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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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급하게 이직한 회사마저 경영 악화로 폐업을 해 갑자기 백수가 되어버린 주인공이 익숙했던 '생'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위기감에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과 다 '무관'한 약국에 이력서를 낸다. 그 약국이 이 소설의 무대이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수많은 유령을, 1이 되지 못한 0의 존재를 마주한다. 고용주인 김 약사도, 동료인 조부장도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주인공이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달라질 거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어서'였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포기하는 순간. 미래로 가는 연료를 잃어버리는 그 순간, 유령은 태어나는 걸까?

이상하게 주인공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책이었다. 오히려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 약국의 '조'라던가 연락이 끊긴 '혜'에게 마음이 쓰였다. 특히 주인공의 시선에서만 그려지는 '혜'의 존재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혜의 취향이 확고해지기까지 혜가 했을 긴긴 고민과 선택의 시간에 자꾸 마음이 갔다. 주인공의 어떤 혼란에도 명쾌한 정의가 되어줄 수 있었던 것은 한발 앞서 허둥지둥하며 홀로 명쾌함을 찾아 헤맸을 혜의 일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혜의 집에 방문했을 때 현관에 흩어진 쓰레기, 화장대 위에 방치된 화장품, 발바닥에 달라붙는 먼지 덩어리, 시퍼렇게 곰팡이가 슨 귤.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풍경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손톱 밑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 이후로 혜가 연약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혜가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머물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서히 연락을 끊은 주인공이 미웠다. 혜가 겨우겨우 비로소 연약한 소리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망설임에 마음이 쓰여서! 그렇다. 내가 혜에게 이렇게나 감정이입을 하는 이유는 내가 지독하게 혜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에게 이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이번 독서는 실패한 독서였을지도 모른다.


페이지를 넘기다 깨달았다. 주인공이, 김약사가, 조가 유령이 된 이유는 바로 타인을 희미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내 눈앞에 사람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를 '스쳐 지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는 것을. 절대로 '내 곁에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타인을 희미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내 존재 역시 희미해진다. 타인을 유령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나 역시 유령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이 혜에게 다시 연락을 하게 되어 비로소 안심했다. 혜를 스쳐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이라서. 비록 언제 다시 '교차'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평행한 길을 각자 걸어가며 가끔 마주하기로 결정한 순간이라서. 상대방을 제대로 마주하기로 결심한 순간 우리는 다시 짙어진다. 선명해진다. 사람이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른 숫자'가 되어줄 수 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음을, 애써 삶을 꾸려가고 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다면, 모두 그렇게 될 수 있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매료의 기억을 꺼내어 반짝이는 순간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고 싶다. 그 순간, 그 사람 뒤에 서서 우주의 단위가 되어주고 싶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영(靈)을 서로에게 기대어 선명하게 만든다. '관계와 관계 속에 사람이 있(p.246)'다. 우리는 좀 더 서로 기댈 필요가 있다. 좀 더 애틋하게 바라보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마음이, 우리가 서로 유령이 되지 않게 만들어줄 것이다.

삶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고민실 작가님의 문장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질릴 때도 있었지만 굉장한 관찰력이라고 감탄하는 문장들이 많았다. 장편보다 단편에서 더 매력이 잘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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