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거리
아사노 이니오 지음, 이정헌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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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부르짖는 사회에서 소외된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이야기 <소라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사노 이니오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학교 밖의 삶에 대해, 비눗방울처럼 보기에만 예쁜 희망론을 거론하는 대신 수수하고 볼품없는 현실 그대로의 절망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라는 아사노 이니오 특유의 정서가, <빛의 거리>에도 녹아 있다.  <빛의 거리>는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개별 단편들을 관통하는 정서가 전체 이야기를 아우른다. 한 번 읽고, 다시 읽을 때면 한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다른 이야기에 슬그머니 등장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버스 정류장'은 학교를 다니는 대신 자살도우미로 살아가는 소년 타스쿠 이야기다. 볕 잘 들고 깨끗한, '빛의 거리'라고 불리는 인기 좋은 아파트단지에서 타스쿠는 다른 이들의 자살을 돕는다. 타스쿠의 친구 하루코는 중학교 때 집 근처에서 스토커의 칼에 난자당한 적이 있다. 하루코는 범인을 잡기 위해 '빛의 거리'를 뜨지 못한다. 이들의 동력은 진정한 의미의 꿈이 아니다. 꿈을 현실적인 목표로 바꿔놓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가 너무 금방 와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스쿠가 대신 죽여준 남자가 친구 하루코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건이 벌어진다. 게다가 전직 형사인 타스쿠의 아버지는 타스쿠의 일에 대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다.
극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정서는 한국 어디에서도 느낄 수 있는 절망이나 우울의 색채와 닮아 있다. 광고 속에 등장하는 것 같은 화목하고 행복하며 부유한 가족이 나의 가족과 닮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 대형서점 서가에 놓인 재테크 관련 책들을 활용하기엔 내 수입이 너무 보잘것없음을 깨달을 때. 어떻게도 되지 않는 "이곳에서의 삶"을, <빛의 거리>는 그럴듯한 말로 위로하는 대신 우두커니 응시할 따름이다. <빛의 거리>가 갖고 있는 상냥함은, 그 체념의 극단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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