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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렸을 때
아버지가 몹시 미웠던 적이 있다. 나와 연결된 한 가족이라는 사실마저 거부하고 싶어서 ‘앞으로 평생 아빠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됐지만, 아직도 직장에서
비슷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불의하다고 느껴지는 상사와 접촉을 끊을 수 없을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들과 나를 분리할 수 없을지와 같은. 영혜를
보고 나니 이런 경험들이 떠올랐다.
영혜는 어느
날 ‘꿈’ 때문에 육식을 거부한다. 꿈은 어렸을 때의 기억에 연결되어 있다.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심하게 학대 받은 뒤 고깃국이 된 개, 음식이 되어버린 강아지에 대한 애증과 충격, 그 고기를 아무렇지 않게 먹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 죄책감은
불현듯 육식에 대한 거부로 표현된다. 영혜에게 육식의 거부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앗아야
하는 폭력성에 대한 배척이며, 이미 일상화된 폭력을 철저하게 밀어내는 행위이다. 결국 영혜의 결벽에 가까운 순수성의 추구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남편과 가족들은
아무도 그것이 어떤 ‘꿈’인지 묻지 않는다. 영혜는 점점 ‘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야위어 가지만 남편은 그녀의 잠자리 거부에 불편을 느낄 뿐이다. 더 나아가 아버지는
영혜의 입을 억지로 벌려 고기를 먹이려고 까지 한다. 어쩌면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적인 폭력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아픔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 ‘소리 없는 폭력’이다. 이 일상적인 ‘폭력’ 속에서 영혜는 그저 미친 사람일 뿐이다.
가족을 벗어나도 세상은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어제, 오늘 닭과 오리를 2,500만 마리나 살처분했다는 뉴스가 담담하게
보도된다. 2,500만이나 되는 생명에게 ‘죽음’을 ‘처분’했다는 기괴한
단어의 조합 속에서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다. 채널을 돌리면 고기를 몇 인분 씩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사람들이 나온다. 다시 채널을 돌려봐도 사적인 친분을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모욕 주고 괴롭히는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하다. 폭력에
대한 감각이 둔감해진 것은 아닐까. 작가는 폭력과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예술조차도 욕망으로 가득차있음을
영혜의 형부를 통해 고발한다.
악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폭력도 가까운 곳에 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악은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벌이는 일들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 영혜처럼
‘나무’가 되기를 바라며 모두가 순수함을 극단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제대로 살아본 적’이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오늘도 우리의 무심 속에 지구는 멍들고, 생명은
병들며, 사회는 썩어간다. 그 노력은 가족과 끼니의 식탁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