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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이면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평점 :
한 그림을 두고 남녀가 나누는 대화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리 잘 그리지는 못한 그림이다. 하지만 남자에겐 소중한 추억이 있는 듯하다. 어떤 이야기일까? 이 썩 잘 그리지 못한 일본의 한 관광지를 그린 그림의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있을까? 소설은 그 남자 놉펀의 시선으로 #그림의이면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달콤하고, 쌉싸름했던 그 이야기를.
"나는 그 그림의 이면에는 인생이 있고, 그 인생이 나의 마음에 새겨져 있음을 잘 알았다."
도쿄에 유학 중인 젊은 놉펀은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온 아버지의 친구인 아티깐버디 공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끼라띠를 수행하게 되고, 개인적 일정으로 아티깐버디공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던 끼라띠 여사와 놉펀은 점차 호감의 감정을 교류해가며 가까워진다. 소설의 중후반까지 불륜이라는 벽과 13살 차이의 나이차의 벽을 아슬아슬하게 타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여행이 끝난 후 열병이 사그라들듯 끝나고 만다. 물론, 이것은 놉펀의 시선이고 놉펀의 입장이다.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저돌적으로 돌진하고, 눈앞에서 멀어지고 난 뒤 바로 다시 제 앞에 펼쳐진 길 위를 뒤돌아 보지 않고 달려나가는 놉펀의 모습은 딱 그 또래의 청년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적절히 감정을 절제할 줄 알고 선을 지킬줄 아는 끼라띠 여사의 모습은 또 얼마나 어른스럽고 우아한가. 나에겐, 끼라띠 여사와 놉펀의 사랑이 어긋나고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내가 '사랑'이란 '삶의 모든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 아니 실은 '없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은 사랑 때문에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제 자신의 삶마저도 내팽개치는 류의 이야기에 절대 공감하지 못하곤 했다. 비록 사랑의 감정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과의 지켜야 할 선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끼라띠 여사의 삶이 좋았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현명한 끼라띠 여사가 끝까지 우아하게 선을 지켜내주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마음의 문제까지는, 어쩔수 없다 쳐도 그 마음의 소리에 홀려 짐승보다 못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서 안심이었다.
"나에 대한 강렬한 감정은 적당한 때가 되면 점차 사라져 갈 것이고, 결국 나는 자네 인생에서 중요한 무엇이 아니게 될 거야. 그러면 족쇄 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의 감정과 행복이 예전처럼 놉펀의 마음으로 돌아올 거야. 나는 그 시간을 기도하며 기다려."
태국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태국 작가 씨부라파의 대표작으로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로도 재탄생한 오늘날 태국 문학의 가장 대표적이면서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근대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씨부라파 역시 태국 근대기에 작품 활동을 한 인물이라서 더욱 관심이 갔다. 이 작품이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뀌는 태국 근대사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 점은 등장인물들의 관계 설정에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구시대의 관습과, 구시대적 수동적 여성상이라는 한계를 가진 끼라띠 여사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놉펀의 어긋남은 태국이 근대와 작별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끼라띠 여사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읽어본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 없이 죽는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족하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뿐 아니라 한 시대와 시대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뒤늦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은 끼라띠 여사에 대한 안쓰러움을 뒤로하고, 다시 놉펀에게 시선을 돌려본다. 어떤 사랑은, 평생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문득문득 그 자리에 스치는 서늘한 바람 때문에 쓸쓸해지게 만들곤 한다.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이루지 못한 사랑도 그럴 테지만, 서로 사랑했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이루지 못한 사랑은 더욱더 그럴 것이다. 끼라띠 여사가 떠난 뒤에야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된 놉펀은 그 후에도 담담히 제 인생 앞에 펼쳐진 길을 온 힘을 다해 걸었을 것이다. 그러다 가끔은 그림의 이면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쓸쓸한 바람을 맞으며 먼 곳을 바라보겠지. 그 그림의 이면을. 달콤하고, 쌉싸름한 그 감정을.
적당히 느슨하고 적당히 뜨겁고 적당히 현실적인 태국 영화를 꽤 좋아하는데, 처음 읽어본 태국 소설 역시 마음에 들어서 다른 작품을 또 만나보고 싶어졌다.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