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고백들 에세이&
이혜미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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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소설가, 김현 시인에 이어 창비 <에세이&>시리 즈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혜미 시인의 #식탁위의고백들 을 읽었다. 앞서 김현 시인의 에세이 리뷰에서도 썼던 말이지만, 시인들은 일상을 무디고 심드렁하고 평범하게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벼리어 준다. 뒤표지에 쓰인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아낸 요리 같습니다.'라는 문장처럼, 이혜미 시인은 익숙한 식탁 앞의 풍경을 생소한 단어의 조합으로 낯설고 매력적인 문장으로 그려낸다.


이 단단한 열매의 예감과 근심, 시름과 실망을 돌보는 일에는 꽤 많은 마음 품이 필요하다.

웅크린 갑각류의 동물처럼 견고한 몸. 조용한 기다림 속에서 무르익는 결심에 대해 생각한다.

공간의 방향을 가늠하듯이, 어제의 향방을 짐작하듯이.

손끝을 세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색을 헤아린다.

이 비밀스러운 세계 속으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사려 깊은 매만짐이 요구된다.

[식탁 위의 고백들] <부드럽게 무르익은 눈빛을 만나러:아보카도> p.8



제대로 익었는지 갈라 보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는 아보카도를 손에 쥐고 딱딱한 껍질을 괜히 눌러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의 탁월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열매의 예감과 근심에 많은 품을 들이지 못해서, 조용히 기다리지 못해서, 무르익는 결심에 대해 생각하지 못해서, 채 다 익지 않은 속살에 울상을 지으며 전자레인지의 문을 열어야 했었던 걸까.


사람 역시 단독으로 대화해 보면 생각보다 많이 오해가 풀리듯, 식재료를 직접 다루어보면 그전까지 가져온 편견이 줄어든다는 것을 아는 사람. 모름을 자랑하고 분석하는 말들에서 불안을 읽어내는 사람. 짓무른 과일에서 지나치게 오래 곁을 내어준 사랑의 슬픔을 읽어내는 사람의 글을 읽으며 별생각 없이 식탁 위에 올렸다 내 입속으로 사라지는 재료에 대해 생각한다. 요리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재료를 재배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달래로 봄을 열고 끈적한 과육이 흘러내리는 복숭아로 여름을 흘려보내고 마롱글라세를 만들며 가을을 달콤하게 졸여내고, 유자청을 만들며 겨울을 날카롭게 썰어내는 시인의 사계절을 꽉 채운 식탁 위의 음식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배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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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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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급하게 이직한 회사마저 경영 악화로 폐업을 해 갑자기 백수가 되어버린 주인공이 익숙했던 '생'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위기감에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과 다 '무관'한 약국에 이력서를 낸다. 그 약국이 이 소설의 무대이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수많은 유령을, 1이 되지 못한 0의 존재를 마주한다. 고용주인 김 약사도, 동료인 조부장도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주인공이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달라질 거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어서'였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포기하는 순간. 미래로 가는 연료를 잃어버리는 그 순간, 유령은 태어나는 걸까?

이상하게 주인공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책이었다. 오히려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 약국의 '조'라던가 연락이 끊긴 '혜'에게 마음이 쓰였다. 특히 주인공의 시선에서만 그려지는 '혜'의 존재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혜의 취향이 확고해지기까지 혜가 했을 긴긴 고민과 선택의 시간에 자꾸 마음이 갔다. 주인공의 어떤 혼란에도 명쾌한 정의가 되어줄 수 있었던 것은 한발 앞서 허둥지둥하며 홀로 명쾌함을 찾아 헤맸을 혜의 일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혜의 집에 방문했을 때 현관에 흩어진 쓰레기, 화장대 위에 방치된 화장품, 발바닥에 달라붙는 먼지 덩어리, 시퍼렇게 곰팡이가 슨 귤.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풍경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손톱 밑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 이후로 혜가 연약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혜가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머물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서히 연락을 끊은 주인공이 미웠다. 혜가 겨우겨우 비로소 연약한 소리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망설임에 마음이 쓰여서! 그렇다. 내가 혜에게 이렇게나 감정이입을 하는 이유는 내가 지독하게 혜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에게 이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이번 독서는 실패한 독서였을지도 모른다.


페이지를 넘기다 깨달았다. 주인공이, 김약사가, 조가 유령이 된 이유는 바로 타인을 희미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내 눈앞에 사람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를 '스쳐 지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는 것을. 절대로 '내 곁에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타인을 희미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내 존재 역시 희미해진다. 타인을 유령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나 역시 유령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이 혜에게 다시 연락을 하게 되어 비로소 안심했다. 혜를 스쳐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이라서. 비록 언제 다시 '교차'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평행한 길을 각자 걸어가며 가끔 마주하기로 결정한 순간이라서. 상대방을 제대로 마주하기로 결심한 순간 우리는 다시 짙어진다. 선명해진다. 사람이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른 숫자'가 되어줄 수 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음을, 애써 삶을 꾸려가고 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다면, 모두 그렇게 될 수 있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매료의 기억을 꺼내어 반짝이는 순간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고 싶다. 그 순간, 그 사람 뒤에 서서 우주의 단위가 되어주고 싶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영(靈)을 서로에게 기대어 선명하게 만든다. '관계와 관계 속에 사람이 있(p.246)'다. 우리는 좀 더 서로 기댈 필요가 있다. 좀 더 애틋하게 바라보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마음이, 우리가 서로 유령이 되지 않게 만들어줄 것이다.

삶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고민실 작가님의 문장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질릴 때도 있었지만 굉장한 관찰력이라고 감탄하는 문장들이 많았다. 장편보다 단편에서 더 매력이 잘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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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정해지기로 했습니다 - 잠들기 전,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디아 지음 / 카시오페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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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는 불혹이 되었다. 불혹不惑.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라고 한다. 이 단어 때문은 아니지만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뀔 땐 정말이지 아무 생각 없는 천둥벌거숭이에 가까웠는데 4자를 마주하니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인생의 무게감이 달라진 것이다. 세상 일에 그만 정신을 빼앗겨야지. 내 욕망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요즘의 난 내 욕망의 민낯을 제대로 바라보려 한껏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때에 이 책의 서평단에 선정된 것은 운명이라고 해도 좋을까. 이번 서평단 모집은 '블라인드 서평단'이었기 때문에 명상, 마음 챙김, 마음공부와 관련된 내용인 줄 전혀 몰랐었는데 꼭 필요한 때에 좋은 책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마음공부와 명상-요가를 통해 먼저 겪고 발견하고 깨달은 경험을 나눠온 디아 작가의 새 책 #나에게다정해지기로했습니다 를 읽었다. 적당히 말랑한 내용의 책일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었어서 침대에 누워 읽다 벌떡 일어나 책상에 앉아 마음의 힐링보단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읽었다.

"내 아픈 마음만 자꾸 되뇌며 거기에 반응하고 살아온 습관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픈 기억을 자주 꺼내면 아픔의 크기가 실제보다 몇 배로 커집니다. 심리 상담을 잘못 받으면 이해받고 위로받는데 그칩니다. 이때 어느 정도 위안을 느끼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그동안 내 마음을 어떻게 써 왔는지,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써야 좋은지 너무 모르고 살아온 나의 무지를 바라봐야 합니다. 위로만으로 끝나면 마음이 성장하지 못하거든요. 이런 과정을 천천히 거치면 비틀린 기억이 '바르게'펴져요. 그러면 비틀렸다고 느낀 삶의 어느 부분도 점점 바르게 펴집니다. 마음 챙김의 원래 뜻은 바른 기억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마음 챙김 하는 연습은 바르게 기억하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이 문장을 읽고 생각했다. 작가님이 말하는 나에게의 다정함은 무작정 친절하기만 한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그 다정함은 곧고 바른 마음이라는 것을. 나에게 다정해지는 것은, 삐뚤어져있는 마음을 다독여 다시 옳은 곳으로 '데리고 오는 힘'을 가진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회피성으로 떠나는 밖으로의 여행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보자며 작가님은 먼저 떠난 오지 탐험대원으로써 뒤따르는 여행자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 준다.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의 연못을 더럽히는 세 가지 오염원(탐냄, 성냄, 어리석음) 중 탐냄과 성냄에 대해 깊게 탐구해 보는 책 읽기였다.

더 좋은 것을 원하는 마음이야 인간이라면 응당 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을 얻은 뒤에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원하는 그 '더, 더'하는 마음이 바로 탐냄이며, 이 탐냄은 자연스럽게 성냄과 연결된다고 한다. 탐냄은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없다. 탐내는 만큼 실망하고, 그 실망은 성냄으로 이어진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냄'의 범주 안에 '자기 연민'까지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최근 내 마음에 귀 기울이며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덜어내기 위해 애쓰며 얻어낸 두 가지 키워드는 욕망 다스리기, 비대한 자아 바람빼기였는데 이게 탐냄과 성냄을 다스리는 내용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마음공부의 필요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명상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책날개에 적힌 작가님의 전작 <1일 1명상 1평온>에 관심이 간다. 직접적인 명상의 방법론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것 같으니, 얼른 찾아 읽어보아야지. 꼭 필요한 때에, 마음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책을 만나 좋았다. 하루의 일과에 명상의 시간을 넣어보도록 시간을 내 보아야지. #별숲밑줄 #2022별숲책일기 #카시오페아 #디아작가 #명상 #마음공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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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계절 - 차와 함께하는 일 년 24절기 티 클래스
정다형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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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다듬어나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않고 성급하게 취한 취향에서는 설익은 향이 난다. 제대로 익지 않은 취향에 대해 말할 때면, 제 몸에 착, 붙지 않아 요란스럽게 덜그럭대는 빈 수레같이 시끄럽기만 해서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그래서이다. 차를 즐기기 시작한 지 꽤 되었지만 그에 대해 쉽게 뭐라 말하기 꺼려지는 것은. 좀 더 잘 익히고 싶고 깊게 들여다보고 싶은 일. 아직은 공부가 더 필요한 일. 내가 너무 어렵고 까다롭게 다가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더 깊게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 바로 '차의 세계'였다. 그런 나의 바람을 조금쯤은 이루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책, #차의계절 을 만났다. 세상의 모든 차 산지와 차밭을 여행하며 찻잎을 고르고 이야기를 파는 사람. 영국과 인도, 그리고 일본에서 차를 공부하고 차와 관련된 다양한 경력을 쌓아왔고, 현재 티 전문 브랜드 '티에리스'의 대표 티 디렉터로 활동 중인 정다형님이 쓴 책이다.

차의 종류와 차 도구, 차 보관법, 우리는 방법 등의 기본 지식과 함께 1년 24절기에 어울리는 차를 추천하며 세계의 차 산지를 소개하고, 차와 관련된 문화 이야기를 함께 엮어내어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차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어서 정말 좋았다. 중국, 일본, 대만, 인도를 넘어 스리랑카와 네팔의 차에 대해서까지 알 수 있어 내 차 세계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밀크티, 아이스티, 과일 티, 리큐르 티 등 더욱 다채로운 방식으로 차를 즐길 수 있는 방법도 소개해 주어 더욱 즐거웠다. 특히 리큐르 티 말이지 후후후. 아, 그리고 티 테이스팅 용어 리스트도 있어서 앞으로 차를 마신 뒤 기록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찻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JTBC예능, '효리네 민박' 때문이었다. (아직도 일상의 BGM으로 틀어놓곤 하는 예능이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물을 끓이고, 퇴수기 위에 다구를 늘어놓고 보이차를 마시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어찌나 근사해 보이던지. 이후로 찻자리를 자주 찾아다녔다. 집에서도 즐기고 싶어 몇몇 다구를 구매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돈이 많이 들기도 했고. 올해는 이 책을 곁에 두고 조금 더 부지런히 차와 대면해 보아야겠다. 몇 해 전에 구매했었던 절기를 소개해 주는 책 <시간의 서>와 이 책을 함께 곁에 두고 24절기를 담뿍 음미하는 한 해를 보내보려고 다이어리에 24절기를 표기해두었다. 이제 4일 뒤면 입춘이다. 봄이 시작되는 날이다. 계절의 시작을 추천해 주신 차와 함께 하고 싶으니 연휴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닐기리 티를 주문해 보아야겠다.


올해엔 마음에 꼭 드는 자사호 혹은 티포트를 하나 꼭 마련하고 싶다. 지난해에 도자유희전 갔을 때 마음에 들어 구매했던 저 물방울 찻잔과 세트인 티포트도 자꾸 생각나고... 아무튼 성급하게 고르지 말고 천천히 오래 공부하고 이것저것 들여다보다가 가을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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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에세이&
김현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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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님에 이어 김현 시인님의 에세이를 읽었다. 앞서 황정은 작가님의 에세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으며 '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좋아한다고 말했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이야기'를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의 글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시인의 에세이는 뭐랄까, '반짝이는 이야기'보다는 '단어의 날'을 발견하는 글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자주 쓰이고, 평범하게 쓰이는 단어들을 시인의 감성과 시선으로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익숙한 의미 위에 새로운 의미를 쌓아 더욱 풍성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감각을 갈고닦아 예민하게 만들어주는 시인이 쓴 에세이의 맛을 알게 되었다.


일렁이다는 물에 떠서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움직이는 것을 뜻하는 동사.

마음은 동사,라고 어느 글에 쓴 적 있고. 덧붙이자면 일렁이다는 여름 동사의 일종.

겨울 동사는 속삭이다. 봄의 동사는 어른거리다. 가을의 동사는 흘러가다.

어른거리고 일렁이고 흘러가 속삭이는 마음의 사계절.

동사를 활용해 마음의 사계절을 그려보세요. 그것이 바로 당신을 설명하는 일

p.26


나는 어떤 동사로 나의 사계절을 표현해 볼 수 있을까?를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던 문장이다. 동사로 계절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보다 참 어려웠다. 비록 그럴싸한 동사의 사계절을 그려내진 못했지만 잠시라도 우리말 단어들을 이것저것 떠올리며 계절과 어울리는 동사를 찾아보려고 애썼던 그 시간이 참 즐거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얼마나 건성으로 단어들을 대했는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란 결국 나를 세우는 마음이며 그 마음만이

어쩌면, 하고 한 사람의 삶을 대신하여 살 수 있는 용기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모든 사랑은 자기에서 출발해 타인의 경유하고 마침내 우리에게 도착한다는 것을 깨치는 연쇄작용이었다.

P127


이 책에선 이렇게 시인다운 이야기들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생활인으로서의 김현, 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자꾸만 특정 동네의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는 이야기가 요즘 나와 너무 똑같아서 한참 웃다가, 사회가 정해놓은 길 밖에 서 있기 때문에 사회가 내어준 기회에 손조차 뻗어볼 수 없는 현실의 불합리함을 문득, 깨닫고 화가 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작가님의 사정과는 사뭇 다른 '비혼 가구'로서의 입장이지만) 생활 동반자 법과 차별 금지법의 필요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하는 너무 현실의 싸한 쇠의 맛이 느껴졌더랬다. 그러면서도 차별과 혐오에 결코 지지 않겠다는, 지지 않기 위해 끝내 다정해지겠다는 마음이 나에게 와닿았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란 삶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죽음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모든 죽음에 애도를 표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다는 이유로 죽음을 소란스럽게 앓고자 하는 이를 더는 가까이 두고 싶지 않다.

살아 있다는 이유로 고요히 소멸해가는 이와 이제 더욱 가까이 지낸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잘 이르고 싶다는 이들의 침묵에 더 마음이 쓰인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두고 수의 대신 입고 싶은 옷을 골라 놓거나

장례식장에서 계속해서 틀어놓고 싶은 음악을 미리 귀띔해 주는 사람을 벗으로 두고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P.142


현실이라는 바닥에 두 발을 착, 붙인 글이라서 좋았던 김현 작가님의 에세이에서 특히 자주 눈에 들어온 단어는 '죽음'이었다. 올해 4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전 처음으로 '죽음'이 현실로 느껴졌었다. 십 년 전 친한 친구가 떠났을 때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장례의 '주체'가 아니었다 보니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이 할머니의 장례식 때, 아버지가 안 계셔서 손주인 오빠와 내가 장례의 주체가 되어보니, 갑작스레 몰려왔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습관처럼 '내 꿈은 단명'이라고 외치던 것을 멈추었다. 죽음을 가볍게 여기던 태도를 고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난 단어의 무게를 가벼이 느껴온 것만큼 삶의 무게 또한 가벼이 여겨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인생이라는 일 인분의 그릇을 내 힘으로 채워 왔는가,라는 물음 앞에 자꾸만 작아지는 요즘. 죽음에 잘 이르기 위해 그릇 안에 무엇을 채워나갈지를 잘 생각해 보아 할 때다. 삶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때다.


다정하기 싫지만 다정한 시인, 김현 작가님의 문장에서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잘 이르고 싶다'라는 이들의 '침묵'을 배웠다. '타인의 얼굴에서 시간을, 시간에 힘입어온 기쁨과 슬픔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것(p.149)'이 어른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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