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쿠치바 전설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1950년대, 일본 주고쿠 지방의 독토리 현 베니미도리 촌에 미래를 보는 한 소녀가 살고 있다. 만요는 산 속에 산다는 ‘변경 사람들’이 두고 간 계집아이. 변경 사람들의 특징인 검고 긴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다부진 체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만요를 거두어 키운 것은 젊은 부부. 부부는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자애롭게 만요를 키우지만 어쩐 일인지 만요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좀처럼 글을 익히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날, 제철업으로 거부가 되어 가장 높은 산 위에 단풍잎처럼 붉은 대저택을 짓고 살아가는 아카쿠치바 가문의 마님인 다쓰가 만요를 발견한다. 마님 다쓰는 어째서인지 어린 만요에게 이담에 크거든 자기네 집으로 시집오라고 한다.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보게 되는 만요는 아카쿠치바 집안에 시집을 가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미래를 환시하는 만요의 능력은 자신이 진통을 겪으며 낳는 아이의 미래까지 보아버리고 만다. 한참 뒤 있을 큰아들의 비극을 출산의 순간에 보아버린 만요는 이후 아이를 낳을때면 눈을 꼭 감고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그렇게 태어난 둘째는 백말띠의 계집아이인 게마리였다. 주고쿠 최고의 폭주족이 된 게마리는 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유명한 소녀만화가가 되어 큰 성공을 거두고, 게마리의 딸은….

사쿠라바 가즈키는 라이트노벨 작가다.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가사이 기요시에게 발탁되어, 유망한 신인들의 미스터리 작품을 주로 발간하는 일본 도쿄소겐샤의 미스터리 프론티어 시리즈를 통해 첫 책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발표했다. 사쿠라바 가즈키가 《고식(Gosick)》 《사탕과자 탄환은 꿰뚫 수 없어》로 이름을 얻은 뒤 고향인 돗토리 현에 틀어박혀 두 달만에 완성한 이야기가 바로 이 책 《아카쿠치바 전설》이다.

《아카쿠치바 전설》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나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을 연상시킨다. ‘제60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말에 낚여 읽기 시작했는데 미스터리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어처구니없게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미래를 보는) 만요가 등장해 구불구불 굽이친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준다. 만요-게마리-도코로 이어지는 여성 3대의 이야기는 마치 50여년간에 걸친 통속극을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도련님의 손을 탄 가정부가 옷을 홀딱 벗고 집안에서 스트리킹을 하고, 그렇게 태어난 혼외 자식은 이복 언니의 남자들을 골라 같이 자는게 유일한 목표이고, 폭주족 소녀는 손을 씻나 싶더니 폭주족 시절을 그린 만화로 성공해 죽는 날까지 만화만 그린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런 통속적 사건 사고들의 배경이자 원인이 되는 일본 사회의 격변기를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유류파동, 경제급성장과 환경오염, 소녀만화의 급성장, 양키문화, 일본 산업 구조의 변화, 버블경제와 버블 붕괴, 청년실업 같은 최근 50년간 일본의 상황이 고스란이 담겨 있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여성 삼대의 극적인 이야기와 세계사 시간에 도표를 그려 암기했음직한 사회의 변화상을 잘 엮어냈다는 점은, 《아카쿠치바 전설》이 장르적 매력을 떠나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굳건한 토대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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