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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언젠가 이런 영화를 본 일이 있다. 아니, 영화'들'을 본 일이 있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남미의 공기는 뭔가 다른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도시에서 성범죄를 수사하는 경찰 카우카만의 이야기, 라고 줄거리가 적혀 있지만 책의 중심이 되는 범죄는 성범죄가 아니다. 아옌데, 나라를, 대통령궁을 수호하다 장렬히 죽음을 맞은 아옌데를 잊지 못하는 역사의식이 중심이다. <핫라인>은 100페이지 남짓 되는 아주 짧은 소설로, 내가 읽은 세풀베다의 소설 중 최고라고 꼽기는 약간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글쓰기는 살짝 자극적이다. 이를테면, 그의 문체는 내가 단 한번도 보지 못한 파타고니아라는 땅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세풀베다는 반복해서, 책을 거듭해 반복해 가면서 남미의, 특히 파타고니아의 풍경을, 그 사람들을 그린다. 민중의 삶에 볼을 부비는 그의 머릿속에는 당연하게도 늘 아옌데의 죽음을 둘러싼 시간이 되풀이된다.
파타고니아는 세풀베다에게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세계인 남극"이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쓰며 머물고 있는 스페인으로, 유럽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도인 산티아고를 방문하면 그는 과거의 유령에 사로잡힌다. "실종된 가족을 여전히 찾아다니는 사람들과, 종신상의원으로 둔갑한 옛 독재자의 아들을 기필코 피고석에 앉히겠다는 집념에 불타는 판사들"이 있는 땅. 이 소설은, 파타고니아에서 유능한 경찰이었던 주인공이 막강한 어느 장군의 아들이 가측을 도둑질하는 현장을 잡아 녀석의 엉덩이를 7할쯤 날려버리는데서 시작된다. 장군의 주장에 따라 주인공은 수도 산티아고의 사무직으로 '좌천'된다. 그는 택시 기사인 아니타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그를 이해한다. 그는 폰섹스 서비스인 핫라인에 전화를 걸어 이상한 소리(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의 비명)를 들려주는 기이한 스토커에 대한 수사를 하게 된다.
탐정소설에 해당하는, 흑색소설, 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남미는, 아무래도, 가기 전부터 사랑하게 될 것이 분명한 땅이란 말이다. 하지만 내가 과연 그 땅에 가게 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자신 없다.
이 책 최고의 구절은 유감스럽게도, 작가의 말 부분에 있다(세풀베다의 책에서 종종 마주치게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대중 연재소설이다. 대중 연재소설이 과거의 장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뒤마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잊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자"라는, 우리에게 남겨 준 도덕적 유물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성실한 자들을 결속시킬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