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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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작가님의 작품은 이전에 읽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이 작가님이 쓴 다른 소설을 또 읽을 수 있다니, 이런 행운이 다 있나! 싶어서 말이다.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이다. 총 10개의 단편이 실린 이 소설집, #노랜드 는 하니포터 3기로 활동 중에 받은 책이다. 작가님의 다른 소설을 읽어본 적 없었으니, 당연히 어떤 스타일의 작품을 쓰는 줄 완전히 모른 채였고, 그래서 SF 소설인 것을 알게 되어 무척 놀랍고 신선했다. 외계인의 침공, 혹은 아둔한 인류의 잘못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흰 밤과 푸른 달>, <바키타>, <푸른 점> 그리고 복제인간, 다중인격, 좀비 등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주제로 한 <옥수수밭과 형>, <제, 재>, <이름 없는 몸>,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에게>, <우주를 날아가는 새>, <두 세계>,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열 편의 작품들이 모두 흥미로웠고, 독특했으며, 그러면서도 보편적 인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날카롭게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어떤 헤어짐은, 한 시절이 끝나고 그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일임을 이야기하는듯했던 세 작품, <흰 밤과 푸른 달>, 그리고 <바키타>, <푸른 점>의 결말들을 읽으며 가슴 한켠이 뻐근해졌다. 결국 떠나보내야 하는, 결국 떠나야 하는, 남겨진 자들의 안녕을, 떠나는 자의 성취를 서로 바라는 애틋한 마음들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옥수수밭과 형>을 읽으면서는 중학생 때부터 아주 좋아했던 만화책, 이츠키 나츠미의 <OZ>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 만화책에 끝도 없이 복제되는 복제 인간이 나왔고, 마지막 장면의 너른 보리밭이 이 소설의 옥수수밭의 풍경으로 겹쳐졌다. 이 소설은 SF 소설이 아닌가 보다, 싶었으나 중반부부터 갑자기 분위기가 급반전되는 <이름 없는 몸>은 그 구성이 무척 재미있었다.

열 개의 작품 중 가장 마음을 뻐근하게 만들었던, 그래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에게>였다. 고작 다섯 페이지짜리 짧은 소설이지만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떠나간 누군가의 '성불'을 바라는 마음. 미처 누리지 못한 남은 삶의 행복과 영광이 다음 생에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 '추모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죽은 자를 잊지 않고 추모하는 사람들 덕에 귀신이 이름을 되찾는 경우가 종종 있지. 그러니 이미 이승을 떠난 너는 이 강을 건너 환생의 문을 넘기 전까지 네 인생의 억울함에 목매지 말고 행복했던 순간만을 떠올려라. 그게 저들이 너에게 바라는 가장 간절한 바람일 테니. 네 몫의 서글픔은 저들이 다 해줄 것이니. 다음 생에는 네 이름을 절대 잊지 말거라." 이 말을 읽으며 슬쩍 눈물을 훔쳤다. 저승사자가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황망하게 숨을 거두어야 했을 수많은 죽음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그렇게 떠난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성불'할 수 있다면, 더 많이, 더 크게. 불러주고 싶어졌다.

천선란 작가님의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열 편의 작품들 끝에,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떠나보낼 예정인 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지속한 나머지 그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살던 시절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p.417)'는 말이 눈에 밟힌다. 작가님의 작품을 읽고 위로받는 사람이 있음에, 작가님의 마음 역시 위로받으실 수 있기를 바라본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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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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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업자, 소설가, 변호사, 건축가, 비행기 기장, 엄마와 아들과 비밀을 간직한 딸... 여러 명의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두서없이 이어진다. 각각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딱 하나, 모든 인물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 3월 초,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가던 길, 비행기에서 끔찍한 난기류를 만난 경험이 있다는 점. 그리고 3개월 뒤, FBI가 주인공들을 찾아간다는 점. 1부의 마지막, 머릿속에 찍히던 점들이 하나로 이어진다. 난기류가 마치 복사기라도 되는 걸까. 3개월 전 난기류를 뚫고 도착한 비행기가, 다시 등장한다. 3개월이 지났지만, 지금 막 난기류를 빠져나온 비행기 안은 3개월 전의 시간 그대로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버렸고, 이로 인해 정부, 과학계, 종교계의 사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한다. 갑자기 두 명이 되어버린 243명의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떠한 이유로 나도 모르게 나와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면,이라는 가설은 그다지 기발한 상상력은 아니다. 하지만 에르베 르 텔리에 작가가 이 가설이 현실이 되었을 때, 어떠한 식으로 세상을, 나를, 원인을 알 수 없이 뒤늦게 복사되어버린 너를 '납득'시키고, '인정'할 것인가를 풀어내는 방식이 아주 흥미로웠다. 과학자들이 과학자의 방식으로, 정치가들이 정치가의 방식으로, 종교인들이 종교인의 방식으로 현상을 들여다보는 방식은 매우 철학적인 한편 해학적이었다.

 

특히 추기경 두 명, 랍비 두 명(정통파와 자유파에서 각각 한 명씩), 정교회 사제 한 명, 이슬람 학자 세 명(수니파, 살라프파, 시아파에서 각 한 명씩), 금강승 승려 한 명, 대승불교 승려 한 명 총 열 명의 종교인들의 대화가 무척 재미있었는데 그들에게 누군가 한 인물을 원자단위까지 동일하게 복제했다 하자 대뜸 구글의 소행이냐고 하는 장면에서 이미 이를 꽉 깨물었고, 이들이 3개월 만에 등장한 또 하나의 존재들이 과연 '창조물'인지에 대해 갑론을박하며 싸워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던 미국 대통령이 미키마우스도 사탄의 피조물이라는 말에 발끈하는 장면에선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미국 정부를 비롯한 서구 사회는 이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재난과 같은 사태를 최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성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다. (중국 정부의 처리와 비교해 보면 더욱더 이성을 잃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적 태도 역시 마지막 장에서 ...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 책을 읽어 보시기를! "인간의 자유 의지, 운명, 현실, 그리고 존재 이유에 관한 감동적인 실현"이라는 뉴욕타임스의 도서 평이 아주 적절하다. 오래간만에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침대 위에서도 한참 책장을 급히 넘기며 허겁지겁 읽은 책이었다. 갑자기 3개월 전의 나를 다시 마주하게 된 주인공들이 어떠한 결정을 하고, 어떠한 미래로 걸어갈지, <아노말리>를 읽어서 직접 확인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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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그린 사람 - 세상에 지지 않고 크게 살아가는 18인의 이야기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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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작가님의 '글쓰기의 최전선'은 내 책장의 '인생의 책' 칸에 오랫동안 꽂혀있는 책이다. 기록에 따르면, '글쓰기에 대해서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은유 작가님은 사회에서 희미해져버린 사람들을 글을 통해 짙어지게 만든다. 사회가 짓눌러버려 작아진 사람들을 글을 통해 거대하게 만든다. 이 책은 그렇게, '누군가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을 '글로 적어' 크게, 선명하게 그려내는 또 하나의 작업이다. 2020년 1월부터 2021년 3월까지 <한겨레>에 연재한, 세상에 지지 않고 살아온, 계속 지지 않고 나아갈 18인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나는 인터뷰가 사람의 크기를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혹은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워서 사람을 보지 못한다. 세상이 축소해서 못 보고 지나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좋은 인터뷰는 안 보이던 사람을 보이게 하고 잘 보이던 사람을 낯설게 하는 것 같다.

(...)

나는 이런 사람을 크게 그리고 싶었다.

모두가 쳐다보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사유를 자극하는 사람들.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 자체로 모두의 해방에 기여하는 사람들.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

P.7-8

그리하여 은유가 만난 사람들. <그냥, 사람>의 작가 홍은전님, 경찰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기록한 독립출판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저릿한 충격과 슬픔을 주었던 원도 작가님, 소설가 김중미 작가님 김용균님의 어머니이신 김미숙님, 35년간 복직투쟁에 나선 노동자 김진숙님 등 삶의 고통 앞에서 나를 잃지 않고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타인의 슬픔에 연대해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의사, 만화가, 국회의원 보좌관, 가수, 아나운서, 기업인 등 범위에 한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사람의 '연대'의 이야기를 두루두루 들려주었다.

"어떤 사회든 고유의 회복력이 있고, 한국은 회복력이 매우 강한 나라예요.

희망이 있습니까, 하면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희망이 있다는 쪽을 나는 택하겠어요."

이영문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좋은 영화가 세상을 바꾸듯이

정신건강의 가치가 세상을 바꾸고, 대한민국을 바꾼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정신건강의 가치란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힘"이다.

소통, 존중, 신뢰, 사랑이 녹아 있는 개념으로서의 정신건강을 사회적 자본으로 보는 이유다.

p.148-149

그중 국립정신건강센터장이신 이영문 센터장님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은유의 연결' 첫 인터뷰이가 '남성 이성애자 서울 거주 의사'일 줄 몰랐다는 작가님의 인터뷰 후기에처럼 이영문 센터장님은 그동안 은유가 주목해온 '작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번 책에서 나름의 '큰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의 인터뷰를 함께 읽을 수 있어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두려움이 더해지면 혐오가 되기 때문(p.146)'에 전문가의 큰 목소리로 사회가 터부시해 온 정신건강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은유 작가가 전해주는 작고, 큰 목소리로 세상이 지우려 하는 존재들을 크게,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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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서울 지망생입니다 - ‘나만의 온탕’ 같은 안락한 소도시를 선택한 새내기 지방러 14명의 조언
김미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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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면서 고향 정읍을 떠나와 '인서울의 꿈'을 이루었지만 15년 동안 서울살이를 하며 다시 '탈서울'을 꿈꾸게 된 #김미향작가 의 책, #탈서울지망생입니다 를 읽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재택근무 환경이 조성되며 실제로 탈서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등, 새로운 생활방식이 대두되고 있는 요즈음이지만, 여전히 한국은, 서울 공화국이다. 모든 인프라를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빨아들이고 있고 다른 지역은 일자리와 젊은이들을 서울로 빼앗기고 있다.

저자는 서울살이의 열악한 주거 여건과 높은 생활비, 탁한 공기와 교통 정체, 마음에 여유가 없어 점점 예민해지기만 하는 사람에 질려 탈서울을 생각하게 되었고, 일단 벗어나 보자는 마음에 고향인 정읍으로 내려가 한 달의 시간을 보내며 '탈서울과 탈도시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복잡하지만 편리한 삶, 묵묵히 숨통을 열어주지만 조금 불편한 삶 사이에서 여러 생각과 감정(p.71)'을 품에 안고 서울로 돌아온 저자는 실제 탈서울을 시도한 일곱 명의 사람들에게 '욜로가 아닌 현실로서의 지방행'을 준비하기 위해 왜 이사를 결심했는지, 지역은 어떻게 정했는지,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그렇게 일곱 명의 '탈서울'경험자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모였다. 이천, 춘천, 부산, 양양, 창원, 재주, 전주... 다양한 지역으로 원래 고향이었거나, 혹은 연고가 전혀 없거나 하는 곳으로 탈서울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 나는 양양으로 이주하여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이지원씨의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양양에서 2년을 넘게 지낸 지원 씨는 이사한 후 시야가 넓어진 걸 실감하곤 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말로만 '삶은 다양하지'가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서울에서의 저는 모범생 콤플렉스가 심했고, 고정관념투성이로 살았어요.

그런데 이곳에 오니 너무도 다양한 사람, 너무도 다양한 삶들을 만나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해서, 다시 졸업하고 취업한 뒤에

때가 되면 결혼하는 그런 일반적인 라이프 패턴 말고요.

다른 삶들이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어요.

P.208


우리가 탈서울 하지 못하는 것은 일자리가 없어서도 맞고, 서울 외 지역의 인프라가 부족해서도 맞다. 대기업의 지방 분산, 지역 내에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다지기위해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방법이 가장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해결방안인 것도 맞다. 하지만 '다양한 삶을 상상할 줄 아는 능력'이 부족한 것도 한 가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것은 서울(수도권) 밖에서 살아본 적 없는 주제에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서울 사람은 이 이슈에 입을 좀 다물 필요가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읽고 나면 결국 탈서울 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업이든, 이직이든, '먹고 살수 있는 돈벌이'가 필요했다. 이게 무슨 콩을 심었더니 콩이 나왔습니다 같은 당연한 말인가 싶지만, 아무튼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 '일'이란 것의 바운더리를 상상할 줄 아는 힘. 그것이 중요했다. 나는 지식은 물론, 상상력도 부족했다. 탈서울 = 귀농 이라는 아주 단순한 공식만 머릿속에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타지에 가서 살게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때 떠오른 직종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바운더리 밖에 어떠한 직종이, 또 그 안에 어떤 세분화된 직업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삶의 모습, 직업 현장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현실적인 팁이 되는 내용들 (지역 공공기관의 지원 사업 등)도 얻을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직업이 있는지 좀 더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겼다. 나는 반드시 탈서울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땐 어떤 '일'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까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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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고백들 에세이&
이혜미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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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소설가, 김현 시인에 이어 창비 <에세이&>시리 즈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혜미 시인의 #식탁위의고백들 을 읽었다. 앞서 김현 시인의 에세이 리뷰에서도 썼던 말이지만, 시인들은 일상을 무디고 심드렁하고 평범하게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벼리어 준다. 뒤표지에 쓰인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아낸 요리 같습니다.'라는 문장처럼, 이혜미 시인은 익숙한 식탁 앞의 풍경을 생소한 단어의 조합으로 낯설고 매력적인 문장으로 그려낸다.


이 단단한 열매의 예감과 근심, 시름과 실망을 돌보는 일에는 꽤 많은 마음 품이 필요하다.

웅크린 갑각류의 동물처럼 견고한 몸. 조용한 기다림 속에서 무르익는 결심에 대해 생각한다.

공간의 방향을 가늠하듯이, 어제의 향방을 짐작하듯이.

손끝을 세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색을 헤아린다.

이 비밀스러운 세계 속으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사려 깊은 매만짐이 요구된다.

[식탁 위의 고백들] <부드럽게 무르익은 눈빛을 만나러:아보카도> p.8



제대로 익었는지 갈라 보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는 아보카도를 손에 쥐고 딱딱한 껍질을 괜히 눌러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의 탁월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열매의 예감과 근심에 많은 품을 들이지 못해서, 조용히 기다리지 못해서, 무르익는 결심에 대해 생각하지 못해서, 채 다 익지 않은 속살에 울상을 지으며 전자레인지의 문을 열어야 했었던 걸까.


사람 역시 단독으로 대화해 보면 생각보다 많이 오해가 풀리듯, 식재료를 직접 다루어보면 그전까지 가져온 편견이 줄어든다는 것을 아는 사람. 모름을 자랑하고 분석하는 말들에서 불안을 읽어내는 사람. 짓무른 과일에서 지나치게 오래 곁을 내어준 사랑의 슬픔을 읽어내는 사람의 글을 읽으며 별생각 없이 식탁 위에 올렸다 내 입속으로 사라지는 재료에 대해 생각한다. 요리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재료를 재배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달래로 봄을 열고 끈적한 과육이 흘러내리는 복숭아로 여름을 흘려보내고 마롱글라세를 만들며 가을을 달콤하게 졸여내고, 유자청을 만들며 겨울을 날카롭게 썰어내는 시인의 사계절을 꽉 채운 식탁 위의 음식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배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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