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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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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작가의 신간 소설 소식이 들렸다.

얼마만이지?

​20년도 훨씬 전부터 나는 황석영 작가의 팬이다. 팬이라고 해도 펜레터 한 장 써본 적 없지만 적어도 그의 책은 꾸준히 사고 읽었다. 지금도 내 서가의 한 켠은 황석영이라는 이름들로 이루어져 있다.

​언젠가부터 작가의 신간 소식에 심드렁해졌다. 아마도 내가 젊은 시절만큼 문학에 두근거리지 않게 된 탓이 크다. 직업의 영향으로 많이 읽는 분야도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취향도 바뀌었다. 황석영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예전만큼 가슴이 설레지 않았다.

​그럼에도 <철도원 삼대>의 소식을 접했을 때 주저없이 서평단에 지원한 것은 설렘보다는 아마도 믿음 때문이다. 최근에는 내 안에 소위 ‘믿고 보는 작가’ 층이 빈약해졌다. 좋다는 요즘 작가들 책을 읽어도 그뿐, 예전처럼 한 작가를 샅샅이 파고드는 편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철도원 삼대>를 만난 날, 나는 낡은 편력의 먼지를 털어내며 은근한 벅참과 기쁨을 누렸다.



<철도원 삼대>는 가제본판으로 왔다.

서평단에게 배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가제본인 건 별로 서운하지 않은데 책이 마치 잘린 생선토막처럼 몸통, 꼬리 없는 상태인 것이 당황스럽다(총 620쪽 중 222쪽까지 제본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초중반까지만 읽고 서평을 써야 한다는 것인가? 요즘은 서평을 그렇게 쓰는 게 트렌드인가? 어떻게 해야하지? 심경이 복잡해졌다. 어쨌든 읽는 수밖에.

​<철도원 3대>의 주인공 이진오는 해고노동자다. 부당해고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굴뚝으로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 작가가 본문에 읊은 것처럼, 참 이상하게도 고공농성이라는 것이 이제 한 번 올라가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 년은 기본인 상황이다. 투신의 직전, 그 마지노선에 진지를 쌓고 모 아니면 도의 방식으로 싸우는 게 애초에 고공농성의 의미일 텐데,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이렇게 무디어진 것인지. 작가는 드러내놓고 의도적이라는 듯 이런 부지불식간의 아이러니를 건조하게 써내려간다. 망루 생활자가 느끼기에 굴뚝 꼭대기의 망루를 둘러친 난간이 망루와 허공의 경계로서 영 미덥지않듯, 이야기 속에서 현실과 꿈의 경계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는 내내 모호하다.

​그렇게 진오는현실에서 꿈으로 자각에서 몽환으로, 터무니없게도 아무런 걸림돌 없이 이행하고 그 상태로 어린 시절의 진오에서 아버지 이지산, 할아버지 이일철, 그리고 큰할아버지 이백만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서사의 종단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역시 황석영이다, 싶다. 3대도 아니고 4대를, 한일합병부터 현재까지, 말하자면 국토수탈과 분단, 이념전쟁과 계급투쟁으로 점철된 조선반도의 근현대사라는 늪지대를 아무런 저항 없이 자유롭게 유영하는 내공이, 황석영이라는 세 글자를 저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황석영의 문학은 그대로 비극적인 민족사를 비추는 거울이며 나아가 황석영이라는 사람, 그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철도원 삼대>에서 주목할만 한 작가의 시도를 꼽는다면 치밀해진 여성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읽지 못해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는 3대에 걸친 일가족 남성 구성원들을 주요 인물로 내세웠을 뿐, 기실은 그들의 아내들, 즉 영등포 버드나무집 이씨네 일가의 여자들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기골이 장대하고 천하장사였던, 요절했지만 수호신처럼 산자 앞에 계속 나타난 주안댁, 눈앞에 있는 사람의 운명과 귀신을 알아본 신금이, 억척과 수완으로 가세를 지탱해왔으며, 망루에 올라간 아들에게 간단히 내려올 생각 말라고 기합을 넣어주는 배포의 소유자 윤복례.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하지만, 묘사에 있어서 다소 외관과 행적이 모호한 남성 인물들에 비해 여성 인물들에 대한 서술은 매우 흥미롭고 찰지게 착착 붙어 독자를 이야기로 빨아들인다.

​가제본판은 일제시대의 노동쟁의 부근에서 끊긴다. 왜정 때 ‘주의자’로 살다가 옥중의 이슬로 스러진 진오의 작은 할아버지 이야기다. 아직 할아버지 한쇠와 아버지 지산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서평 쓰기를 이쯤에서 그만 두고,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본책을 사러 갈 것이다. 한 가족의 내밀한 역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따라가는 게 예의일 터이다. 그들의 가족사, 사회사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는 그렇게 역사 속 타자들과 연결된다.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거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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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파란 하늘 : 바닷마을 다이어리 7 바닷마을 다이어리 7
요시다 아키미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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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만화는 그냥 힐링이다.
모든 것이 천천히, 올바르게,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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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소리 13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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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문적인 분야를 소재로 한 만화에 늘 이유없이 끌린다. 일본의 전통악기인 샤미센과 민요를 소재로 한 이야기. 역시나 천재들이 대거 등장하는 식상한 전개이긴 하지만, 샤미센, 그리고 `음`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신선한 역작이라 생각한다. 이미지와 글만으로 `음`을 다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눈으로 보는 소리.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온전한 감동을 위해 이미지를 뛰어넘어 소리로 다가가고 싶게 만드는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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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님전 시공 청소년 문학 50
박상률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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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상엔 사람보다 나은 개`님`도 있다지만 알고 보면 그 삶도 퍽 고단하다. 주어진대로 받아들이고 생긴대로 체념하고, 때론 억척스럽게 망망한 타향살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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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인의 일본견문록 - 해유록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5
신유한 지음, 이효원 편역 / 돌베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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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인의 일본 견문록 (우리고전 100선 15_해유록)

-----이효원 편역/돌베개/2011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 잠과 휴식의 여유를 쪼개 책을 읽는 빠듯한 일상에서 선뜻 고전을 접한다는 건 여간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책 중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게 되는 놈이 있고, 크게 작심을 하고서야 펼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고전은 후자에 속한다. 쏙쏙 귀에 잘 들어오는 동시대의 언어가 차고 넘치는 이 시대에, 오래된 언어와 깊이를 모를 함의로 가득한 고전은 역시 까다롭고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시대를 거슬러 올라 고전이 ‘현대물’이었던 시절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이런 생각이 얼마나 소심한 편견인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몰이해’다. 분단된 남북의 민중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같은 언어이되 다른 언어를 구사하게 된 것, 그로 인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폭이 더 많이 좁아진 현실과 일맥상통한다.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마음, 너른 폭을 뛰어넘어 저편에 있는 사람과 생각에 닿으려는 뜻과 노력 안에서 비로소 고전은 온전히 읽힐 수 있다.


<조선 문인의 일본 견문록>은 나에게 묵은 편견을 버리고 고전을 끌어안게끔 도와주는 책이 되어 주었다. 조선 선비 신유한이 300년 전에 쓴 <해유록>을 옮긴 글인데, 통신사로서 일본에 건너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외국의 풍광과 문물을 기록한 우리 고전은 여럿 있지만 <해유록>에 대해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미 일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나는 이 책에 충분한 흥미를 느낀 터였다. 이십 대 후반부터 약 팔 년 동안 일본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았던 개인적인 정황 때문이다. 신 선비와 내가 느낀 일본은 얼마나 다른 곳일까, 또 얼마나 닮아 있을까. 자못 궁금함과 아련한 향수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사실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의 덕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통해 신 선비와 나는 실로 엄청난 수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나는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의 풍경과 분위기와 사람들의 감정을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웅장하고 신비로운 풍모의 후지산에 대한 감상이라든가, 화려하고 복잡하고 다소 천박스러운 오사카의 거리 풍경,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음식 문화라든가, 남창과 같은 독특한 문화 유행에 대한 감상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적극적으로 동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고 살짝 머릿속으로 반론을 펼쳐보기도 했다. 신 선비의 생각이나 글은 대체로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했지만 조선 시대의 유학자답게 일본 문화에 대한 조선 문화의 우월의식을 뚜렷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뉘앙스의 구절이 나올 때마다 나는 살짝 심기가 불편해지곤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런 불편함조차 이 책과 내가 스스럼없이 소통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니 한편 흡족한 기분이 든다.


<해유록>은 어디까지나 기행문이다. 비단 나처럼 일본에서 몇 년을 생활해 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행자 신유한이 전달하고자 하는 견문을 충분히 읽어냈을 것이다. 그만큼 섬세하고 알기 쉽고 감정이 잘 드러난 기행문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이만큼 ‘남이 한 여행을 내가 한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글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력이 남다른 조선 선비 신유한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3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그의 글에서 오늘날 못지않은 감수성을 발견하고 길어 올린 기획자와 편역자의 안목과 능력도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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