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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동물원 ㅣ 민음의 시 132
이근화 지음 / 민음사 / 2006년 4월
평점 :
이근화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시를 좋아하는 후배를 통해서였다. 후배는 이근화의 시를 스크랩해서 보여주곤 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을 가진 시인이 내가 무척이나 그리워하던 어떤 것들을 시어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시는, '먼 나라에서 에리카가 편지를 쓸 때'와 '당신의 삶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에요' '칠레라는 이름의 긴 나라' 등이다. '유리문 안에서'도 꽤 오랜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읽은 기억이 난다.
위에 언급한 시들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사랑하는, 하지만 내 것은 아닌 많은 것들이 아지랭이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 현기증이 일었다. '먼 나라에서 에리카가 편지를 쓸 때'는 이렇게 시작한다. '너무 많은 질문들이 나를 그만 심심하고 지루하게 만들었너 날마다 다른 도시로 가서 빵과 맥주를 샀지 하루 종일 걷고 아침저녁으로 달렸어 귀찮고 나른한 여행이었어' 이근화의 시를 나누었던 후배는, 이 시에서 묻어나는 미지의 공기를 꽤나 동경했었다. 이상한 나라에서 온 깊고 푸른 글자들과 낯선 도시에서 구운 빵과 신맛의 맥주를. 해독할 수 없는 글지와 어려운 그림을 포함하여. 그 후배는 결국 서울을 떠나 낯선 도시의 이름모를 처마 밑에 둥지를 틀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후배는 "이근화 시집이 '드디어' 나왔어요. 알고 계셨어요? 저는 며칠 전에 친구가 공수해 준 시집을 게걸스럽게 읽었어요."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좋아하던 시들 말고도, 이근화의 시는 오랫동안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빵 굽는 냄새가 풍겨오는 듯하여 고개를 갸웃하고 시집을 들춘다. 내가 속하지 않았으나 언제까지나 그리워할 그 풍경에 대해, 혹은 내가 이미 알고 있고 속해있으나 알지 못했던 관점의 일상에 대해, 이근화는 속 깊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애틋하고 부드러운데도 만만하지 않은 시어들과 '조용하고 유니크한 생각'들. 무척 추천하고 싶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