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유사상고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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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쇼펜하우어의 '소품집'을 번역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으며 새해를 시작했다.

올해 끝 쇼펜하우어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이 책이 내게 끼친 영향이 어찌나 크고 깊은지 글 한 편으로 그 모든 생각과 감정과 복잡한 마음들을 담아내기가 무척 어렵다. 시간과 공간 바깥에 존재하는 의지, 의지의 현상으로서의 인간, 삶을 의욕하는 의지, 절대 지치지 않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과 같은 의지, 세계는 나의 표상, 의지는 표상의 세계를 통해 의지 자신이 삶을 의욕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의지는 지치지 않고 채찍질한다, 원하라, 계속해서 원하라, 욕망하라, 멈추지 말아라...


-236쪽,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력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언제나 의욕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게 하는 인간의 노력과 소망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이 달성되지마자 더 이상 최종 목표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그 때문에 곧 잊히고 폐기되며, 공공연한 것은 아니라 해도 언제나 사라진 착각으로서 무시되고 말 것이다. 소망에서 충족으로, 이 충족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끊임없이 옮겨 가는 유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생명을 굳어지게 하는 끔찍한 권태이자 특정한 대상이 없는 김빠진 동경으로서, 숨 막히게 하는 우울로서 나타나는 정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아직 무언가 소망하고 노력할 것이 남아 있을 때가 그래도 제일 행복한 법이다. 이때 소망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행복이라 불리고,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은 고통이라 불린다. 이 모든 사실에 따르면, 의지는 인식의 빛으로 조명되는 경우 자신이 지금 여기서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늘 알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즉, 모든 개별적인 행위에는 목적이 있지만, 전체 의욕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모든 개별적인 자연 현상이 이때 이곳에 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원인에 의해 규정할 수 있지만, 이 현상 속에 나타나는 힘은 일반적으로 원인을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자연 현상이 사물 자체, 즉 근거가 없는 의지의 현상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서 의지의 이 유일한 자기 인식은 전체로서 표상이며, 직관적 세계 전체다. 이 세계는 의지의 객관성이자 의지의 드러냄이며 의지의 거울이다.


-384쪽, 순수하게 그 자체로 고찰하면 의지는 인식이 없으며, 맹목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충동이 우리 자신의 삶의 식물적인 부분에서뿐 아니라 무기적이고 식물적인 자연이나 그 법칙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의지는 자신에 도움이 될 만큼 발전된 표상의 세계가 추가됨으로써 자신의 의욕에 관한 인식과 자신이 의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얻는다. 다시 말해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이 세계, 즉 있는 그대로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얻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현상하는 세계를 의지의 거울, 의지의 객관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삶이란 표상에 대해 의지의 의욕이 나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다.


-388쪽, 우리는 무엇보다 의지의 현상 형식, 즉 삶의 형식이나 실재성의 형식이 미래도 과거도 아닌 현재뿐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미래나 과거는 개념 속에 존재할 뿐이며, 이것들이 근거율에 따르는 한 인식과 관련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 속에 살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미래 속에 살지 않을 것이다. 현재만이 모든 삶의 형식이고, 결코 삶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삶의 확실한 소유물이다. 현재는 항상 그 내용과 함께 현존한다. 현재와 그 내용은 폭포수 위의 무지개처럼 확고해서 흔들림이 없다. 의지에게는 삶이, 삶에게는 현재가 확실하고 틀림없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바라보는 이 세계의 본질은 의지-멈추지 않는 의욕이다. 그리고 의욕은 고통을 기초로 한다. 춥거나 덥지 않게 살고 싶어 집을 원한다. 성적 충동이 우리를 채찍질해 짝을 찾는다.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성공을 추구한다. 의욕이 쉽게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또 의욕이 너무 빨리 충족되면 무료해진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구성요소다.(426쪽)' 욕망은 끝을 모른다. 삶은 고통이다. 나라는 인간은 불변의 의지가 잠깐 꾸는 꿈에 불과하다.


-438쪽,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을 외부에서 보면 얼마나 무의미하고 보잘것없게 흘러가는지, 안에서 갖는 느낌으로도 얼마나 막연하고 정신없이 흘러가는지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들의 삶은 빛바랜 동경이자 괴로움이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생각을 품고 인생의 사계를 거치며 죽음을 향해 꿈결처럼 허우적거리며 걸어간다. 이들은 태엽이 감기고는 왜 그런지 알지도 못하고 가는 시계의 태엽 장치와 같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기는 것인데, 이는 이미 수없이 연주된 손풍금 곡을 악절마다 소절마다 보잘것없게 변주하여 거듭 되풀이하기 위함이다.

모든 개인, 인간의 모든 얼굴과 그 인생행로는 자연의 무한한 영, 즉 삶에의 불변하는 의지의 짧은 꿈에 지나지 않고, 자연의 영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무한한 백지에 재미로 그려 보는 덧없는 형상에 불과하다.


한 해의 끝을 마무리하는 글로 지나치게 우울하지 않은가? 정작 쇼펜하우어를 읽는 내내 크게 슬프지 않았다. 의지라는 개념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내겐 하나의 구원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무얼 원하는지도 모른 채 원하는 고통에서 나를 충동하는 근원을 깨닫는 것. 지치지 않고 산 위에 바위를 올려야만 하는 인간의 고통은 삶이 고통이라는 인식 자체부터 시작이다. 생각 없이 살 때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세계의 베일 너머 '의지'를 인식하기, 예술 작품을 통해 순수한 의지를 인식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거나 종교의 성인들과 같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꿰뚫고 의욕하는 것을 멈추기, 구원은 이미 존재한다. 우리의 선택이 중요할 뿐.


내년은 쇼펜하우어가 보여 준 의지로서의 세계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해가 될 것 같다.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감히 말하진 않겠다. 애초에 나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읽지 않는다. 철학'하기'를 위해 도전한다. 덧없는 삶의 고통 속에서 잠시나마 고통을 잊기 위하여.


-518쪽, 그 자신의 본성과 수많은 쓰라린 투쟁을 거친 뒤 결국 완전히 극복하는 인간은 순수하게 인식하는 존재로서만, 세계를 맑게 비추는 거울로서만 남아 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에도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고 계속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하면서 욕망, 두려움, 질투, 분노로서 이리저리 휩쓸리게 하는 의욕의 온갖 수천 가지 실마리를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조용히 미소를 띠고, 한때 그의 마음까지 동요시켜 괴롭혔지만 이제는 승부가 끝난 뒤의 장기의 말처럼, 또는 축제의 밤에 우리를 놀리고 불안하게 한 가장 무도회의 복장이 아침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는 것처럼, 그의 앞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의 환영을 되돌아본다. 삶과 그 모습은 덧없는 현상처럼, 이미 꿈에 현실의 햇살이 새어 들어와 더는 그를 속일 수 없는, 반쯤 깨어난 사람의 가벼운 아침 꿈처럼 그의 눈앞에 어른거릴 뿐이다. 또 이 꿈과 마찬가지로 삶의 모습도 급기야는 무리한 변천을 거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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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 서한집 상응 5
프리드리히 횔덜린 지음, 장영태 옮김 / 읻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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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것은 순수하지 않은 것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네.

횔덜린 서한집, 287쪽


편지를 거의 쓰지 않는 시대, 과거에 쓰인 편지를 모은 서한집을 읽는 이유는, 먼 미래 sns를 거의 하지 않을지 모를 시대, 과거에 업로드된 sns의 글과 사진을 읽는 후손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지, 그러니까 호기심. 직접 만날 수 없는 과거의 인물로부터 생생한 목소리를 최대한 가깝게 듣고 싶다는 호기심으로부터.


생전에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사후 독일의 대표 시인으로 재발견된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서한집을 읽었다. 이름만 겨우 알고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빵과 포도주)정도의 인용문만 들어본 시인의 편지들은, 살아 있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어머니와 동생에게, 헤겔과 노이퍼 같은 절친에게, 실러 등 존경하는 이에게 보낸,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 속 횔덜린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열렬하며, 애정이 가득하고, 때로 불안하고, 이따금씩 고독했다. 시인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고뇌하고, 자신의 작품이 크게 인정받지 못해 우울해 하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면서 동시에 실망하는 그의 목소리들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쁨 없이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우리 가운데 옳게 피어날 수 없지. 거대한 고통과 거대한 기쁨이 인간을 가장 훌륭하게 기르는 법이라네.

횔덜린 서한집, 206쪽


불운한 시인은 결국 정신착란을 일으켜 반평생 유폐되다시피 살아야 했다. 서한집 부록으로 짧게 실린 정신착란 시기의 편지들은 급격히 짧아지며 위태로운 그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언제나 고통받는 것은 시인인가? 인간을 사랑한 시인의 예민한 영혼은 삶과 세계의 부조리 속에서 고통받았을 것이다. 응답받지 못한 사랑, 인정받지 못한 문학, 이루어지지 않는 사상, 큰 고통 속에서 기쁨처럼 태어난 아름다운 시와 소설, 편지들, 횔덜린이라는 존재 그 자체. 순수한 시인의 목소리는 엉망진창인 이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그의 시와 편지를 통해 영원한 청춘의 목소리를 엿듣는다.


내가 언젠가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한 소년이 되면, 봄과 아침과 황혼은 매일같이 나를 조금씩 회춘케 해서 마침내 내가 최후를 느끼고 야외로 나가 앉아 거기로부터-영원한 청춘을 향해서 길을 떠날 것이다!

횔덜린 서한집,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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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원 - 시리 허스트베트 에세이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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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이른바 '어머니'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들을 떠올릴 때마다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전형이나 클리셰도 아니고, 남녀의 위계질서에 갇힌 사람도 아니고, 위대한 어머니나 동정녀 마리아나 대자연이나 육아 잡지에 실리는 부드러운 광고에 등장하는 어머니상의 컬트도 아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관념들은 선악의 대비가 노골적인 엄격한 도덕주의로 어머니 노릇을 침범한다.

시리 허스트베트, 어머니의 기원, 뮤진트리, 40쪽


시리 허스트베트 개인의 어머니로 시작되는 에세이는 세계 전체의 '어머니'라는 관념-버지니아 울프가 '집안의 천사'라 정의한 가부장적 세계 속 어머니라는 개념-을 고찰하며 뻗어나가는 지적 여정을 거침없이 수행한다. 이 묵직한 에세이는 작가의 어머니로 시작해 여성혐오를 고찰하는 연구로 확장되며 한없이 깊어진다. 작가 본인이 겪은 여성혐오 사례들, '뇌 문신'이라 이름붙인 수많은 사례를 열거하며 여성혐오의 시작을 고대 그리스부터 추적해 현대 과학 연구까지 침범한 고정관념을 발견하고 타파한다.


시리 허스트베트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줄리엔 반 룬의 [생각하는 여자]라는 책에서였다. 철학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 사상가들을 찾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책으로 책 자체도 인상깊었고 책에서 소개된 이름을 전부 적어두었다. 시리 허스트베트의 데뷔작을 찾아 읽었고 작가 폴 오스터와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아내, 무의식적인 여성혐오적 사고방식, 에세이에서 허스트베트는 자신의 작품을 남편이 썼다고 굳게 믿는 기자와 독자들을 만났던 경험을 언급한다. 에세이에 실린 문학-과학-철학-사회학-기타 수많은 학문의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유하는 그의 글을 읽으면 빛나는 지성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내 안에도 자리한 여성혐오적 사고방식을 발견하는 건 고통스럽다. 이 에세이는 불편하다. 그렇기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훌륭할 리 없다는 선입견의 안경을 쓴 이들이 '감히 글을 쓰지 말고 아이를 낳고 키워라!' 외치며 분노하며 날뛰게 내버려 두고, 그는 유유히 자신의 글을 쓴다. 이제 반대로 정의한다. 폴 오스터가 시리 허스트베트의 남편이라니, 얼마나 좋을까!


-185쪽, 그리고 결단코 말하지만, 문학이 늘 편안한 여흥에 머물지는 않는다. 편안한 여흥일 때는 문학이 당신의 미래를 바꿀 수 없다. 개념적 틀과 반복되는 삶의 학습된 패턴에 갇힌 당신을 끌어낼 수도 없다. 편안한 여흥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나는 193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들에 약하고, 그런 영화들은 걸출하지 않더라도 내 허기를 충분히 채워준다. 문학이 대구 간 기름처럼 매일 아침 건강을 위해 삼켜야 하는 영양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오트밀에 잘못 부은 오렌지 주스와는 상당히 비슷할 수 있다.이게 대체 뭐지? 뭔가 잘못됐어. 내 예상과 전혀 다르잖아. 가끔 우리는 위대한 문학이 방향의 재설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반감을 느낀다. 그런 책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방어기제를 내려놓아라. 심호흡하라. 예술은 섹스와 같다. 긴장을 풀지 않으면 즐길 수 없다.


-413쪽, 여자는 꼭 어머니가 되지 않더라도 처벌대상이 된다. 오히려 '자식이 없다'는 말은 이기적이다'와 동의어가 된다. 모든 여자는 부조리한 문화적 절대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에 따르면 여자인 나는, 오로지 당신, 영원한 남자-아이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아이를 달래주고, 진정시키고, 먹여주고, 품어주고, 우러러보고, 열렬히 사랑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충분히 만족할 만큼 내가 이 역할을 이행하지 않으면, 나는 버르장머리 없고 사악하고 매정한 나쁜 년, 즉 마녀가 된다. 내 앞에 쏟아지는 욕설과 주먹다짐과 발길질은 다 내가 자초한, 말하자면 당해 마땅한 처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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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
요나스 메카스 지음, 금정연 옮김 / 시간의흐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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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타자기. 종이를 보면 나는 글을 쓸 생각부터 하고, 타자기를 보면, 완전 미쳐버린다. 글쓰기는 다른 무엇과도 별 관계가 없다. 종이와 타자기가 전부다. 그래요, 데리다 선생님. 여기, 아마도 제가 궁극의 해체주의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도요. 실로 의미 있는 어떤 것도 없다. 단어들, 단지 단어들. 혹은, 좀 더 정확하게는, 문자들. 당신은 그냥 앉아서 타자기를 두드린다. 그게 전부다. 문자에 이어지는 문자, 단어에 이어지는 단어. 어떤 단어일 수도 있고, 다른 단어일 수도 있다-별 차이는 없다. 그저 타이핑일 뿐. 문학은, 친구여, 저기 바깥의, 현실 세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네, 현실 세계 같은 게 있다면 말이지만.


요나스 메카스, 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 시간의흐름


지난 가을, 책과 노트를 챙겨 자전거를 타고 야외 좌석이 있는 카페로 달려갔다. 집에서 자전거로 십 분 거리에 있는 카페는 유치원이 바로 앞에 있어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소리지르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잘 들린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하게 된다. 지금처럼, 무엇이든 쓰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쓰는 것보다 낫다고 긍정하는 긍정법.


글쓰기는 종이와 펜만 있어도 된다. 노트북이 서운해 할 수 있으니 슬쩍 껴 준다. 이 글의 초고는 노트에 썼다. 이렇게 한 글자씩 이어가며 썼다. 이 글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틈도 주지 않고 썼다. 그게 전부다....방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기도 소리 같은데 뭔가 비밀스러운 종교의 배 안쪽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아-소리 같은 이 소리는 뭐지? 


고개를 들어 보니 카페가 위치한 건물 3층에 스피치 교습소가 있었다. 평일 오전에 스피치를 연습하러 학원에 와서 발성 연습을 하는 사람들의 긍정성에 대하여 쓰기...지금 11시가 넘었으니 점심 시간에 틈을 내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달려온 갓생 직장인일수도 있다. 과연 우리는 어른이 된 뒤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점심시간이 되었고 곧 이 글을 마무리한 뒤 가장 좋아하는 김밥집에서 김밥을 포장해 근처 공원으로 갈 것이다. 무엇이든 썼다. 이것도 문학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문학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뭘 썼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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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 텍스투라
앙토냉 아르토 지음, 이진이 옮김 / 읻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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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깜짝 놀라게 만드는 책이다. 자살'시키다'가 성립 가능한 표현인가? 서문은 더 놀랍다. '우리는 반 고흐의 정신적 건강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제 손 한쪽을 지졌을 뿐이고, 그것 말고는 딱 한 번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을 따음이다.(37쪽)' 반 고흐는 천재일 뿐, 미친 것이 아니라고, 미친 건 그가 미쳤다고 이름붙인 이 세상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앙토냉 아르토의 목소리는 끝까지 단호하다. 단호한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세상을 베어 낸다.

-42쪽, 그런데 진정한 광인이란 무엇일까요?

진정한 광인이란 인간의 영예라는 지고의 개념을 더럽힐 바에야 기꺼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 미치광이가 되는 편을 택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엄청난 더러움을 저지르는 데 사회와 공범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회는 떼어내고 물리치고 싶었던 모든 이들을 정신병원 안에서 목 졸랐던 것입니다.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앙토냉 아르토

광기의 재해석 과정을 통해 작가는 반 고흐의 그림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다. 그가 그린 그림의 순수함,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 밀짚모자에 초를 끼워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냈던 천재의 집중력...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알면서 그가 미쳤기에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반 고흐 생전에 그의 그림이 세상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도 우리는 안다.

반 고흐의 그림은 붓으로 세상을 때리고, 그림을 보는 사람을 때린다. 격한 타격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그런데, 반 고흐는 그의 결정적 타격으로, 그야말로 둔기의 타격으로 자연과 사물의 모든 형태를 쉼 없이 두드린다.(47쪽)'그런 그를 말하는 앙토냉 아르토의 글 역시 읽는 사람을 때린다. 짧은 책 속에서 터져나오는 감정들이 어찌나 강렬한지 책을 읽고 난 뒤 피곤을 느낄 정도였다.

-79쪽, 여기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결코 여기 이 지상을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우리 모두가 으레 일하고,

싸우고,

두려움에, 배고픔에, 비참함에, 미움에, 추문에, 역겨움에 울부짖었던 것은,

단지 여기 이 세상의 마력에 흘린 것임에도,

우리 모두가 그 독성에 잠식되어 버린 것은,

그리고 결국 우리가 자살당하게 된 것은,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모두 바로 이 가엾은 반 고흐처럼, 사회에 의해 자살당한 자들이지 않은가!

그림을 그리면서 삶과 싸운 천재, 그림 그 자체만 가지고 싸운 진정한 화가, 삶에서 신화를 끌어낸 진정한 천재 화가, 그가 가진 파괴력이 두려워 사회가 침묵시킨 자 반 고흐.

그리고 그런 반 고흐를 이야기하는 파격적인 아르토의 글은 독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칼날처럼 휘두르는 그의 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다. 칼로 다가가 내 피를 내어주거나, 칼을 피해 멀찍이 도망치거나. 다만 도망친 자에게 남은 선택지는 자살당하는 것, 우리 모두 살가죽 아래 숨어 있는 생의 끓어오름을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다 죽임당할 것인가?

고흐의 그림을 보며 생이 폭발하는 것이 느껴진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삶의 기회가 남아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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