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세상은, 지식인에게 있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일'에 대해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양심과 용기를 발휘해 두주먹 불끈 쥐고 떨쳐 일어날 결의를 다잡지 않으면 안되는, 비상식의 세상이므로,

촘스키의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 뿐이다'의 한마디가 가지는 비중은 실로 엄청나다. '나는 이 몸 하나 불살라 나락으로 떨어진 세계를 구해내겠어'라는 말과 똑같은 무게로 들린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만, 허세도 과장도 아니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미칠듯이 돌아가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를 미국과 영국의 악랄한 세계제패의 음모로, 무소불위의 권위를 획득한 세계자본주의의 횡포로 명료히 규정하는 촘스키의 해석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정확하고 유력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권력을 옹호하고 권력에 기생하고 나아가 스스로가 권력이 되는 '언론'에 대한 경계와 지적은, 안티 조선일보 운동과 언론개혁의 화두로 첨예한 한국사회에 적지 않은 행동 동기를 유발해 줄 것으로 보인다.

촘스키는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대중의 조직된 힘'이라고 이야기 한다. 언론개혁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부리는 흑마술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깨닫고 바꾸려는 '대중의 의지'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무도 막연하게 들리는 대안이지만, 또한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한 대안이며, 역사적으로도 유일무이한 대안임에 틀림없다. 무력감이나 패배감이 유일한 대안을 경시하게 만드는 원인일 뿐이다.

나는 촘스키가 언론학자로서 얼마나 훌륭한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단지 그가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크게 감동받았다. 그러나 정작 촘스키 본인은 '잠시라도 세상일을 잊고 언어학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정치투쟁은 거짓말을 폭로하고 그에 관련된 주역과 꼭둑각시를 구별해 내는 일'일 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지적인 활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촘스키가 누구보다 더 행동하는 지성으로 살아가는 까닭은, 두뇌가 관장하는 '지적인 활동'보다 심장이 관장하는 '양심적 행동'이 더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객지 황석영 중단편전집 1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객지. 삼포 가는 길. 몰개월의 새. 이들 황석영의 중단편소설집1,2,3을 몇날 밤을 들여 한꺼번에 읽어치운건 처음부터 의도해서 그런건 아니었다. 새로 나온 장편소설 <손님>을 읽고자 주문할 적에 '내친김에' 들인것이 계기였다. 숨 차게 세권을 내리 읽어내리고나니 이것들, 내 눈엔 중단편 모음이 아니라 세권짜리 장편소설로만 보인다.

작가의 데뷔작 '입석부근'. 이것이 정녕 황석영님의 작품인가 슬슬 의심하는 기분이 되어 책장을 넘긴다. 고등학생 시절의 작품이라 해도 내가 아는 작가의 문체와는 멀디 먼 현학적 관념적 구절구절들이 여간 거슬리는것이 아니다. 그러한 실망을 지긋이 누르고 속도를 높일 적에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황석영만의 묵지근하지만 정서를 파고드는 문체가 반갑다. 그 때부터 책장이 파라라락 소리라도 낼듯 빠르게 넘어간다.

월남전 참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탑','몰개월의 새'같은 작품들이 하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어린시절의 경험이 짙게 발라진 성장소설들이 입꼬리에 꿈틀거리는 웃음을 달아주고는 다음 작품으로, 또 다음 작품으로 밀어넣는다. '객지'에서는 뚜렷한 분노와 왠지모를 섬뜻함을, '삼포가는 길'에서는 뭉근한 해학과 뒷맛으로 남는 쓸쓸함이 어쩔 줄 모를 정도로 읽는 재미를 부추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나는 세번째 권의 '심판의 집'에서 내용과는 상관없이 폭소를 터뜨리고 만다. 살벌한 제목과 스산스러운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추리형식의 소설이 도무지 황석영답지 않으면서 너무도 황석영스러운 재미를 듬뿍 담고 있다. 나는 일본에 살면서 널리고 널린 추리형식 서스펜스드라마를 아주 즐겨보는데, 여기서는 살림하는 아줌마들이 집안일 끝내놓고 한 숨 돌릴때 보라고 대낮에만 몇 편씩 방영된다. 그런 나에게 동료들은 대놓고 쯧쯧 혀를 차기 일쑤라 즉 내용이나 감동의 질에 상관없이 남에게 말못할 경박한(?) 취향으로 쉬쉬하고 있던 형편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딱 그런 내용의 '심판의 집'이 너 이거 봐라는 듯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요러한 개인적인 까닭도 한 몫 해 즐거움을 배가하면서 책읽기는 가속을 더한다.

이러니 중단편전집 세권이 한 통짜리 장편소설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책읽기 습성이나 비밀스런 취향만으로 그만큼 확고한 인상을 갖게 되지는 않는 법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아마 가장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이 세권의 중단편소설들은 한 코에 꿰어진 곶감처럼 질서정연하고도 일목요연한 흐름과 주제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작품 한 작품이 각각 뛰어난 작품성과 무게를 갖고 독자를 향해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작품들이 또한 한 목소리, 하나의 주장이다.

아마도 그것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란, 바로 황석영 작가 자신의 인생 그 자체일 것이다. 남과는 조금 다른 인생역정일 지언정 작가 또한 우리와 동시대에 몸을 얹은 한 사람의 인간이다. 그 인생과 정신세계가 참말로 맑고도 깊어서 심연까지 깨달을 길이 없다고 해도. 그리고 나는 이 세권의 중단편집이 하나의 장편소설로 여겨지고 또 작가 자신으로 여겨지는 혼동이 오는 현상이 작가의 장인정신 실린 노련한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해석도 해본다.

솔직히, 글 쓰는 일이 콩이네 팥이네에 머물기 일쑤고, 그래서 뭔데?라고 묻고싶어지는 결말 투성이인 최근의 한국소설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실망의 반대급부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명백히 인정할 것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나도 그림이라는 매체로 자신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입장이지만,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깊이 만큼만 남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현학적 태도도 재주의 능란함도 인간이 갖고 있는 본래의 깊이만큼은 조작하지 못한다. 하물며 인간의 머리속에 들어박힌 생각틀이야 오죽하겠나. 확석영의 소설들로 말하자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시종일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묵지근한 토로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 황석영을 통째로 읽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황석영 소설이 주는 뿌듯함이라고 어찌 단언하고 싶지 않으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령의 사랑
손석춘 지음 / 들녘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대 초반에 마르크스를 알게 된 일은 두말 할 것 없이 내 인생 최고의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를 사랑했으며 경외했고 탐독했다. 이제까지 받았던 교육이나 부모님의 양육이 아니라 마르크스에 의해서 이제 나는 진정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은, 솔직한 이야기, 술자리에서조차 마르크스를 화제로 올리는 일이 드물다. 나는 변질한 것인가. 때로는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사랑이 지적 허영이나 시대를 역행하는 가치 없는 고집이 아닌가에 대해 의심하느라 한없이 눈이 가늘어지기도 했다.

소련이 망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죄다 마르크스를 손가락질 하고 돌 던지고 상처입히는 것이 속상해서 가슴이 터지는 밤낮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속시원하게 한 번 마르크스를 변호하지 못하는 내 주변머리가 진절머리쳐지는 것이었다. 들끓는 애증이 서서히 자연소화되어 까맣고 딱딱한 응어리 하나가 데굴거리고 있었다.

그런 배경때문인지, 이 소설의 안팎으로 신경이 쩍쩍 달라붙으면서 이입되어 가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글을 쓴 손석춘님이 되었다가 작중의 한민주가 되었다가. 이성을 바짝 차리고 객관적인 총명함으로 글을 읽어내리는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간중간에 도저히 넘지 못할 세대차(200년이라는 세월이니 억지로 이해하려고 해도 안되는건 안되는거다)때문에 번쩍 정신이 들곤 했다.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마르크스와 예니의 귀족근성이라든지, 렌헨의, 노동자로써의 자각에도 불구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기질등이 작가의 너그러운 시각(?)에 동의하지 못할 몇가지 부분이긴 했다.

예를들어 마르크스가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예견하고 계획했던 것에는, 자기가 행한 가장 가까운 지배 피지배에 대한 무언가의 조처나 언급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런 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게 내가 이 소설에 바보같이 밀착해버린 것은, 마르크스가 유령의 모양새로라도 나타나서 해줬으면 하는 말들들 책 속에서 그대로 하고 있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함부로 단정지어 말하건대, 이 책은 마르크스와 렌헨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칭송된 마르크스가 인간적으로는 그렇구 그런 놈이었다는군 운운이 얼마나 치사하고 경망스러운 인신공격에 불과한지에 대해 조용히 꾸짖고 있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뒤에 숨은 질책, 마르크슨지 구정물인지 소련 망한거 보면 거 다 뽀롱난거 아니냐, 에 대한 완고한 그러나 눈물나게 열심스러운 대답이 이 책 안에는 있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일시 하는 오류는 반대에 있는 자들에겐 의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겐 자신의 무능과 자조에 의해 형성되어온 것이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마르크스의 유령을 만날 생각을. 21세기의 이 세계는 프롤레타리아조차 순수성을 잃고 자본의 넘실대는 향락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이 보이고, 대기권도 뚫고 나가는 자본주의의 기세와 콧대에 햇볕들 틈도 없는데, 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생각을 않고 지친 자기 등허리만 쓰다듬고 앉았던 것일까. 유령 마르크스는 일갈한다. 현재의 너희들은 왜 현실의 객관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를 만들어내지 않느냐고.

어쩌면 당연하고 쉬운 그 말이 명치를 찌르듯이 쑤시고 들어와 깊은 자국을 남기며 각인된다. 마르크스의 유령은 투명한 유령의 눈으로 가르친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눈이 탁해 보지 못하고 있는 새삼스러운 진리, 살아서 운동하는 것들은 모두 변한다는 역사의 철칙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슨 사연이 있어서 최근에 많은 소설을 읽고 있는데, 그 사연이란게 공부나 업무에 관련된게 아니라 그냥 좀 쉬고 싶어서라 될 수 있는대로 맘에 드는 소설을 읽기 위해 노력했지요. 책장 덮을때까지는 맘에 드는지 안드는지 알 수가 없으니 노력해봤자 소용없지만요. 사실 맘에 든다는 표현도 웃겨요. 그때 그때 내가 되기 원하는 감정의 상태가 다르니까요.

아무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몇권인가 읽었는데, 골이 띵해지는 것도 있었고, 뭐야 이거.. 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있었지요. 그래도 읽었다는 것 자체에도 전 많은 의미를 두고 기뻐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흡족했거든요. 그런데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니까, 책의 뒷표지가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건지.

왜들 그렇게 덜떨어지고, 왜들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만 갖다가 글을 썼는지, 좀 물어보고 싶더라구요. 평범한 사람들 데려다가 니가 그렇게 평범한 척 하지만 사실은 그 속에 새까맣게 타있지 않냐고 몰아부치고, 이상한 행동 하게 하고 그러는게 요즘 많잖아요. 그런데 대놓고 문제있는 사람들 데려다놓고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인데 하고 늘어놓으니까 불쌍해야 할 것도 안 불쌍하고, 슬퍼야 할 것도 안 슬프고 화나야 할 것도 안 화나잖아요. 원래가 없기 쉬운걸 있다고 우김을 당하면서 읽다보니 뇌가 막 붕붕 뜨는것 같더라구요. 머리속에 고여있던 묵직한 현실감각이 풍선에서 바람빠지듯 빠져나는게.

아무튼 나는 책을 덮으면서 외쳤습니다. 난 이런 소설이 좋다!! 라구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런 책만 골라 읽을 능력이 있는것도 아니라 행동이 따라주지 못할 선언같은 거지만요. 나는 소설이 재미만 있다고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어깨가 뻑적지근하게 무거운걸 쏟아내거나, 방황하는 영혼만 드글거리는 것도 지긋지긋합니다만,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이런 장애를 많이는 갖고 있지 않은 잘 써진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이런 책을 읽어서 기분이 참 좋았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김치 백가지
한복려 지음 / 현암사 / 1999년 12월
평점 :
품절


얼마전 김치의 국제어 표기에 대한 문제로 '김치'냐 '기무치'냐를 놓고 한,일이 가볍게 분쟁했던 사건이 있었다. 결과는 당연히 '김치'가 국제적으로 올바른 표기이고 한국이 김치의 종주국임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 단락되었다. 생각해보면 '김치'가 '김치'로 불리우는 당연한 결과를 위해 싸워야만 했던 황당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김치'아닌 '기무치'로 세계시장을 뒤덮은 일본의 상업적 저력에 가증스러움을 느끼기 전에 어느새 세계인의 입맛을 장악해들어가고 있는 '김치'의 주인으로서 존경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스스로 반성을 요구할 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유학생이다. 처음 일본에 와서 나는 일본사람들의 '기무치'에 대한 애정과 선호도, 그리고 경외심에 놀랐다. 그러나 더욱 놀란것은 그들이 그렇게 '다이쓰끼(너무좋아!)'를 외치면서 감격적으로 먹고 있는 '기무치'의 정체였다.

'절임'의 과정이 놀랍도록 축소되거나 생략된, '젓갈'의 사용이 극도로 자제된, 자신들의 입맛에 맛게 '단맛'을 강화한 그것은 '김치'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기무치'는 한국토산음식 '김치'를 흉내낸 쯔께모노(일본 전통 밑반찬인 '절임'의 총칭)의 한 종류일 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조악하게 김치를 흉내내고 게다가 그 흉내의 결과를 세계시장에 팔아먹은 일본인들에게 화를 낼 생각은 없다. 아니, 화를 낼 일도 아니다. 우리 음식이라고 해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맛과 내용을 가지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중국음식 아닌 중국음식 '짜장면'이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런 말도안되는 김치를 그토록 맛있어 하고 귀해하면서 먹고 있는 일본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들이 제대로된 김치를 일부러 왜곡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김치가 무엇인지 모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인테넷을 통해 만난 한권의 김치에 대한 백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김치 백가지>. 워낙 요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늘 출판되는 요리책을 주의깊에 보고 있었지만, 유학을 온 이후로 특히 한국음식에 대한 문화적 관심도 커져 있던 차였다. 김치라는 단 하나의 주제로 만들어진 이 책은 이제까지 만나왔던 요리책과는 엄연히 다른 경계를 지닌 것이었다. 다른 요리책과 다름없이 조리법과 요리의 사진, 코멘트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은 '이거 한 번 만들어봐라. 요리가 서툰 당신도 할 수 있다'류의 실험지침서가 아니었다. 정보였다. 지식이었다. 그리고 김치에 대한 존경이었다.

하나의 문화로서 음식을 대할 때,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 밥상위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인의 식탁위에서 올려져 진미로 대접받는 시대가 오고 있을 때, 아무런 애정도 존경도 없는 젓가락질은 자부심 없이 생각없이 우리 문화를 방치하는 일에 다름아닐 것이다. 사랑과 존경에서 시작되는 '김치'에 대한 앎, '김치'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필요하다. 세계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김치를 맛보여주는 일은 제대로 된 김치의 맛을 알고 있는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치는 맛 뿐 아니라 영양적으로도 조리과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뛰어난 음식문화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에서 소개한 맛깔스러운 김치를 보고, 읽고, 만들어보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김치에 대한 존경을 가져보았다. 레시피 뿐 아니라 김치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와 정보를 접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앞으로 김치를 새롭게 보고 아끼는 사람들이 더 많은 좋은 책을 만들어 낼거라고 생각한다. 그 책들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백가지 김치가 담긴 이 책의 그래도 아쉬웠던 부분을 메꿔준다.

김치에 대한 애정과 존경, 그것은 김치와 함께 빨갛게 익어 온 우리 문화와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그 사랑이 시작되고 멈추지 않는 한, 일본사람들이 진정한 김치를 맛볼 날이, 유럽에서 미국에서 호밀빵에 김치를 얹어 먹으며 즐거워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만날 날이 바로 내일의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