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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눈이 쏟아지던 어느 날 저녁, 홈즈와 왓슨이 창 밖을 내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왓슨 : 홈즈, 세상 모든 눈이 여기에 다 내리는 것 같구만.
홈즈 : 그렇지? 엄청나게 내리는군.
왓슨 : 이러다가 완전히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것같은데...
홈즈 : 왓슨, 무슨 걱정인가. 내 방에서 하룻밤 묵어가면되지. 하하.
왓슨 : 하긴 그러면 되겠군. 그런데 홈즈, 난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걸 보면 말일세, 처음엔 기분이 좋고 편안함을 느끼다가도 이내 조바심이 생기고 덜컥 겁이난단 말이야.
홈즈 : 그래? 그렇다면 자네 분명 눈에 대한 어떤 추억이 있을테지?
왓슨 : 그 친구 탐정아니랄까봐...맞네.
홈즈 : 들어볼까?
왓슨 :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군. 겨울 산행이었지. 대입 시험을 마치고 고3 마지막 겨울방학이 막 시작될 12월말 즈음이었네. 계룡산으로 MT를 갔었지. 2박 3일의 일정 중 마지막날, 우리는 아침 일찍 계룡산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네. 지금 생각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산행이었네. 등산화를 신고 아이젠 착용하기는 커녕 고작 운동화, 심지어 구두를 신은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산 허리쯤 올랐을까,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어. 정상 쉼터에 도착한 우리는 이미 얼어버린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서둘러 하산을 준비했지만 웬걸 등산로는 눈에 덮여버린지 오래였네. 계룡산 정상에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지. 일행 40명이 제각각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네.
홈즈 : 거 참, 난감했겠군.
왓슨 : 더 말해 무엇하겠나. 바로 그때 한 선배가 남여 3~4명씩 조를 지어주며 더 늦기전에 내려가자고 하더군. 나도 남자 동기 하나, 여자 동기 둘과 함께 조심조심 발걸음을 아래로 떼어놓기 시작했지. 원하지 않는 고립의 상태에 던져진 난 세상과 단절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네. 홈즈, 자넨 고립된다는게 뭔지 경험해 본 적이 있나? 아니면 생각이라도 해 본 적이 있나?
홈즈 : 음, 난 고독과 사색을 즐기는 편이지. 하지만 고립 원하는 사람은 아니네.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말인데 최근 읽은 책,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 그래.
왓슨 : 독서도 경험의 일부가 아닌가? 흥미로운데. 그래, 그 책이 고립에 대한 이야긴가? 어딘가에 갇혀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는 그런 이야기겠지? 톰 행크스 주연 <캐스트 어웨이>나 팀 로빈슨 주연의 <쇼생크 탈출>같은 영화처럼 말이야. 책 제목이 조금 동떨어지긴 해도...그렇지?
홈즈 : 왓슨, 아쉽지만 <더 리더>는 자네 기대처럼 그런 작품이 아니네. 자네가 말한 <캐스트 어웨이>나 <쇼생크 탈출>은 어쩔 수 없이 직면케된 고립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헤쳐나와 마침내 끊어진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꿈을 찾아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감동적인 이야기지. 하지만 <더 리더>는 그 반대라네.
왓슨 : 반대라니? 잘 이해가 안 되는데, 홈즈.
홈즈 : 그러니까 <더 리더>의 두 주인공 미하엘 베르그(이하 미하엘)와 한나 슈미츠(이하 한나)는 고립을 향해 나아가는, 아니 고립으로 도피해 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네.
왓슨 : 그럼 그들이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다는 말인가?
홈즈 : 그렇네. <더 리더>는 3부로 구성되어 있네. 1부는 15세 미하엘과 36세 한나가 어떻게 만나서 어떤 관계를 맺는지, 2부는 법대생이 된 미하엘과 과거 나치의 강제수용소 감시원이었던 한나가 법정에서 다시 조우하면서 한나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또 미하엘은 어떤 심리적 갈등을 겪는지, 3부는 교도소에 갇힌 한나에게 지속적으로 책을 녹음해서 읽어주는 미하엘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지.
왓슨 : 아, 홈즈, 창밖을 좀 보게. 눈이 점점 더 쏟아지는군.
홈즈 : 흠, 오히려 잘됐네. 이 참에 간단히 저녁을 먹고 따뜻한 난로 곁에서 <더 리더>를 읽어보는 게 어떻겠나? 더 풍성한 나눔이 될 것 같은데. 자네가 다 읽을 때까지 나도 다른 책을 읽으면 되니까.
왓슨 : 좋아, 홈즈. 일단 집에 전화 한 통하고...
<왓슨은 11시쯤 되자 책을 내려 놓는다>
왓슨 : 음, 무슨 말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네. 한나가 갇힌 것인지? 미하엘이 갇힌 것인지? 감옥에 갇히고 문맹에 갇힌 건 한나지만 미하엘은 시종일관 감정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를 반복하며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홈즈 : 그렇지, 왓슨. 나 역시나 이 두 주인공 미하엘과 한나의 성적 관계, 문맹과 책읽기, 재판, 그들의 감정 변화가 공간을 바꿔가며 시간 위로 펼쳐질 때 다차원 미로 속을 헤메는 기분이었네.이게 사랑이야긴지, 문맹이야긴지, 역사와 개인사를 다룬 것인지 뭐가뭔지 몰라서 미하엘과 한나가 어딘가에 갇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갇힌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왓슨, 이건 어떤가? 먼저 문맹과 고립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 말일세.
왓슨 : 문맹과 고립의 관계?
홈즈 : 그 관계를 먼저 정리하고 나면 자네와 나도 미하엘과 한나의 미로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네만.
왓슨 : 일단 그 방향으로 가보세. 문맹과 고립의 관계..
홈즈 : 문맹은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것이네. 능력 부재지. 고립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어 사귀지 못하는 것이네.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면 관계의 폭은 아주 좁아질 수 밖에 없는 건 당연하겠지. 그런 점에서 문맹은 고립의 원인이며 고립의 문맹의 결과일세.
왓슨 : 그렇군. 자네가 말한 문맹의 정의를 듣고 보니 문맹의 의미를 확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홈즈 : 그래?
왓슨 : 그렇네. 문맹이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것'이라면 문맹의 의미를 '무언가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확장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논리를 적용한다면 미하엘의 성적(性的) 무지 상태도 확장된 문맹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지 않을까? 미하엘의 성적 무지 상태를 편의상 성맹(性盲)이라 할 수 있다면 이런 성맹의 결과로 미하엘은 이성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 미하엘은 한나와의 관계-육체적 관계를 포함해서-를 통해 이성을 배움으로써 학교에서 이성을 대할 때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치게 되었지. 물론 15살 남자아이가 36살의 성인 여자와 그런 관계를 맺은 것이 세월이 꽤 흐른 아주 나중까지 여유와 자신감을 준 건 아니었지만 말일세.
홈즈 : 오호, 왓슨. 자네 정말 '같은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는 기쁨'을 만끽하게 해주는구만.
왓슨 : 공감해주니 고맙네, 홈즈.
홈즈 : 왓슨, 우리가 문맹과 고립의 관계, 문맹의 의미 확장까지 이르렀으니 이제 문맹을 벗어나는 과정의 이야기길 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난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미하엘과 한나의 힘겨루기가 이어졌다고 생각했네. 그건 어떤 지식의 전수과정, 즉 문맹-확장된 의미의-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 행위를 통해 맺어지는 권력적 종속관계가 아닐까 하고 말일세.
왓슨 : 홈즈, 말이 좀 어렵네. 하하.
홈즈 : 그렇지? 나도 어렵군, 내가 말해 놓고도 말이야. 그러면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 보겠네. <더 리더> 1부에서 미하엘은 한나를 통해 이성에 눈을 뜨게 되네. 한나를 통해 경험적으로 이성을 알게 된 미하엘. 그 지식을 전수한 한나는 그녀가 어떤 힘을 행사했는가에 관계없이 미하엘의 감정과 행위를 완전히 장악했네. 미하엘은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 그렇게 한나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넘겨주었네. 밀고 당기는 건 한나의 마음대로였고. 아마 21살이라는 나이 차이, 10대의 미숙함도 한 몫 했을걸세. 불완전하게나마 성에 대해 알게된 미하엘은 하나의 고립에서 빠져나오는 동시에 또 다른 고립에 빠져버린 셈이지. 한나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또 다른 고립 상태에 이르게 되어 버렸지. 미하엘은 한나와 공유하는 생활이 없었네. 그건 관계를 진전시키는데 있어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한다네. 미하엘은 시간이 많이 흐른 나중에야 한나의 과거를 알게 되었네. 난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의 무지에서 탈출하면 또 하나의 무지가 우리를 고립시킬 수 있다는 걸 배웠네.
왓슨 : 이해가 되는군. 그렇다면 <더 리더>의 2부, 법정에서 다시 만난 한나와 미하엘은 과거의 추억만을 간직한 채 현재의 어떤 유기적 관계도 없는 상태였네. 시간도 꽤 흘렀고해서 둘 사이의 권력관계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미하엘의 감정 상태를 고려해보면 여전히 한나 쪽으로 기울어 있는 상태 아니었을까 싶네. 미하엘은 한나의 갑작스런 증발의 이유가 자신의 배반때문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나중에 그 이유가 문맹을 감추기 위한 도피였다는 걸 알고 나서도 배반의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지.
홈즈 : 이제 힘의 균형이 미하엘 쪽으로 넘어가는 3부의 장면을 볼까? 한나는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네. 문맹을 감추기 위해 감옥에 자신을 감춰버렸지. 이중 잠금장치. 하지만 미하엘은 한나에 대한 죄책감-10대 때 한나를 사랑할 때 단행했던 일종의 배반 행위와 법정에서 문맹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것에 대한-을 조금이라도 벗고자 한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의식 중 하나인 책읽어주기를 다시 시작하네. 이러한 미하엘의 시도는 한나가 문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결국 한나는 그 오랜 세월 동안의 고립에서 탈출하게 되지. 문맹을 벗어나도록 이끈 사람은 미하엘이었으니 이제 미하엘이 힘을 장악하게 된 거야. 그건 한나가 미하엘에게 그랬듯 미하엘도 한나에게 어떤 힘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한나의 감정과 행위를 장악한 거라네. 한나는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면서 미하엘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보다 그의 글씨가 쓰여진 편지를 애타게 기다렸으니까 말이야. 한나 역시 문맹에서는 벗어났지만 미하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미하엘이라는 감옥에 다시 갇혀버리고 말았고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영원히 무덤에 고립되지.
왓슨 : 홈즈, 우리는 지금까지 문맹과 고립의 관계, 문맹의 의미 확장, 문맹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련의 권력배치를 살폈네. 그 와중에 내가 깨달은 한 가지는 글을 깨우쳐 문맹 자체를 벗어나는 것만큼 그 읽고 쓰는 능력으로 삶과 세계를 해석하고 관계를 넓혀가는 일상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지식을 습득해서 고립을 벗어나는 것만큼 그 지식을 활용하여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것 말이야. 미하엘과 한나의 관계처럼 어떤 미성숙의 단계에서 머물지도, 권력적 종속관계로 남아서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홈즈 : 왓슨, 내가 눈여겨 본 것이 또 하나 있네. 그것은 감정도 감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네.
왓슨 : 감정의 감옥? 어떤 감정을 말하는 건가?
홈즈 : 미하엘의 배신에 대한 자괴감, 죄책감, 한나의 열등감과 수치심이지. 이런 감정은 한 인간의 전생애를 피폐하게 만드는 감옥이네. 극복해내기 힘들어. 참, 왓슨, 아까 저녁 먹기전에 했던 자네의 계룡산 MT이야기는 마저 해야지.
왓슨 : 그럴까. 하하. 왜? 궁금한가? 나와 함께 내려왔던 그 친구들하고 나는 그 이전에는 별 친분이 두텁지 않았던 사이였어. 나도 그 친구들도 서로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서로에 대해 문맹 상태였다네. 우린 공간적으로는 산 정상에 고립되어 있었고 심리적으로는 서로에 대해 고립되어 있었지. 길도 보이지 않았던 그 위태위태한 내리막 눈길 속에서 우린 각자 고3 생활, 가족, 졸업 후의 삶 따위를 이야기했다네. 서로에 대한 무지를 벗고 문맹을 탈출해서 친구의 삶을 읽어냈던 순간이었지. 생사를 함께한 전우들 마냥 우린 한동안 그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자랑했어.
홈즈 : 서로의 삶을 읽어 냈다...그렇지. 문맹이 야기하는 가장 큰 손실은 나와 남의 삶을 읽는 능력까지 앗아가버린다는 점이지. 하여간 정말 부러운 추억이군, 왓슨.
(홈즈는 눈내리는 창가에 서서 왓슨을 쳐다보면서 오늘 이 폭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립의 악몽을 가져다 줄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는 친구를 읽어내는 소중한 순간을 만들어 주니 오히려 삶의 고립을 벗어나게 하는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