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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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글은 읽는 자를 염두에 두고 씌어진다. 심지어 일기조차 어느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편지만큼 적극적으로 독자를 글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가는 글은 없다. 답을 기대하고, 답할 여지를 남겨두며, 나아가서는 다툼, 사랑, 혹은 영원한 결별을 상대가 행동하게 만드는 글이니까. 답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서간체 소설이건 서간집이건 재미있는 점은, 그런 문답의 과정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나 각자가 처한 상황 등을 이유로 편지들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묻지 않았던 것에 대한 대답, 질문에 대한 회피,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
이주 신간 지면에 소개할 책들은 세권 다 서간문이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위험한 관계>의 냉소보다는 <키다리 아저씨>의 낭만을 닮은 서간체 소설이고, <공공의 적>은 부르주아 좌파 지식인과 냉소적인 우파 소설가, 자칭 ‘경멸을 받아 마땅한 자들’의 서신교환이다. 그리고 <경계에서 춤추다>.
<경계에서 춤추다>는 재일 조선인 2세로 고국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에세이로 잘 알려진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 서경식과 1993년 아카타가와상을 수상한 일본 소설가 타와다 요코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다. 재일 조선인 2세로 서울에 살고 있는 서경식과 일본인이지만 베를린에 살고 있는 타와다 요코는 집, 이름, 여행,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을 소재로 대화를 해 나간다. 초반에는 당연히 그런 정체성, 국적, 거주지가 관심사가 된다. 초반에는 무겁게 한 단어 한 단어 내딛지만, 여행과 빛, 순교 쪽으로, 그러니까 둘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편지들에서는 단순해보이지만 깊은 성찰이 돋보인다. 이름이 보통명사와 다른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를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설령 의미를 알고 있더라도 쓰면서 의미를 잊게 된다, 그게 좋은 것이다. 여행은 자신을 붙잡아두고 있는 일상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해방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이름을 말해야 하고, 신분증명을 요구당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행이라는 것 역시, 자신을 재정의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특유의 진지함 때문에 웃게 되는 대목도 있다. 타마(玉)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면서 상당히 진지한 (조심스레 살살 쓸어보아야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지할 수 있는) 말투로 “‘생명이 태어나는 곳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타마’에 해당되는 것은 한국어에서는 아무래도 ’알’이라는 말 쪽인 듯합니다. 이 말 앞에 ’불’이라는 말을 붙이면 고환을 뜻하게 됩니다. 불과 알이 붙어서 프랑스어처럼 연음되면서 ’부랄’이라고 발음합니다. 어쩐지 발음까지 그럴듯하지 않습니까?”라는 서경식의 말이라니. 부랄에서 프랑스어의 연음을 느끼다니.
타와다 요코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 작품이 소개된 적은 없다. 이 서간집을 읽으면서 그녀의 표현력에 감탄하다보면(특히 빛에 대한 편지!) 그녀의 소설도 곧 한국에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행운이 한국 독자들에게 따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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