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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정유정 작가가 착해졌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넘쳐흐르는 피와 날이 선 쇳덩이들만 없을 뿐 여전히 박진감 넘치고 스릴이 가득했다. 그의 글들은 영화와 어울린다. 장면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금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했다. 분명 정유정은 우리 문학에서 대체할 수 없는 본인만의 영역을 확실히 구축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리고 이 번에도 그 위상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다 읽고 나니 왜 이 책의 결말을 ‘아름답다’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다. 작가는 우리를 때때로 미소 짓게 하고, 간간이 울컥 이게 했다. 결국, 진심이 담긴 우정은 종간의 경계도 허물어내는 것 같다. 그리고 수많은 ‘예수이야기’의 변형이지만, 진정한 사랑은 본인의 삶을 내어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삶과 죽음이 절대 동떨어져있지 않음을 이해한 사람들만이 가능하고, 진심을 다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성서의 거룩함 때문에 도저히 체감할 수 없었던 감동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책을 덮고난 이후에도 가슴이 뭉클하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날 이곳을 나서며 무엇을 꿈꾸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다. 꿈을 꾸기엔 미래에 대한 욕망이 너무 약했고, 꿈 없이 살 만큼 삶에 대한 욕망이 강하지도 않았다. - P47
내 재촉이 치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떤 이유가 있어야 협력한다. 애정, 욕망, 자기만족, 생존, 그 밖에 다른 무엇이든 간에. 그렇지 않은 존재를 세상은 ‘호구’라고 부른다. 내게도 그녀와 한 팀이 될 이유가 필요했다. - P164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 P367
타인의 기쁨에 기뻐하고, 타인의 아픔에 아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이끄는 최고의 지도자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P369
트라우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무기가 되어 인간을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로 인해 ‘여기가 나의 한계다’라는 인식의 마지노선이 무너지면서 바로 그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으려는 불굴의 투쟁이 시작될 수도 있다. 트라우마 이후에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버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트라우마를 통해 삶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사람들도 많다. 바로 이 ‘트라우마 이후의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 진이와 민주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준다. 트라우마는 자칫하면 인간의 인생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트라우마를 이겨내려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이 트라우마보다 훨씬 크고 깊은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 P376
지니의 삶을 훔쳐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이는 그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인간 아닌 모든 생물들의 삶을 착취하면서도 제대로 된 반성도 성찰도 하지 않았던 호모사피엔스 모두의 죄책감을 한꺼번에 등에 짐 진 자처럼. 진이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보노보 지니의 삶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간다. - P379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중차대한 시점에서 엉뚱한 길에 홀리고, 홀린 김에 기수를 아예 돌려버리기도 한다. 의외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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