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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 1
시바 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달궁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시바료타로의 역사소설은 익히 유명한터라 기회가 되면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책 중에서 ‘항우와 유방’은 내가 읽은 유일한 시리즈인데, 아마도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던 것 같다. 이번에 새삼 다시 읽게 된 데는 얼마 전 박웅현 씨가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추천한 영향이 컸다. 기억에는 이 책이 ‘소설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고 평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밖에 없는데 과연 어떻길래 그렇게 평가했는지 궁금해서 다시 읽게 되었다. 초한지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어 재미는 당연히 보장되었고,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니 정말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일단 저자는 중국사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현지답사와 문헌 조사 등을 곁들여 방대한 지식을 뽐내고 있었다.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이 시대가 가지는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정말 ‘소설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듯이 조감도로 보는 것도 재미가 있지만 그로 인한 단점도 있다. 바로 각 인물들의 성격과 특성을 잘 묘사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중심인물인 유방과 항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성격분석을 통해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조하고 있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너무 빈약하다. 이 시대 인물들은 계포일락의 계포, 비단장수 관영, 등공 하후영 등 재미있는 인물들이 너무도 많은데 단 몇 줄로 처리되어 너무도 아쉬웠다.
전개도 산만한 편이라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때문에 사건의 전후관계를 알기 힘들고, 사건 간의 순서도 파악하기 어렵다. 한 인물을 이야기하다가 그 인물의 말로를 미리 말해버리기도 하고, 생각나는 대로 흘러가는 듯한 투박함이 있다. 또, 일본 역사소설을 보면 연극을 하는 듯 과장된 몸짓을 드러내는 캐릭터가 꼭 등장하는데 여기도 그렇다. 예컨대, 작가가 재창조한 ‘기신’ 같은 인물의 성격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어떤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에게 매료된 평범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고 그 것을 미화하는 일본식 ‘가미카제’의 전형을 ‘기신’을 통해 만들어내는 느낌이랄까. 어떤 사고의 틀에 맞춰 인물을 생산해내는 것 같다. 이것도 ‘개별화’에 실패하고 ‘총론’에서만 서술한 데서 오는 단점일까.
p.118(3권)
항우가 보기에, 유방은 음식물에 특히 집착이 심했다. 오창이라는 진 제국의 유산인 거대한 곡물창 때문에 황하 남쪽에 위치한 영양성과 성고성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유방의 대가리는 나와 싸우는 것보다는 병사들 먹여살리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건 무인이 아니라 도적의 우두머리나 하는 일이라고 항우는 생각했다. 유방도 한군도 그의 눈에는 파리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예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특징이지만, 시바료타로의 역사인식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나는 항우가 실패하고 유방이 성공한 것은 항우의 포악성과 협량함에 비해 유방은 포용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전혀 다른 곳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바로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 즉 ‘인민을 먹여 살리는 능력’이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었다는 것이다. 유방이 영양과 성고를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것도 바로 곡창을 끼고 있는 이점, 병사를 먹여 살리는 것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인데, 항우는 보급의 중요성을 너무 간과했다. 제대로 된 보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 약탈에 치중했고, 그로 인해 민심을 크게 잃었다. 항우의 실패는 ‘밥’의 문제를 간과한 데서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분석이다. 역시 일상과 평범한 생활을 무시하면 성공할 수 없다. ‘밥’이 곧 ‘법’인데, ‘밥’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법’만을 앞세워 통치하려고 하면 결국 실패한다.
p.304(3권)
중국 정치의 1차적인 목적은 인민을 먹여 살리는 데에 있다. 왕조가 멸망할 때 유민이 대거 발생하고, 그 동란 속에서 유민을 먹여 살리는 수령이 나타나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만든다. 다시 말해, 먹여 살릴 능력을 잃어버린 왕조에 대해서는 천명을 바꾸어버린다(革命). 그리고 다른 능력자에게 천명을 내리는 것이다. 영웅이라면 실제로 먹여 살리지는 못하더라도 먹여 살리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세에서 중국사는 수많은 정치철학과 정책론을 만들어 왔다. (시바료타로)
오늘날 지배층들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우리는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는 이미 나라가 아니고,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억압하는 회사는 이미 회사가 아니다. 유방은 따르는 이들을 배부르게 하고, 부하의 역량과 창의를 최대한 발휘하게 하여 성공하였다. 우리는 수많은 이름 모를 어르신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이만큼 성장하였다. 그분들의 삶이야 구구절절하고 존경심이 들지만, 후인들에게 다시 그러한 삶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암울한 시대에 초한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만으로 공동체를 이끌어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