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삶에는 이런 순간들이 있다. 아주 우연히 어떤 일인가가 때맞춰 일어나주는.

<도쿄기담집>은 "나, 무라카미는 이 글을 쓴 사람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이 무라카미 씨는 자신이 경험한 기이한 우연들을 이야기한다. 토미 플래너건의 라이브가 예상보다 별로라 실망하다가, 마음 속으로 흔하지 않은 곡 두 곡을 신청해 보는 상상을 하던 그는 놀랍게도, 플래너건이 실제로 그 두 곡을 연달아 연주하는 것을 듣는다. 입 한 번 열지 않았는데 마치 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플래너건은 두 곡을 연주한다. 세상에는 이런 우연이 있다. 생각보다는 꽤 많다, 신기하게도.

좋은 우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 년간 모은 적금을 타는 달, 우연히 부모님이 수술을 하게 되셔서 그 돈을 다 써버리는 일을 주변에서 종종 목격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적금액수와 너무 유사한 액수의 수술비용을 듣고 나면 다들 기운빠지는 얼굴이 되지만, 또한, 아, 이 돈이 아니었다면, 지금 탈 수 있는 이 돈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식은땀을 흘리게 되곤 한다.

첫사랑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생각하게 되는, 이삿짐을 정리하며 옛 물건을 꺼내 보는 일요일. "아, 얘는 어떻게 지내지"하고 궁금해했는데, 우연히 첫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일도 있다. 그리고 연락을 2년쯤 안 하던 사람 생각을 하는데 마침 전화가 걸려온다거나.

간절한 소망만이 가능케 하는 우주의 돌발적 운행이라고 할까.

<도쿄 기담집>을 읽으면서 내가 겪었던 많은 우연들,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 이루어졌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했던(그리고 때로 이루어졌던) 작은 소원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때로는, 오래 묵은 나의 죄의식이 어떤 사건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도쿄 기담집>의 마지막 단편처럼).

제목을 보고 무서운 옛날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하루키의 단편이라면 언제나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나에게 이 책은, 하루키의 단편을 처음 접했던 어느 무료한 오후를 연상시켰다. 이 책 속의 이야기들처럼, 이 이야기도 한 인간을 근본서부터 바꾸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이런 책이 있었지,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다시는 옛날과 똑같을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은 그런 작은 순간들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삶의 행로를 영원히 1도쯤 꺾어놓는 그런 순간들의 모음으로. 이 책 속의 이야기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