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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견문록 - 에디오피아에서 브라질까지 어느 커피광이 5대륙을 누비며 쓴 커피의 문화사
스튜어트 리 앨런 지음, 이창신 옮김 / 이마고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우선 녹색 원두를 식탁에서 굽는다. 여주인은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 원두를 식탁에 돌려,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이 커피향을 한껏 즐기도록 한다. 그런 다음 식전 기도 또는 친목을 다지는 축시 비슷한 것을 읊은 뒤에 돌로 된 분쇄기로 원두를 갈아 다시 끓인다. -16페이지
요즘 시간이 없어서(정말, 문자 그대로 시간이 전혀 없어서) 커피를 사 마시거나 회사에서 커피메이커에 내려 먹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뽑아 마시는 커피가 맛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시 내가 마실 커피는 내가 뽑아야 하는 것인가! 지금도 진하고 풍부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시고 있다.
<커피 견문록>은 모든 일을 다 하면서 직업이랄 것은 없고, 어디에서나 살아봤으면서 집이랄 곳은 없는 한 남자가 전세계 곳곳을 돌면서 마시고 맛본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제 겨우 1/4밖에 읽지 못했고, 아마 읽어가면서 이 포스트 내용도 계속 덧붙여갈 것 같다.
어쨌건, 요즘 집에서 마시는 커피에 돈을 좀 투자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행복한 나날이다. 하지만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워지기는 마찬가지. 이 책의 저자는 양키로서의 미국인이 아니지만, 워낙 빈국을 돌아다니면서 커피의 원초적이고 다양한 형태를 만나려다 보니 '저개발의 위험'과 '미지의 불안' '정치적 격동'을 뚫고 다니는데, 거칠거나 모나게 그들을 바라보지 않아도 좀 기분이 상할 때가 있다. "커피가 이곳을 지나가던 그 옛날 같았으면 두 아이는 노예로 팔려가면서 바람을 타고 연주되는 번쩍이는 보사노바를 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들은 난민이다. 과연 이들의 삶이 나아진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라는 말 같은 건 안 써도 좋았을 것이다.
초반에 저자 앨런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아주아주 짤막하게 서술한다(에세이 식의 인문교양서를 쓰는 남자로서는 대단히 모범적이고 양심적인 행동이다). 그러니까 이 남자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연애를 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어쩌다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의 욕구인) 사랑에 빠지고 말았고, 결혼을 하려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 그러나 불행하게 끝날 운명이었던 이 계획은 설명하기도 무척 복잡한 이유로 무너지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호스피스에서 일하게 되었다" 앨런이 커피의 나라들을 떠돌겠다는 야심으로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앨런은 어쩌다 보니 커피가 태어난 땅, 야생적인 커피 재배와 다양한 커피 음용의 방법이 있는 나라들에 있게 되었고, 그 자신이 커피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목숨을 걸고라도 커피를 마셔보려고 국경을 넘곤 했던 것이다.
마치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책이다. 저자는 어렵고 복잡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데는 관심이 별로 없다. 그냥 거기 갔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더라. 그래서 커피를 마시러 갔더니 이런 일이 생겼다- 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뿐이다.
랭보가 유럽에서 사라졌던, 그러니까 그의 바이오에 보면 '아프리카로 떠나 연락이 두절'되었던 시기의 행적에 대해서도 적혀있다. 그는 '기후가 실종된 땅'으로 가서 '무쇠 같은 팔다리, 청동빛 피부, 강렬한 눈빛'으로 돌아오겠다고 하고 에티오피아로 떠났고, 마침내 하레르의 매독에 걸려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진 뒤에야 프랑스로 돌아왔다. 앨런은 말한다. "그는 시도 쓰지 않고, 고독과 병마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불평을 편지에 가득 채웠다" 랭보가 쓴 시들이, 그 여리게 흔들리며 반짝이는 시어들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어쨌건.
재미있는 것은 "장터에서 커피콩을 볶지 말라"라는 유목민 오로모족 속담이 있다고 한다. 뜻은 '낯선 자에게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는 것인데, 영어의 'spill the beans'와 뜻이 같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속담이 넘어간 것일까. 콩 가지고 비밀 타령이라니, 재미있는 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