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사랑
손석춘 지음 / 들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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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마르크스를 알게 된 일은 두말 할 것 없이 내 인생 최고의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를 사랑했으며 경외했고 탐독했다. 이제까지 받았던 교육이나 부모님의 양육이 아니라 마르크스에 의해서 이제 나는 진정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은, 솔직한 이야기, 술자리에서조차 마르크스를 화제로 올리는 일이 드물다. 나는 변질한 것인가. 때로는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사랑이 지적 허영이나 시대를 역행하는 가치 없는 고집이 아닌가에 대해 의심하느라 한없이 눈이 가늘어지기도 했다.

소련이 망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죄다 마르크스를 손가락질 하고 돌 던지고 상처입히는 것이 속상해서 가슴이 터지는 밤낮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속시원하게 한 번 마르크스를 변호하지 못하는 내 주변머리가 진절머리쳐지는 것이었다. 들끓는 애증이 서서히 자연소화되어 까맣고 딱딱한 응어리 하나가 데굴거리고 있었다.

그런 배경때문인지, 이 소설의 안팎으로 신경이 쩍쩍 달라붙으면서 이입되어 가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글을 쓴 손석춘님이 되었다가 작중의 한민주가 되었다가. 이성을 바짝 차리고 객관적인 총명함으로 글을 읽어내리는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간중간에 도저히 넘지 못할 세대차(200년이라는 세월이니 억지로 이해하려고 해도 안되는건 안되는거다)때문에 번쩍 정신이 들곤 했다.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마르크스와 예니의 귀족근성이라든지, 렌헨의, 노동자로써의 자각에도 불구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기질등이 작가의 너그러운 시각(?)에 동의하지 못할 몇가지 부분이긴 했다.

예를들어 마르크스가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예견하고 계획했던 것에는, 자기가 행한 가장 가까운 지배 피지배에 대한 무언가의 조처나 언급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런 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게 내가 이 소설에 바보같이 밀착해버린 것은, 마르크스가 유령의 모양새로라도 나타나서 해줬으면 하는 말들들 책 속에서 그대로 하고 있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함부로 단정지어 말하건대, 이 책은 마르크스와 렌헨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칭송된 마르크스가 인간적으로는 그렇구 그런 놈이었다는군 운운이 얼마나 치사하고 경망스러운 인신공격에 불과한지에 대해 조용히 꾸짖고 있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뒤에 숨은 질책, 마르크슨지 구정물인지 소련 망한거 보면 거 다 뽀롱난거 아니냐, 에 대한 완고한 그러나 눈물나게 열심스러운 대답이 이 책 안에는 있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일시 하는 오류는 반대에 있는 자들에겐 의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겐 자신의 무능과 자조에 의해 형성되어온 것이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마르크스의 유령을 만날 생각을. 21세기의 이 세계는 프롤레타리아조차 순수성을 잃고 자본의 넘실대는 향락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이 보이고, 대기권도 뚫고 나가는 자본주의의 기세와 콧대에 햇볕들 틈도 없는데, 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생각을 않고 지친 자기 등허리만 쓰다듬고 앉았던 것일까. 유령 마르크스는 일갈한다. 현재의 너희들은 왜 현실의 객관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를 만들어내지 않느냐고.

어쩌면 당연하고 쉬운 그 말이 명치를 찌르듯이 쑤시고 들어와 깊은 자국을 남기며 각인된다. 마르크스의 유령은 투명한 유령의 눈으로 가르친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눈이 탁해 보지 못하고 있는 새삼스러운 진리, 살아서 운동하는 것들은 모두 변한다는 역사의 철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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