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구겐하임 - 예술 중독자 현대 예술의 거장
메리 V. 디어본 지음, 최일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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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타이타닉 호에서 사망한 벤자민 구겐하임의 딸이며, 독일계 명문가 구겐하임 가문의 막강한 자금력으로 전쟁중인 유럽의 한복판에서 "하루에 그림 한 점"을 구입하며 자신만의 컬렉션을 구축해나간 컬렉터. 이것이 내가 알고 있던 짤막한 페기 구겐하임의 전부다. 책을 읽고 나니 대체로 사실이지만 몇몇 부분은 단순화의 오류가 있는 문장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2006년 초판 출간 이후 절판되었다가 이번에 16년 만에 새롭게 단장하여 출간된 개정판, #을유문화사 의 #현대예술의거장시리즈 #페기구겐하임_예술중독자 를 읽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어린 나이에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편안한 당대 사회가 이상적으로 그리던 그대로의 여성의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도 있었음에도 동시대의 여성들과는 다른 길로 힘차게 발을 내뻗는 모험을 즐기는 여인이었다. '정해진 길'로 가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있는 페기 구겐하임의 성격은 작품을 컬렉 하는 데에도 고스란히 그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알려지지 않고, 증명되지 않은 화가들의 작품 활동을 후원하고, 검증되지 않은 작품을 컬렉 할 수 있는 예술의 길을 훤히 밝히는 밝은 눈. 이 책은 그녀의 이 밝은 눈이 그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 아님을,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고, 그 어떤 순간에도 '자기'를 잃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공부와 실험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갖출 수 있었음을 그녀가 여러 사람과 나눈 서신과, 그녀에 대한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이야기한다.

나는 특히 책 초반부에 그녀가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각하는 부분이 정말 좋았다. '일하는 생활인'으로서의 감각을 잃지 않는 예술가의 존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페기는, 물론 나와 같은 소시민처럼 이력서를 접수하고 압박면접을 버텨내며 간신히 취업한 것과는 다르지만, '선와이즈 턴'이라는 서점에, 물론 이 역시 돈 많은 자들의 놀이터 같은 느낌의 직장이었지만, 취직하여 그곳에서 아방가르드 문화를 흡수하고 예술에 관한 태도, 그리고 예술계에서 자신의 할 수 있는바가 무엇인지를 정립해나간 듯하다.

"페기의 갤러리는 매우 대중적인 사업이었다. 보도 자료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그녀가 머릿속에 그린 것은 단순한 갤러리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교환되는 곳이었고, 정체되고 동떨어진 예술이 아니라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끌어들이는 예술의 공간으로서, 알려지지 않고 증명되지 않은 예술가들을 소개하여 궁극적으로는 금세기 예술에 공헌하게 되는 그런 장소였다. 그 사명은 진실로 "과거를 기록하는"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봉사하는"것으로서, 당시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는 완전히 생소한 목표였다." - P.408

지금의 갤러리는 누구나 들러 작품을 감상할 수 있지만, 1940년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러한 분위기를 처음 시작한 게 페기 구겐하임이었다는 것도 너무나도 짜릿하고 즐거운 사실이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작품을, 예술가들을 구출하는 데 힘을 보태고 사람들이 성공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던 예술가를 과감하게 후원할 수 있었던 여성. 그녀의 미술사적 역할을 제대로 쫓아가볼 수 있도록 도와준 책을 읽으며, 언젠가 꼭 이탈라의 베네치아에 있는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에서 그녀의 흔적을 직접 찾아볼 수 있기를 바라보았다. #별숲밑줄 #2022별숲책일기 #페기구겐하임 #을유서포터즈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책에 대하여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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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이면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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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림을 두고 남녀가 나누는 대화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리 잘 그리지는 못한 그림이다. 하지만 남자에겐 소중한 추억이 있는 듯하다. 어떤 이야기일까? 이 썩 잘 그리지 못한 일본의 한 관광지를 그린 그림의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있을까? 소설은 그 남자 놉펀의 시선으로 #그림의이면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달콤하고, 쌉싸름했던 그 이야기를.


"나는 그 그림의 이면에는 인생이 있고, 그 인생이 나의 마음에 새겨져 있음을 잘 알았다."


도쿄에 유학 중인 젊은 놉펀은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온 아버지의 친구인 아티깐버디 공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끼라띠를 수행하게 되고, 개인적 일정으로 아티깐버디공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던 끼라띠 여사와 놉펀은 점차 호감의 감정을 교류해가며 가까워진다. 소설의 중후반까지 불륜이라는 벽과 13살 차이의 나이차의 벽을 아슬아슬하게 타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여행이 끝난 후 열병이 사그라들듯 끝나고 만다. 물론, 이것은 놉펀의 시선이고 놉펀의 입장이다.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저돌적으로 돌진하고, 눈앞에서 멀어지고 난 뒤 바로 다시 제 앞에 펼쳐진 길 위를 뒤돌아 보지 않고 달려나가는 놉펀의 모습은 딱 그 또래의 청년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적절히 감정을 절제할 줄 알고 선을 지킬줄 아는 끼라띠 여사의 모습은 또 얼마나 어른스럽고 우아한가. 나에겐, 끼라띠 여사와 놉펀의 사랑이 어긋나고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내가 '사랑'이란 '삶의 모든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 아니 실은 '없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은 사랑 때문에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제 자신의 삶마저도 내팽개치는 류의 이야기에 절대 공감하지 못하곤 했다. 비록 사랑의 감정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과의 지켜야 할 선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끼라띠 여사의 삶이 좋았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현명한 끼라띠 여사가 끝까지 우아하게 선을 지켜내주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마음의 문제까지는, 어쩔수 없다 쳐도 그 마음의 소리에 홀려 짐승보다 못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서 안심이었다.

"나에 대한 강렬한 감정은 적당한 때가 되면 점차 사라져 갈 것이고, 결국 나는 자네 인생에서 중요한 무엇이 아니게 될 거야. 그러면 족쇄 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의 감정과 행복이 예전처럼 놉펀의 마음으로 돌아올 거야. 나는 그 시간을 기도하며 기다려."


태국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태국 작가 씨부라파의 대표작으로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로도 재탄생한 오늘날 태국 문학의 가장 대표적이면서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근대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씨부라파 역시 태국 근대기에 작품 활동을 한 인물이라서 더욱 관심이 갔다. 이 작품이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뀌는 태국 근대사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 점은 등장인물들의 관계 설정에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구시대의 관습과, 구시대적 수동적 여성상이라는 한계를 가진 끼라띠 여사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놉펀의 어긋남은 태국이 근대와 작별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끼라띠 여사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읽어본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 없이 죽는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족하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뿐 아니라 한 시대와 시대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뒤늦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은 끼라띠 여사에 대한 안쓰러움을 뒤로하고, 다시 놉펀에게 시선을 돌려본다. 어떤 사랑은, 평생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문득문득 그 자리에 스치는 서늘한 바람 때문에 쓸쓸해지게 만들곤 한다.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이루지 못한 사랑도 그럴 테지만, 서로 사랑했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이루지 못한 사랑은 더욱더 그럴 것이다. 끼라띠 여사가 떠난 뒤에야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된 놉펀은 그 후에도 담담히 제 인생 앞에 펼쳐진 길을 온 힘을 다해 걸었을 것이다. 그러다 가끔은 그림의 이면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쓸쓸한 바람을 맞으며 먼 곳을 바라보겠지. 그 그림의 이면을. 달콤하고, 쌉싸름한 그 감정을.


적당히 느슨하고 적당히 뜨겁고 적당히 현실적인 태국 영화를 꽤 좋아하는데, 처음 읽어본 태국 소설 역시 마음에 들어서 다른 작품을 또 만나보고 싶어졌다.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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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다, 개정판 현대 예술의 거장
피에르 아술린 지음, 정재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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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다 
 by. 피에르 아술린 지음 | 정재곤 옮김
출판사 : 을유문화사 / 독서 매체 : 종이책 / 읽은 날 : 2022.09.27-09.29 / 별점 : ★★★★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종종 착각하곤 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역시 그랬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너무나도 유명한 사진 몇 점뿐이면서 나는 그를 잘 안다고 착각했다. 아주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사진을 처음 찍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현장에서 어떤 시각으로 사진을 찍었는지, 누구와 교류하였는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어떻게 유명해졌는지, 그의 말년은 어땠는지. 단 하나도 아는 것이 없음에도 그저 잘 알려진 사진 몇 장으로 그를 다 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이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참 말도 안 되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이 전기를 쓴 작가는 현재 프랑스에서 현장 비평을 주도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인 피에르 아술린이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생전에 그의 집이나 혹은 자신의 집에서 5년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었고, 전화와 편지, 엽서, 팩스를 통해 수없이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자료를 이용해 총 8개의 챕터로 브레송의 삶을 훑는다. 가끔은 너무 집요하게 훑어서, 내가 진절머리 내는 도무지 끊이지 않는 프랑스어 말소리가 뒤에 들려오는 것 같아서 부르르, 몸이 떨리기도 했다. (나는 혀가 입안에서 굴러가는 듯한 느낌의 언어의 소리를 너무나도 싫어한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 같은... 그래서 그 두 나라의 영화도 잘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진절머리 날 정도로 쏟아낸 문장들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닫고,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진이라는 장르의 예술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최근 수원시립미술관에서 보았던 어윈 올라프의 사진전 덕분에 조금 진지하게 사진이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책은 '찍는다는 행위의 철학'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시작은 회화에서 시작되었고, 그리고 끝 역시 그림으로 마무리 지었다는 이 수미쌍괄 식인 삶의 궤적이 참 흥미롭다. 젊은 시절,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와 영화를 찍고 싶어 해 장 르누아르와 함께 작업을 했던 것이 그의 사진의 남다른 지점을 만들어내는데 큰 공헌을 헀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조지 6세의 대관식 날 주인공이 아닌 그 주인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은 브레송을 두고 만약 그가 중세에 태어났다면 호화롭게 장정된 책의 가장자리 장식에 관심을 쏟았을 거라는 피에르 아술린의 글에 쿡쿡 웃음 지으며 나는 그동안 '유명한 사진작가, 그러나 관심 없는.' 상태였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단숨에 반하고 말았다. 브레송이 주인공이 아닌 대중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던 것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소시민에게 눈길을 줄 수 있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포착할 수 있는(p.265) 일'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그의 태도에 뒤늦게 반해버린 것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표현하는 단어는 많겠지만 나는 이 책에서 '비순응주의자'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가 자기 같은 비순응주의자를 위한 책이며, 사진에 관한 최고의 지침서라고 말한 오이겐 헤리겔의 책, <마음을 쏘다, 활>이라는 책이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어떤 내용이기에 '그간 찾아 헤매던 간단명료한 원칙들이 담겨 있었다(p.314)'고 했는지 말이다.


책은 차곡차곡 영웅의 서사시를 쌓아올린다. 그림에서 영화로의 이동과 3년간 독일군의 전쟁 포로로 지내며 어떠한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그리고 그 체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활약은 챕터 5의 후반부터 시작된다. 뉴욕에서의 활동, 매그넘 포토사의 시작, 매그넘의 멤버들과 함께한 가치들, 그리고 인도, 파키스탄, 버마(미얀마), 중국 등지에서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태어나는 격동의 현장 속에서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해진 사진들을 건져올리는 순간들까지. 인도의 영화감독, 사티아지트 라이가 표현한 브레송이야말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가 찍은 사진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우리에게 제대로 설명한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디테일을 
기념비적 순간으로 변모시킬 줄 아는 힘을 가진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하는 부분들을 
걷어낼 수 있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하는 부분들을 걷어내는' 사진. 나는 이것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을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문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그동안 왜 그렇게 감흥 없이 그의 사진을 보았을까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되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무엇을 걷어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둔함 때문이었으리라. 이 책 덕분에 좀 더 맑아진 눈으로 그의 사진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지난 6월부터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그의 사진전이 일주일 연장되었다고 한다. 이번 연휴에 들러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그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며, 이 책에 사진자료가 많지 않아서 아쉬웠던 마음을 달래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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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예술 윤혜정의 예술 3부작
윤혜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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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예술>은 전작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이 인터뷰집이었던 것과 달리 “감정, 관계, 일, 여성, 일상”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에 대한 윤혜정 님의 내밀한 생각을 스물여덟 분의 아티스트의 작품과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며 풀어내는 에세이집이었다.


마크 로스코의 삶과 작품을 통해 갖가지 딜레마 속에서도 답을 찾기 위해 평생 진력을 썼지만 결국 "세상에 완벽한 결정이란 없음을 인정하며 그에 합당한 책임을 감수하는(p.38)" 어떤 겸허한 태도에 대하여,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을 마주했던 경험을 통해 "충만함과 상실감, 신비로움과 두려움,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느낌, 자신의 안에서 첨예하게 맞서는 두 감정 사이의 혼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예술을 사랑하는 상태'에 대하여, 양혜규의 작품 <창고 피스, 2014>를 통해 결핍을 직시한다는 일에 대하여, 장 미셸 오토니엘의 작업을 통해 "예술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p.94)"에 대하여, 올라퍼 앨리아슨의 "세상을 구성하는 원자의 소리까지, 진동까지 들으려 애쓰는 예술가의 진심(p.112)"을 이야기하며 예술의 진짜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또 안리 살라의 작업을 통해 동시대 예술을 통해 세상을 명료하게 들여다보는 일에 대하여, 문성식 작가의 작업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 가장 순수한 욕망을 지켜낸다는 것에 대하여, 바이런 킴의 작품 활동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성실히 감응하는 것(p.199)이 곧 영감의 실체"라는 것에 대하여, 유영국 작가님의 삶을 통하여 "삶과 예술을 자기 의지대로 끌고 나가기 위해 고요히 노력한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는 세계(p.224)"에 대하여, 폴 매카시의 드로잉 작품을 통해 스스로 사유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하여, 구본창의 작품을 통해 '고립의 정서'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를 통해 '죽음'에 대하여 깊게 사유하고, 그 생각의 실타래를 글로 풀어낸다.


지난 2년동안 미술관과 갤러리를 바지런히 찾아다녔던 발걸음 덕분에 윤혜정 디렉터님께서 끌러놓은 예술가들의 이름들이 낯설지가 않았고 덕분에 더욱 집중해서 한 장 한 장 읽을 수 있었다. 한 예술가의 삶에 대해 읽고 나면 바로 다음 예술가의 삶으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아 오래 공들여 읽었다. 섬세하고 진중하고 고요하게 세상을 들여다보고, 분해하고, 그것으로 또 다른 무언가를 조립해 내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들여다보는 즐거움, 두려움, 황홀함을 만끽하는 책 읽기였다. 사실 예전엔 현대미술의 난해함에 진저리 치던 나였는데 윤혜정 디렉터님, 그리고 또 한분, 박보나 작가님의 책을 통해 한 발 한 발 현대미술과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다시 책의 맨 앞, 프롤로그를 펼쳐본다.

"천문학이나 우주과학이 어려운 학문이라고 해서 별을 보거나 우주를 꿈꾸는 행위를 포기하진 않습니다. 별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듯, 미술 작품과의 만남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미술의 현학성은 내용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먼저 기인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전시장보다 오히려 삶의 한가운데서 더 자주 진공의 시공간을 대면합니다. 번번이 길을 잃기도 하지만 작은 길이라도 스스로 찾으려고 노력하지요. 세상의 모든 예술 역시 스스로 길과 답을 찾아 나선 어느 예술가의 부단한 분투의 결과물입니다. 아니 그전에 부조리한 세계와 소통 불가능한 관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통찰하고자 한 남다른 의지이자 시도이지요. 이들의 개념이 정답이건 아니건, 그래서 위안 받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렇게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생을 걸고 해 온 이야기들을 정말이지 제대로 잘 경험하고 싶습니다. 이 글이 작품 앞에서 밀려드는 막막함과 막연함을 자기만의 감성과 해석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 정확한 지도로 쓰이길 바라며, 별자리를 짚어 주는 길잡이처럼 미술가에 대한 정보, 작품의 의미 등을 아는 힘껏 이 책에 담고자 한 이유입니다."

처음엔 쭈뼛대며 작품 앞에 섰다. 무엇에 중점을 두고 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저 작품의 조형미에만 집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어떻게 읽어내도, 괜찮다는 것을. 작품을 마주한다는 것은 정답을 찾는 일이라기보다는 작품이 드러나게 만든 나의 내면을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동안 아직 공부가 더 많이 필요한 애송이라 마음만 바빠 전시를 보러 가서도 한 작품 한 작품 공들여 들여다보지 못했다. 앞으로는 하나의 작품 앞에서 더 많은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서두르지 않고 깊게 사유할 결심을 할 수 있기를 나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고 먼 나의 예술을 향한 미로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주실 윤혜정 디렉터님의 글과 기획하시는 전시들을 소중히 마주해야지. 단단하고 정직한 글들을 오래 곁에 두고 종종 펼쳐보아야지.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책에 대하여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별숲밑줄 #2022별숲책일기 ​#도서협찬 #도서제공 #예술 #예술에세이 #에세이 #미술책 #미술책읽기 #예술책일기 #국제갤러리 #윤혜정작가님 #윤혜정디렉터 #윤혜정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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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
고봉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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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은 김수영 작가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한겨레에서는 '거대한 100년, 김수영'이라는 타이틀로 6개월간 김수영 작가의 작품에 관한 평론 26편을 연재하였고, 김수영 작가의 작품 <거대한 뿌리>의 한 구절, '이 무수한 반동이 좋다'를 타이틀로 한 이 책은 그 연재분을 모은 책이다. 시를 잘 읽지 않고, 5-60년대 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에게 김수영이라는 시인은 그저 교과서에서 만났던 시 '풀'의 작가, 참여 시인, 이란 막연한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분이다.

책은 키워드별로 주요 시대를 파악하여 시간 순서대로 편집되어 있다. 탄생과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기, 구수동 거주 시기, 4.19혁명 이후와 같이 말이다. 26개의 키워드 중 <기계>와 <자유>, 그리고 <죽음>편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아니, 실은 제일 마지막의 '대담'이 가장 좋았을지도...) 가장 뜨악했던 부분은 노혜경 시인이 쓴 <여혐>편이었다. 김수영 작가에 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여혐'문제라고 한다. 확실히 <죄와 벌>같은 시는 용납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은 시였다. 김수영의 이러한 면을 노혜경 시인은 '60년대를 짊어지고 그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라고 말한다. 또 뒤편의 대담에서 이경수 교수님께서는 "김수영 시의 여성 혐오 문제는 피하거나 그 자체에만 천착할 것이 아니라, 김수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고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김수영의 시들이 문제적인 이유는 그것이 지나간 과거, 그 시절엔 그랬지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환기되는 혈실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어떤 유산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치열하게 논의해야 한다"라고도 말한다. 이제껏 김수영은 '너무 우상화'되며 자유롭게 읽히기를 금지당해왔지만 이제는 독자들이나 연구자들이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새로운 독자들에 의해 새로운 김수영이 발견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 책을 통해, 잘 알지 못했던 김수영 작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김수영 작품의 독자가 되어 새로운 김수영을 발견하는데 함께 해야겠다.

박인환 작가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챕터 마지막에 "야아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라고 외친 박인환 작가의 말을 읽으며, 문득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좋은 소설을 쓰시오."라고 말해주던 구보의 벗의 말과 박인환 작가의 말이 겹쳐진다. 박태원이 살았던 일제 강점기, 그리고 김수영, 박인환 작가가 살았던 한국전쟁 이후의 시대. 모두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그 공포의 시기에 '좋은 소설, 훌륭한 시'를 쓰기 위해 쓰자며 응원을 나누던 벗과 함께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문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간 나의 한국 문학의 관심사는 3-40년대 경성의 문인들, 그리고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2000년대 이후 작가분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훌쩍 뛰어넘어버린 시간 속의 윤오영 수필가님, 황순원 작가님, 그리고 박경리 박완서 작가님 정도는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찾아 읽기는 했다.) 한국전쟁에서부터 민주화운동까지, 그 지난한 한국 현대사를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이 그 시대의 작품과 작가들을 덩달아 외면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한국 문학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이젠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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