬레이션? 없다. 애인이 바람을 피운다고 친구가 고민하면? "술이나 마셔"라고 말해 준다. (오쟁이를 지다니, 쪼다 같은 놈!)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럴 리가 있겠나. (생각한 적도 없다니까.) 막상 일이 닥치면? 왜 나야! - pp.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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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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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사회주의자 또는 좌파라고 선언하는 귀화 지식인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 어떤 색깔을 하고 있을까.
나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북쪽에서 빨갱이가 내려온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결연한 얼굴로 투표하러 하는 것을 봤고, 더 어렸을 때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 최고 학과 장학생인 삼촌이 카추사 복무 중에 의문사한 얘기를 들었고, 훨씬 더 어렸을 때는 일본과 북한이 축구를 하면 누구를 편들거냐는 참으로 난해한(!) 질문을 받으면서 자랐다. 세상을 보는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 준 이런 일련의 경험들로 나 자신,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감일기』를 읽으면서 일부 수긍을 하거나 신선하다고 생각되어졌던 부분은 개인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개인에게 국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라는 '국가' '민족주의'에 관한 저자의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맞아, 맞아" 편하게 읽히는 내용이 있는 반면 "어?" 하고 고개를 갸우뚱한 내용도 다수 있다. 

"코리안 호스티스가 필요하세요?" (2006年 10月 20日)
그런데 돈을 주는 고객과, '이차'를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즉 경제적인 강제를 받는 '호스티스'의 관계는 서로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관계에 있는가? 경제력을 독점한 남성이, 경제력이 결여된 여성에게 경제력을 무기로 폭력을 휘두르는 게 성매매의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 구매는 '경제력에 의한 강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pp.68-69  

저자는 돈을 주는 남성 고객과 이차를 가지 않으면 안 되는 호스티스의 성매매 관계의 본질을 경제력을 독점한 남성에 의한 폭력 그러니까 '경제력에 의한 강간'이라고 결론을 짓는데, 지불하는 이와 지불 받는 이 사이에 존재하는 '거래'의 다양한 범위를 생각할 때 이는 자칫 일방적이고 편협한 결론으로 보일 수 있다.
혹 대상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직장 상사와 부하 여직원이라면 '경제력에 의한 강간'은 아주 적확한 표현이다. 영화화된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 <폭로(Disclosure)>에선 직장 상사인 데미 무어(여성)가 부하 직원 마이클 더글라스(남성)에게 성적 유희를 강요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가 컸던 것은 지배권력을 누가 소유하는가에 따라 남녀 성의 역학 관계는 얼마든지 역전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 준다는데 있다.
즉 성매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굳이 가해자를 가려내고자 한다면 왜곡되고 기형적인 경제 수단을 선택하도록 여성을 음지로 몰아낸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그러한 사회를 방임 내지는 조성한 국가, 정부, 다수의 위정자들에게 손가락을 돌려야 한다.

이 외에 지난 18대 총선에서 도봉구에서 김근태 의원을 밀어내고 당선된 뉴라이트 재단 이사 신지호 의원과 관련된 내용도 눈에 띈다.  

NL파 세력이 유지되는 이유 (2006年 11月 1日)
"NL파가 '최대주주'(내 표현이 아니라 신 씨의 표현이다)인 민노당을 진보정당이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 좋다. 북한의 체제를 '사회주의'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진보성에 대해서는 나만 해도 회의적이다. 그런데 혹시나 나중에 신씨를 만날 일이 있으면 꼭 하나 물어봐야겠다. 아직도 80년대 말에나 나올 법한, 순진하다 못해 우습게만 보이는 북환 관련 주장들이 계속 나오는 이유를 아시는가?" - p.158

저자인 박노자는 자칫 파시즘의 싹이 될 수 있는 '민족주의'를 혐오한다. 당연히 '민족해방파'인 NL계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부정적이라는 것이지 '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아니다. 저자를 비롯한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사상적 기반과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을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비판적으로 지지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정치적 유연성,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야합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얘기와 일견 상통한다. *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얘기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발생한 표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어용언론을 중심으로 무수히 쏟아졌던 좌파/좌익 나아가 빨갱이 담론, 거기다 반미반정부적이라 하여 불온서적을 발표하는 국방부까지…. 이쯤되면 경제불황으로 허리가 휘는 국민을 웃겨주기 위한 쇼비즘인가 의심이 들 정도.
중국으로 단체 여행을 가고, 금강산으로 효도관광을 가고, 서울 한복판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남과 북이 축구경기를 하는 시대에 좌익, 빨갱이라니. 빨간색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이 온통 빨갛다던가? 

결론은, 저자가 바라는 세상은 지금으로선 요원해보인다. 무엇보다 국가를 보는 국민의 인식이 변했다. 공산주의, 유사 사회주의 체제를 앞세운 동구권 국가들이 어떻게 쓰러지는지는 물론 가까이는 군사분계선 바로 위쪽에 있는 북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방에서 모두 지켜봤던 국민들은 100년 전, 50년 전보다 훨씬 영리해지고 또 영악해졌다.

구소련,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 서구권 유럽과 좌파들의 투쟁사를 보는 저자의 시각이 눈여겨 볼만 하다.
전국민의 시선이 북경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에 가 있던 당시, 지구의 다른 쪽에선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공격하면서 하룻밤새 1500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와 관련해서 읽어볼만 한 내용이『만감일기』에 있어서 옮긴다.

'주니어 제국주의자'들의 발흥 조짐?' (2006年 10月 7日)
요즘 국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솔직히 두려움부터 느낀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많이 보도되지 않은 최근의 러시아와 그루지아 사이의 사태를 생각해보자. 이 사태의 외피적인 윤곽은, 간첩 혐의로 몇 명의 러시아 장교를 며칠간 구속한 그루지아의 '적대행위'에 반응하여 러시아가 그루지아와의 교통과 무역, 재정거래 일체를 금지하는 등 일종의 보이콧을 한 것이다.(…)
지금의 수준은 경제전쟁이지만 바로 다음 순서는 진짜 전쟁이 될 수도 있는 현실이다. 물론 아직은 미-러 어느 쪽도 전쟁까지 가지않으려 할 것이다. 특히 이라크 재식민화에 실패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당장 그루지아 확보를 위해 대리전까지 치를 만한 여유가 없다. 북한에 대해서도 고사 작전을 벌이고 있긴 하지만 무기로 칠 여유 역시 이라크 독립군 덕분에 생기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이 '주니어 제국주의자'들을 긍정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벌써 그루지아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한 태세의 러시아도 그렇지만, 티베트와 백두산 지구의 '개발'에 힘씀으로써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대폭 축소시키고, 차후 북한 영토 인수인계의 이념적 기반인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등 '제국적 발흥'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중국도 미국보다 약체라 해서 좋게 볼 세력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차후에는 세계질서의 재편을 노릴지도 모를 일이며,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안위가 심히 우려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내 언론들이 대체로 무시하고 넘어가고 있음에도, 그루지아 소식을 재음미해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 pp.336-338

놀랍게도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만으로) 4년 전에 씌어졌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창은 이렇듯 다르다. 내 집 안마당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는가? 운이 나쁘면 다음 차례는 우리집이 될 수도 있다.

국가와 민족은 과연 개인에게 무엇인가. 쉽지 않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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