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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사는 집 - 팬더추리걸작시리즈 7
존 딕슨 카 지음 / 해문출판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절판본이나 희귀본 구하는 데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아동용으로 읽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팬더추리걸작선 중 이 책이 집에 있길래. 아동용으로 읽어도, 딕슨 카의 원작이 얼마나 으스스할까는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동용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설핏 웃었다.
일단 삽화.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이런 책 마지막으로 본 지 족히 15년은 지났어! 하며 나이를 깨닫고 좌절하기도. <마녀가 사는 집>의 삽화는 예상외로 순정만화 풍이었는데, 물론 뒤로 가면 어설픈 괴기풍으로 바뀐다. 외국 동화 삽화들을 보면 인물 얼굴 클로즈업보다는 전체 분위기를 보여주는 게 많은데, 이 책의 삽화들은 어째 다 부담백배인 클로즈업이다. 그런데 그림이 참...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이렇게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좀 더 살릴 일이지. 하긴 애들 겁주자고 만드는 책이 아니니 원.
아동용 추리소설의 가장 큰 도전은 아마도 이야기를 축약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것은 추리소설에 국한되지 않는 도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읽는 책은 사실, 동화를 제외하면 모두 축약본 아니겠는가. 내가 최초로 축약본이 아닌 고전소설을 읽은 게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도스토예프스키였는데(대체 왜 그렇게 어려운 책이어야 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집에 없는 <백치>를 친구가 양장본 문학전집으로 가지고 있다는 데 질투를 느껴 빌려달라고 해서 읽은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그게 확실한 건 아니지만 여튼 그 전후로 내가 읽은 대다수의 책은 축약본이었다.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집에 있는 아빠 책들을 원본으로 읽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책의 내용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꽤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장 큰 예는 <제인에어>와 <오만과 편견>이었다. 아빠가 읽으라고 준 <폭풍의 언덕>은 너무 음습해서 중학교에 가서야 완독이 가능했고(그 책은 무섭지 않은가, 실로?), <제인에어>는 꽤 재미있게 읽었다. 낭만적이라서 그랬나. 여튼, 그랬는데 원래 책을 보니 어찌나 무서운지. 나중에 <광막한 바다, 사르가소>까지 읽고는 정말 공포에 질렸다. <오만과 편견>은 재밌대서 읽었다가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축약본은 아예 재미가 없었고(제인 오스틴의 문제를 죽이고 내용만 축약하는 건 의미가 없다), 원본도 재미가 없었다. <오만과 편견>을 재미있다고 생각한 건 대학교 때에 이르러서였다. <주홍글씨> <적과흑>도 청소년용 축약본으로 읽었는데, 다 끔찍하기만 하고 별로 재미가 없었다.
이른바 '고전'이라는 책일수록 축약본이 많은데, 문제는 문학성이 뛰어난 책들일수록 작가의 문체가 중요하다는 거다. <죄와 벌>도 축약본으로 읽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 원래 책을 읽었는데, 축약본을 안 읽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후회했다. 내용만 알고 있으면 정말 읽는 내내 조바심만 나고 작가의 글 자체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된다.
추리소설의 경우는 그와 약간 달랐다. 추리소설 중에 문체가 중요한 책이 많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수수께끼를 푸는 게 가장 기본이니, 어린 나이에 삽화가 가득한 책을 읽으면서 두근거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노란방의 비밀>은 아동용으로 몇번이나 읽었는데, 나중에 원본으로 읽으면서도 꽤나 좋아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애초에 집에 있던 아빠 책을 읽었는데, 세로쓰기에 한자는 또 어찌나 많은지 대체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추리소설이나 미스터리는 다 한자가 많았는데, 그래서 아동용밖에 읽을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때 주로 읽게 되었던 책은 트릭이 재미있는 것들이었고, 트릭이 온전하게 살아있는 한 축약본이건 아니건 별 관계는 없었다.
이번에 읽은 아동용 <마녀가 사는 집>은 그럭저럭 읽을만했다. 딕슨 카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다는 건 아쉬웠으나, 책 내용을 보니 -ㅅ- 원래 책으로 읽었어도 약간 유치했을런지도-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그래도 원래 책으로 읽을 수 있으면 좋겠군아. 이 촌스러움 따위는 금방 잊어줄텐데.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