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친과 각자 볼일을 보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 일이 조금 더 일찍 끝나 도서관에 들렀다. 그리고 신착도서 칸에서 발견한 황현산과 배수아의 에세이. 반납기일을 넘겨 대출정지 기간이라 대출은 못하고 일단 동친과 만나 나머지 볼일을 보고 점심도 먹고 동친은 집,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그리고 일몰 직전까지 읽은 두 권.

황현산의 책은 시비평에세이, 배수아의 책은 여행에세이.

 

 

 

먼저, 황현산의『우물에서 하늘보기』

첫번째 목차가 청마 이육사의 '광야'인데, 사실 나는 광야 첫 구절이 해석의 논란에 있는 걸 이 책에서 알았다. 학교에선 배운 기억이 없는데;;;;;

논란이 된 구절은 '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이중에서도 들렸으랴를 '들렸을리가 없다'는 부정형으로 해석할 것인가, '들렸다'는 감탄형으로 해석할 것인가 주장이 나뉜 것이다.

부연하면, 

 

'들렸을리 없다'(부정형)이면 앞 소절 닭우는 소리는 의미 그대로 '꼬끼오'인 거고,

'들렸다'(감탄형)이면 닭우는 소리는 개벽, 새로운 도래 등의 은유인 거고.

 

라는 것이다.

감탄형으로 해석해야 한다가 뒤에 나온 주장(70년 대 중반)인데, 양쪽 모두 상대를 완전히 설득시킬 의견을 내지 못해 지금까지 결론을 못 내렸다고 한다.

사실 작가는 원고지에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끝낸 것이고 또 그게 맞는데, 이렇게 후대에서 해석의 문제가 불거지는 광경을 볼 때마다 작가 스스로 '해제론'을 만들어 어딘가에 보물찾기로 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작품이 오역되면 제일 억울한 건 작가 본인이니까.

읽으면서 가슴 아팠던 목차는「박정만의 투쟁」편.

 

박정만은 1981년 5월 어느 날 그가 편집부장으로 근무하던 출판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의 잠적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능했지만 무책임한 사람이기도 해서, 우리들의 관심은 또 한 차례의 잠적을 성사시켰을 어느 여성의 정체에 대해 더 많이 쏠렸다. 그러나 여자는 없었다. 그가 자신의 대학 동창이기도 한 어느 소설가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오직 그 이유 하나로 검은 차를 몰고 온 사나이들에게 끌려갔다는 것도, 이제는 문학인들의 집이 된 남산의 어느 시설에서 내리 사흘 동안 "청동상"처럼 온몸에 퍼렇게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려진 일이었다. -p. 178

 

박정만은 결국 고문의 후유증을 못 이기고 7년 후 사망한다. 공식사인은 간경화.

내겐 생소한, 이름을 처음 듣는 시인 박정만은 죽음을 앞두고 보름동안 300여 편에 가까운 시작(詩作)을 했다. 유작시를 비롯, 시전집이 있다.

저자는 대안은 역사를 전제로 하는데 역사는 어떤 문제도 해결한 적이 없다.(p.192)라고 말한다.

씁쓸하지만 옳은 얘기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종종 하시던 얘기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때그시절엔 술집에서 술 마시다 끌려가고, 집에서 TV보다가 끌려가고, 길가다가 끌려가고 그랬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사촌이 카투사 복무 중에 의문사한 일이 있어(가족이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은 영안실이었다), 아버지에겐 시대의 일부가 개인사가 된 그때그시절 얘기. 그래도 뭐. 선거가 있을 때마다 6시 땡- 하면 제일 먼저 투표소로 가서 우리가남이가당에 투표하신다.

제목은 잊어버렸고, 어렸을 때 TV에서 본 한국영화인데(흑백 분위기였던 걸로 보아 아주 옛날 영화였던 것 같다), 잘 나가는 교수(?)가 어찌저찌 알게 된 사람- 실은 남파간첩과 술을 마시는데 남파간첩이 "우리 건배합시다"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활짝 웃으면서 건배하는 순간 두 사람 뒤로 커튼이 걷히면서 김일성 '존영'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교수는 남파간첩의 덫에 걸린 것이다. 앞뒤 얘기는 기억 안 나고 유독 이 부분만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건 어린 마음에도 '누명 쓰는 거 참 쉽구나' 공포를 느꼈기 때문.

쓰면서 되새겨보니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이 한국영화는 아마 반공정신 고취를 목적으로 한 선전영화였던가 싶다.

지난 3월에 통칭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었다.

총선이 일주일여 남았다. 당연히 선거판에 나올 수 있는 온갖 세태가 벌어지고 있다.

히틀러의 유명한 선전관 괴벨스의 명언 몇 가지를 옮겨본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사람들은 선동되어있다.

99가지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대중은 정말 개돼지일까. 먹을거리, 유흥거리만 주면 만족하는 가축일까.

가끔 동친과 하는 얘기인데,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패착은 친일청산을 못했다는 거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과 부조리와 비극은 친일청산 실패에서 시작한다.

 

 

 

다음, 배수아의『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비유를 들자면 첫타석 삼진, 둘째타석 삼진인데 셋째타석에서 홈런을 치는 작가가 있다. 작가(or 작품)에 대한 호불호 얘기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로 지금 딱 떠오르는 작가가 정혜윤인데 계속 별로다- 하다가『마술 라디오』에서 홈런을 친 경우로 이후 정혜윤의 신간이 나오면 눈여겨 보게 되었다. 나한테는 그렇다는 얘기. 반면 배수아는 계속해서 타석 삼진. 파울볼도 없고 사구도 없다.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잠자는 남자가 실존인물이긴 할까, 라는 거. 잠자는 남자와 나누는 대화도 마찬가지. 남자도 대화도 지나치게 소설적이라 이런 의문이 남는 것이다. 도중에 책 날개 안쪽의 프로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도, 집에 돌아와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확신을 못하고 있다. 이건 분명 문제가 있는 거다. 뭐가? 작가의 글쓰기가. 혹은 글쓰는 스타일이. 혹은 글쓰는 방향성이.

블로그식 글쓰기던가? 아마 그런 표현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인고 하니 개인 SNS에 쓰는,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나만의' 글을 의미한다. '스타일리쉬'하다는 건 다른 의미로 개성적이라는 얘기인데, 작가의 글쓰기가 지나치게 '스타일리쉬'하면 독자를 일방적인 청자로 만든다. 작가에겐 발산이고 힐링일지 모르나 독자에겐 타인의 꿈 얘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배수아에 대한 나의 호불호는, 그리하여 여전히 유효하며 현재진행형이다. 그녀의 글은 소설, 수필, 번역- 장르 가리지 않고 여전히 불편하다. 하물며 그녀는 번역조차도 그녀의 언어로 채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에 그녀가 번역한 책이 꽤 있는 걸 보면(확인하고 심쿵;;;) 그녀의 글에 느끼는 불편함은 내 불호일 뿐, 대중은 그녀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다렸던 혹은 끌렸던 책의 역자가 배수아라 구매를 포기한 경험이 다수 있는 탓에 페소아의 책이 다른 역자의, 그것도 중역이 아닌 완역이 나온 것에 새삼 '다행이다'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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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너 뮐러

 

 

주초에 온라인서점 두 곳에서 하이너 뮐러의 책(산문집 + 작품해제론)을 한 권씩 주문했는데 어제 y서점의 해제론이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오늘이 배송일임에도 아직도 출고 전인 a서점에서 뮐러 희곡선을 추가 주문. 근데 이 책도 다음 주중에나 온다.

당일배송 시대인 요즘 배송이 4, 5일이나 걸리는 걸 보면 보유재고가 없어서 출판사에 주문을 넣은 것 같지만 어쨌든,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좋긴 하다.

『하이너 뮐러의 연극세계』는 2006년 초판인쇄인데 이런 책은 책이 있을 때, 살 수 있을 때 미리미리 사두는 게 여러모로 정신건강에 좋다. 연극과인간에서 나온 책을 좋아하는데 초판이 소진되면 대부분 증판 없이 절판으로 이어지는 모양새. 이 기회에 여기 책을 싹 주문해버릴까 싶기도 하고.

다음은 <뮐러 산문선>을 배송받은 직후, '필톡테트'를 읽던 도중 M과 통화한 얘기.

 

나: 오디세우스가 영화, 만화, 소설 등으로 재가공되면서 영웅으로 미화돼서 그렇지 사실 원전을 읽어보면 이놈이 진짜 나쁜놈거든

M: …….

나: 아군에겐 지략가이고 능력있는 장수지만 적에겐 교활하고 나쁜놈이지, 비유하자면 조조같달까

M: 오디세우스가 도대체 누군데?

나: 오디세우스 몰라?

M: 처음 듣는다

나: 아킬레우스는 알지

M: 모르는데

나: 트로이 전쟁은 알지? 예전에 영화 봤잖아, 거기 나오는,

M: 아킬레스?

나: 아킬레우스는 모르고 아킬레스는 알고? 

M: (웃음소리)

나: 그래 걔. 여튼 트로이 전쟁 때 아킬레우스 휘하 장수인데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부하들을 데리고 귀향하면서 모험을 겪거든, 오디세우스의 모험이라고 열 개인가 열세 개인가 이게 원전마다 조금씩 다른데, 어쨌든 모험을 겪는데 이 모험이 유명해

M: 혹시 율리시즈 얘기?

나: 관두자

 

정작 본론은 꺼내지도 못하고 얘기를 접었다는 엔딩. 율리시즈는 오디세우스의 영어(라틴)식 이름.

이렇게 쓰니 M이 바보같지만 그래봬도 IQ156의 멘사회원이다. 수학은 수업만 듣고도 만점 받는 이과형 천재인데 단지 책만 안 읽을 뿐. 이분은 온라인 게시판 글도 세 줄 넘어가면 안 읽는다.

 

 

:: 다 이유가 있다

 

고전은, 고전인 이유가 있다.

 

- 반값리스트에 계속 있을 땐 심드렁- 안 사놓고선 정가는커녕 절판되어 이제 살 수도 없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저 운다.

 

- 미하일 바흐친의 책을 읽고 싶은데, 하나같이 품절/절판이다. 아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제목과 껍데기만 바꾼 자기계발서는 허구헌날 나오더구만. 이럴 땐 정말이지 몇 개 국어하는 언어천재들이 재벌할배보다 세계제일미인보다 백만배 부럽다.

 

- 구도소설, 계몽소설을 읽고 감동하기엔 내가 너무 나이가 들었나보다.

오랜만에 톨스토이의『부활』을 재독하고 있는데 청소년소설을 읽는 기분. 책장도 술술술- 얼마나 잘 넘어가는지, 오히려 어렸을 땐 가슴을 부여잡고 읽었던 것 같은데. 참고로, 이건 이 소설이 가볍다는 것과 다른 얘기. 대가의 소설은 대가의 소설이다. 단지, 소설이 너무 착하다는 것뿐... 그뿐.

근데 우스운 건『부활』을 읽는데 자꾸만 도끼 소설이 땡긴다는 거. 케잌을 먹으면 라면이 땡기는 기분이랄까. 내용 중에 까쮸샤(열린책들) 가 투르게네프의 '정적'을 읽는 대목이 있는데 수정전 초판본에선 도끼의 '죄와벌'이었다고 하니, 내 증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안나 카레니나』이후 20년 공백이 이 위대한 작가를 지나치게 종교적으로 만들어버렸다.

 

 

::: 재미가 없다

 

이건 드라마 태양의후예 잡담.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재미를 상중하로 나누면 중? 인심 쓰면 중상? 뭐 하여튼.

시청률이 40%에 육박하고, 유대위 신드롬에, 여자들은 송중기/유대위 앓이를 하고, "-지 말입니다"가 유행어가 됐다는데, 왜 난 여기에 끼지를 못하는 거냐고.

주초에 태양의 후예를 정주행하기 직전, 이런 생각을 했다. 요즘 신드롬이라는 이 드라마를 보고도 재미가 없거나 가슴이 안 뛰면 난 진짜 드라마고자가 된 거라고.

나 이제 어떡하냐. 그동안 드라마를 너무 오래 끊었나봐. 가슴이 안 뛰어. 몰입이 안 돼. 감정이입도 안 돼.ㅠㅠ

어린시절 셰익스피어를 줄줄 외우던 다윈이 칠순이 되어 더이상 셰익스피어에게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심정이 이랬을까. 난 심지어 칠순이 되려면 아직 하아안~참 멀었다고.

그나저나 난 왜 자꾸 강선생이 울면 같이 울고 있는 걸까...???

 

11,12회를 본 소감.

- 쓰리스타가 분명 작전 시간으로 3시간 준다고 했는데 강선생 구하기에 걸린 시간은 3시간이 훌쩍 넘겠던데? 쓰리스타가 그 3시간 동안 유대위는 알파팀 아니랬는데 작전은 알파팀이 하던데? 아, 궁금해, 실종된 3시간.

- 대한민국 군인은 싸구려 불량 군장을 쓴다던데(방수/방진/방탄 안됨 feat.공중파뉴스) 특전대는 다행히 좋은 군장을 쓰나 보구나. 총에 맞아도 끄떡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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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 일인지 책장을 아무리 뒤져도 마루야마 겐지의『소설가의 각오』가 안 보인다. 결국 내 기억을 의심하며 '살까 말까 고민만 하다 안 샀나봐' 포기했는데 직후에 책을 찾았다. 웬 숨바꼭질이냐 싶지만 사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갑자기 예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손바닥 소설』이 읽고 싶은 갈증이 확 일었는데 이 갈증이 마루야마 겐지에게로 번졌다. 결국 두 작가의 책을 한꺼번에 주문했는데 이중 마루야마 겐지는 품절, 절판된 책이 있어 동친에게 투덜투덜 하던 중에 화제가 하루키로 확장됐다.

하루키가 화제에 오를 때 대개 내 어투는 부정적인데 고백하자면 자연인 하루키에겐 아무 유감 없다. 오히려 살짝 호감이다. 작가 하루키가 취향이 아닐 뿐 내 부정적인 논조는 순전히 국내 하루키 열풍에 국한된다.

 

여하튼 하루키와 관련하여 국내 출판사의 비정상적인 인세 계약을 비난하던 중에 동친이 불쑥 "난 일본소설에 열광하는 게 이해가 안 가더라." 한다.
직전에 일본소설 십여 권을 주문한 입장에서 동친에게 거듭 강조했지만 일본작가에 대한 내 호불호는 50년代 출생을 전후해 갈린다. 간단하게 50년 이전 출생 작가는 호, 50년 이후 출생 작가는 불호인데, 마찬가지로 나오키 수상작은 거의 관심 없는 반면 아쿠타가와 수상작은 선호한다.

 

 마루야마 겐지는 43년 생이며,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였으나(23살 때 수상) 2004년에 스무 살 와타야 리사가『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수상하면서 최연소 기록은 깨어진다. 뱀발이지만 개인적으로 아쿠타가와상에 대해 가졌던 신뢰가 처음으로 위협받았던 것도 이때였다. 실제로 이후 시들해지기도 했고.

재미있는 우연은 마치 경쟁하듯 이듬해인 2005년 국내에서도 모일간지 주최 문학상 최연소 수상자가 나왔는데 바로 김애란이다. 그녀는 그해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데뷔한다. 재미없는 우연은 두 작가의 소설을 읽은 내 감상이 대동소이하다는 거.

 

 아쿠타가와상 하니, 생각난 김에 검색해본 히라노 게이치로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듯 하다. 히라노 게이치로 역시 첫 소설로 23살에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는데 와타야 리사와 달리 그의 경우는 '신동'이라는 찬사와 함께 일으킨 열풍이 수긍이 간달까. 당시 내 나이가 어린 탓도 있겠지만 특히『달』을 읽고 난 직후 느꼈던 서늘함과 기괴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김난주, 문학동네

 

십구 년 전, 타인이 쓴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내가 팔리는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를 알고 싶어 읽은 적이 있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읽지도 않고 비평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 읽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형편없었다. 아예 비평 대상이 될 수 없는 엉터리들이었다. 읽자니 눈이 썩어들어갈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정말 이런 소설을 좋아한단 말인가,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니 내가 쓴 소설이 팔릴 까닭이 없지'라고 깨달은 나는, 이후 그 문제에 대해 거리낌없는 기분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나는 내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독자들이 내 책을 사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또는 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데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 읽지 못한 독자들이 사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런 바람뿐이다. (pp. 286-287)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을 읽다 보면 '김훈스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산문 구석구석에 밥벌이하는 지겨움이 잔뜩 배어있기 때문인데, 마루야마든 김훈이든 글쓰기는 밥벌이를 의미한다. 먹고 살아야 하는 지겨움, 먹고 살기 위해 써야 하는 지겨움, 이젠 먹고 살만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글쓰기의 지겨움.

그런 공통점 때문인지 두 작가 모두 연필로 꾹꾹 눌러 쓰는 곡진함이 행간마다 가득하다. 문학이 작가에겐 먹고사니즘의 수단이고, 독자에겐 취미생활이라니 작가에겐 불행인지 모르나 독자로선 어쨌든 다행한 일이다. 먹고 살기 위해, 라는 건 용돈을 버는 수준이 아닌 말그대로 빵 한 조각을 살 돈을 위해 글을 쓴다는 의미로 발자크가 그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고, 필립 k.딕이 그랬다. 덕분에 우리는 시대를 가로질러 그들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것이고.


왜 소설가가 되었는가 보다 왜 소설을 쓰고 있는가를 얘기하고 싶어하는 마루야마 겐지는 400자 원고지 백 매면 얼마, 2쇄 증판하면 얼마를 늘 계산하고 내가 왜 이걸 쓰고 있나 끊임없이 투덜거리지만 문학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유년 때부터 그의 삶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과거의 추억을 통해 스스로 간증한다.

산문을 읽으면서 중간 중간 이 양반이 작가가 된 건 우연인가, 고개를 갸웃하지만 결국 필연이구나 하는 부분이 이런 지점이다. 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글쟁이가 될 수 없는 것. 이제 그만 쓸 테다! 외치는 다음 순간 뭘 쓸까 고민하는 것.

문학을 한다는 행위는 결국 그런 거다. 시지프스처럼 일생을 문학이라는 신기루의 산 위로 원고지라는 돌을 굴리는 것. 뭐, 독서가 더 이상 취미가 아니게 되거나 지구상에 나무가 사라지거나 하면 글쟁이를 그만 두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음. 이북이라는 대체제가 있으니 나무 이야기는 이제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을 읽을 땐 못 느꼈는데 산문은 묘하게 김훈과 장정일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니 안 좋아할 수가 없다. 작가가 자기글에서조차 고상할 필요는 없다. 작가가 연기를 하고 연출을 하는 건 소설만으로도 충분하다.


안 산 줄 알고 낙담했다가 뒤늦게 책을 찾은 김에 잠깐 읽었는데 짧은 독서가 주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다. 나중에 제대로 다시 정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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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니와 주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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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미치고 환장'하는 기분을 느낀 게 얼마만이더라 꼽아보니 최근엔 소설을 거의 안 읽었구나.

거의 종장까지 읽었을 무렵, 너무 좋아서 책을 안고 방방 뛰다가 결국 M에게 전화했다.

목소리에서 흥분이 전해졌는지 어쩐 일로 M이 두서없이 마구 쏟아지는 내 말을 군소리 없이 들어주었는데 그와중에 나는 낭독까지 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독서가 환희였던 건 아니다.

 

『프래니와 주이』는 중단편「프래니」와「주이」연작 소설로 등장인물은 프래니, 주이, 글래스 부인(엄마), 레인(프래니의 남자친구) 넷이고 이들 외에도 편지와 극중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등장하는 버디(둘째 형), 시모어(첫째 형)가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처럼『프래니와 주이』도 '기-기-기-결'의 지루한 구성인데, 중반이 지나도록 그들이 대립하는 내용이 공감도 안 가고 이해도 안 되니 이야기 속으로 진입하는 게 쉽지 않다.

 

일단 이 소설은 종교적 담론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는데, 샐린저의 개인 성향인지 청교도적 교조주의는『호밀밭의 파수꾼』에 이어 이번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종교는 그 생리 자체가 폐쇄성과 결벽증을 갖고 있다 보니 '예수기도문'이 실린 작은 책을 둘러싼 글래스 남매의 다툼에 가까운 대화 역시 공감보다는 먼나라 먼이웃처럼 '아이고 의미없다'는 생각만 자꾸 든다.

 

재미있는 점은 종교에 대한 샐린저의 이중적인 태도인데, 매맞는 아내랄까, 그러니까 청교도주의 세태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결국 구원은 청교도주의 안에서 찾는다는 샐린저식 해법은 일견 '종교가 다 해줄거예요~'하는 허탈감을 준다.

게다가 이 소설은 샐린저의 다른 소설에 비해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인상이 강한데 이는 프래니와 주이가 '배우'인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업주부인 글래스 부인(베시 글래스) 역시 젊은 날엔 배우였으니 이 집안의 내력이 그러하다. 이렇듯 등장인물 모두가 한결같이 연극적 대사, 연극적 제스쳐를 취하니 좋은 말로도 소설의 흡인력이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소설에서 감각적인 재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

 

일본판『프래니와 주이』의 역자인 하루키는 역자 서문에서 소설 속 종교적 담론을 일종의 정신적 메타포로 수용하면 '종교'라는 허울에 현혹되지 않고 내용의 핵심에 접근하는데 보다 쉬울 것이라고 했지만, 이게 사실 간단치가 않다. 이 연작 소설이 발표된 1954년, 1957년은 아이젠하워(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사령관) 집권기이고, 10년 째 접어드는 전후 냉전체제가 공고히 다져지고 있고, 매카시즘 광풍이 한바탕 휘몰아쳤던 직후이다. 이런 세태와 청교도라는 배경을 깔고 뉴욕 부유층 남매가 종교적 담론을 벌이는 것이다. 문화의 뿌리가 아예 다른 국가의 독자들은 1950년대 뉴욕의 세태와 더불어 종교적인 장벽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장벽들에도 불구하고 나를 그토록 흥분케 했던, 작가로서 샐린저의 명성이 여지 없이 빛나는 지점이 있다. 이 낯설고 까다로운 대화를 인내심을 가지고 듣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기대하지 않았던 보편적 감동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기어이 온다.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읽어야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데, 같은 길을 이어 붙이기 한 것 같은 산길을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고 저 아래로 걸어온 길이 완성된 풍경을 이루는 장광을 보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고진감래(苦盡甘來)!

 

소설이 끝나가는 거의 막바지에 소나기처럼 등장한 '뚱뚱한 여자'는 의미 그대로 이 소설의 화룡점정이고 절창이다. 주이에게 구두를 닦게 하고, 프래니에게 무대를 재미있게 만들도록 감시하고 조종하는 시모어의 '뚱뚱한 여자'가 주이가 이해한 것처럼 정말 '그리스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독자(=나)로 하여금 소설 전체를 되돌아보게 하고 다양한 해석과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구원의 메타포임에는 분명하다.

 

(샐린저를 대변하는 것 같은)샐린저의 소설 속 '오빠'에게 여동생은 특별하다.『프래니와 주이』에서 내가 감동 받았던 장면은 두 곳인데 모두 주이가 프래니에게 내면적 소통을 시도하던 장면이다. 근거는 없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왠지 홀든이 피비로 인해 구원받았던 빚을, 주이가 프래니에게 갚는 것처럼 느꼈고 괜히 울컥했다.

 

* 소설을 읽으면서 영혼 없는 은유 만큼이나 의인법을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거실 나머지 부분에는 그리도 무례하게 굴던 태양이 훌륭하게 처신하고 있었다. (…) 햇살은 사실 아프간 담요 전체를 씻고 있었고, 연푸른색 울 담요에 노니는 따스하고 화사한 빛의 유희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바라볼 가치가 있었다. -p.158

 

 

* 다음은 샐린저의 예술론 혹은 작가론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예술가의 유일한 관심은 어떤 완벽함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의 완벽함이야. 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선 생각할 권리가 없어. 어떠한 의미에서든. -p.250

 

분량이 짧은「프래니」편은 그냥 저냥 읽고「주이」편을 읽던 도중, 결국 거미줄보다 얇은 인내심을 탓하며 책 후면을 뒤졌다. 도대체 작가가, 소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옮긴이든 작가든 그들의 생각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설 엔딩 뒤로 페이지가 공백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뒤늦게 샐린저의 소설은 작가 에이전시의 요구로 서문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내친 김에 일본어판 역자인 하루키의 해설이 궁금해 잉여력을 발휘, 하루키 역자 서문을 잠깐 훑어봤다. 하루키 역자 서문은 삽지 형태로 책에 끼웠다고 한다.

 

 

- 아래는『프래니와 주이』일본어판 하루키 역자 서문(혹은 역자 해설)을 읽고 짧은 감상

 

 

 하루키는 역자 서문에서 이 소설의 재미는 단연 '매력적인 문체'에 있다고 단언하는데, '버디 문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주이」는 주이에게 보낸 버디의 편지로 시작하는데, 서간문의 특성상 화자의 개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그로 인해 친밀감이 더 느껴지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굳이 '버디 문체'라고 특정 짓기에는 '홀든 문체'와 그 차이가 썩 안 느껴진다는 게 문제다. 

 

한발 더 나아가 하루키는 샐린저가 버디의 문체를 차용해 '주이'를 쓰고 있으며 문장이 자유자재로 변화한다고 감탄하는데 역시 공감하기 어렵다.「주이」는 서사가 아니라 종교적 담론을 바탕으로 대화에서 시작해 대화로 끝나는 소설이라 딱히 문장을 음미할 대목이 없기 때문. 만약 문법적인 요소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하루키 개인의(혹은 일본인 정서의) 취향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겠다. * 참고로 내가 읽은 '호밀밭'과 '주이'는 역자가 다르다.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책을 읽은 사람은 대개 공감하겠지만,「프래니」가「주이」의 도입부로 읽힌다는 부분과 샐린저가 레인을 통해 학벌주의 엘리트를 비판한다는 부분인데, 사실 학벌주의 엘리트 의식을 비판하는 부분은『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이미 한차례 등장했기 때문에 딱히 새롭지는 않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다 웃음이 터졌던 부분은 독자들이 제기했다는 '프래니 임신설'이다. 이유는 너무 자주 실신하고, 섭식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데 뭔가 설득력이 있는, 굉장히 합리적인 의심이지 않은가. 하물며 비평가들마저 이 의문에 가담했다고 하니 자기 소설에 강박에 가까운 결벽증을 가진 샐린저가 기함하고 펄쩍 뛸만 하다.

 

「주이」는 애초에 두 가지 이유로 뉴요커지(紙)로 부터 거절 당했는데 '분량'과 너무 '종교적'이라 게 그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래로 위기에 닥친 작가 옆엔 능력있는 편집자가 있는 법. 뉴요커지 편집장의 결단력과 팬심으로 소설은 분량은 좀 줄었으나 무사히 뉴요커 지면에 실리고 샐린저는 작가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하루키 역자 서문에도 언급하지만 국내『프래니와 주이』역시 책 서두에서 샐린저가 아들과 더불어 편집장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는 헌사를 볼 수 있다. 샐린저의 은둔 성향을 미루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국내판 역자도 일러두기에 Zooey의 발음 표기를 놓고 판본을 가진 에이전시에 연락해 'zooee'라고 발음을 확인했다는 설명을 했는데, 이는 일본도 상황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일본의 경우 기존엔 'ゾ-イ-'(조이)가 일반적이었으나 'ズ-イ', 'ゾ-イ'등을 놓고 숙고 끝에 'ズ-イ'를 선택했다고 한다. * 'ズ'의 원어민 발음은 주와 즈의 중간 어드메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으면서 부러웠던 부분은 샐린저 사후 작가와 관련하여 다양한 책이 출간되고 있다는 내용. 작가가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이지만 독자는 그저 반가운 일.

거의 홀짝 수준으로 대충 역자 서문을 훑은 소감은, 그 발로가 하루키의 팬심인지 아니면 역자로서의 성실성과 책임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례사 비평의 느낌이 드는 대목도 적지 않다는 거.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유익했다. 무엇보다 역자 서문만으로도 이런 감상을 쓰게 하는 하루키의 힘이랄까.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나는 하루키를 안 좋아한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은 직후 국내 출판사 제공 책소개(=출판사 리뷰)를 읽는데 이미 읽은 듯한 기시감에 대조해 보니 일본판 하루키 서문과 국내판 출판사 리뷰 중 일부는 거의 번역 수준으로 흡사하다.

1950년대 미국, 동양철학, 원시그리스도교리, 비트세대, 반물줄질주의와 반실용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성, 아카데미즘, 샐린저의 트라우마 등등...

참고로 하루키 역자서문이 실린 일본어판은 2014년 3월에 출간됐다.

아래는 각각 문학동네의 출판사 리뷰와 하루키 역자 서문 중 일부를 비교한 것. 

 

1950년대 미국에서는 동양철학과 원시 그리스도교 교리가 지금보다 훨씬 절박하고 리얼한 존재성을 띠었고, 비트세대로 이어지는 하나의 사상적 조류였다. 이러한 종교성은 반물질주의와 반실용주의를 지향하며 압도적 번영을 반성 없이 향유하던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차갑고 경직된 아카데미즘이나 상상력이 모자란 획일적 미디어에 대한 반대였다. 이는 또한 제2차세계대전에 병사로 종군하며 격전지를 헤쳐온 샐린저가 짊어지게 된 깊은 트라우마의 절실한 위안 수단이며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샐린저가 말하고자 했던 영성은 특정 종교의 고정된 교의가 아니라 오히려 유동적이고 일반적인 ‘신을 원하는 심성’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출처. 온라인 서점 출판사 리뷰 中)

 

ただひとつご理解いただきたいのは、一九五〇年代のアメリカにおいては、東洋哲学や原始キリスト教の教義は、おそらく現在よりもずっと切迫した、リアルな存在性を持っていたという事実だ。ビート・ジェネレーションへと繋がっていくひとつの思想的ファッションとなっていた、と言ってしまってもいいかもしれない(もちろんサリンジャーの場合はそれは単なるファッションに留まらず、良くも悪くも彼を全的に包含していったわけだが)。それらの宗教性が意味するのは反物質主義であり、反プラグマティズムであり、圧倒的繁栄を無反省に享受するアメリカ社会への静かなる「ノー」であった。冷たく硬直したアカデミズムや、想像力を欠いた画一的メディアに対する「ノー」でもあった。また同時にそれは、第二次大戦に兵士として従軍し、数々の激戦の中をくぐり抜けてきたサリンジャーが背負うことになった深いトラウマの、切実な癒やしの手段であり、ヒューマニティー回復への大事な道筋でもあった。 (출처. http://www.shinchosha.co.jp/fz/fz_murakam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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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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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쓸쓸한, 뭐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소설. 2부 타인의 증거를 읽을 때는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건조하고 차갑지만 결국은 아름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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