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시대에 살면서 과학의 힘을 무시하는 만용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학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혜택을 찬양하는 것과 더불어 과학과 과학자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끊임없는 도전과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한 과학자들의 위대함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인류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과학자들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과학이란 무엇이고, 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어떠한지 세밀하게 포착한다.(우희종,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지금까지 가장 많은 인명을 구한 사람은 누구일까? 다소 황당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20세기를 수놓은, 하지만 우리에겐 생소한 최고의 인명 구조원 10명을 찾는 여정이다. 최초로 혈액형을 발견하여 10억8천3백만 명 이상 생명을 구한 카를 란트슈타이너, 인슐린을 찾아내서 1천6백만 명 이상 생명을 구한 프레더릭 밴팅, 홍역/소아마비 백신 개발로 1억1천4백만 명 이상 생명을 구한 존 엔더스 등 저자의 추산에 따르면 이들 10명의 슈퍼 히어로가 구한 생명이 무려 17억 6500만 명이다. 그럼에도 왜 이들은 아인슈타인보다 훨씬 덜 알려진 걸까. 미국을 초토화시킨 천연두를 막아 1억 2200만 명의 목숨을 구한 빌 페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젊은 사람들은 천연두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정말 근사하지 않나요?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정말 행복했어요.” 그렇다. 연구는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본문) 

수십 억은 아니지만 매일 수백 혹은 수천에게 즐거움을 전해주시는 서민(단국대 의대) 선생님의 추천사 전문을 단독 공개한다. 사정상 책에는 한 단락만 실렸다.

 

열정보단 끈기를

김병만이 열연하는 ‘달인’은 개그콘서트의 최장수 인기프로다. 어떤 기발한 코미디도 6개월이 지나면 식상하기 마련인데, ‘달인’은 예외다. 불가능한 분야에 도전해 매번 그걸 이루어 내는 모습이 웃음과 더불어 감동까지 주니, 김병만에겐 ‘달인’이란 호칭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김병만이 연예오락 분야에 쏟는 만큼의 열정을 쏟아 부은, 그래서 인류에게 행복을 선사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어두울 때 아무 생각 없이 켜는 전구는 물론이고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전화기 역시 몇몇 선각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과학 분야에서도 수많은 ‘달인’들이 있었다. 우리가 천연두를 전혀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도, 수술할 때 부작용에 대한 걱정 없이 수혈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분들 덕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수많은 ‘그분’들을 다 알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자기가 좋아서 한 건데 뭐!”라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니까. 다만 이런 생각은 좀 해봄직하다. 인류를 구한 그 수많은 생명과학의 달인들 중 왜 우리나라 사람은 하나도 없을까? 매번 빚만 지고 갚을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 다음, 혹은 다다음 세대에서는 ‘달인’이 나오도록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달인’들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미친 연구, 위대한 발견>은 ‘지금까지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사람은?’이란 주제 아래 열 명의 달인들을, 그들의 삶을 조명했다. 이들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열정
이들에겐 세상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고자, 혹은 세상에 태어났으니 뭐 하나 도움이 되는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예컨대 뉴욕 명문고등학교 출신인 데이비드 날린은 화려한 생활을 뒤로한 채 병마와 싸우러 방글라데시로 간다. 천연두 박멸에 성공한 빌 페이지는 “너무 심한 환자를 보면 공포에 질려 달아나고 싶어”지는 나이지리아에서 일했다. 프레더릭 밴팅은 “당뇨에 대한 생각은 잊고 안정되게 정착해 병원 일에 전념”하라는 약혼녀의 요청을 뿌리쳐야 했다. 여기서 “약혼녀가 별로 안 좋았나 보다” 같은 말은 하지 말자.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자기 팔에 찌를 만큼의 열정을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2) 끈기
선각자적인 일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부딪히는 장벽이 많다. 먼저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 “(스타틴이) 쥐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조금이 아니라 전혀 낮추지 못한 것이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엔도는 실험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4년의 연구와 349번의 실패 끝에 뮐러는 마침내 그의 350번째 화합물인 디페닐 트리클로로에틸 유도체를 파리가 들어 있는 상자 속에 넣었다.” 그 다음으로 기존의 지식이 바뀌는 걸 원치 않는 보수적인 과학계가 있다. 예컨대 “영국의 유명한 의학 잡지 <랜싯(Lancet)> 지의 표지 기사로 실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그 기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표지 기사였는데도.” 심지어 연구를 방해하는 세력도 존재한다. “(상사는) 새로운 실험 계획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계획을 조금 미루고 기술 및 임상연구위원회의 평가를 받아보라고 했다....오랫동안 실험을 미루라는 것은 콜레라 실험을 영원히 접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콜립(밴팅의 동료)은 인슐린을 정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으며, 토론토 대학은 밴팅을 의대 직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는 게 바로 끈기다. 우리나라 연구자들 중에도 열정을 갖고 있는 분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끈기가 부족해 위대한 업적을 내지 못한다. 약간의 장벽만 있어도 “우리나라는 연구환경이...” “미국에 비하면 연구비가...” 같은 말을 하면서 연구를 때려치운다. 우리 교육도 앞으로는 열정보다 끈기를 지향해야 할 텐데,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학원에 잡아놓는 게 그 일환일지 모르겠다.

3) 대가
대단한 연구를 이루고 나면 돈과 명예가 따라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아니다. 예컨대 “빈 대학은 란트슈타이너에게 끝까지 전임 교수 자리를 제의하지 않았다.” 획기적인 콜레스테롤 억제제를 개발한 엔도는 돈을 버는 대신 회사에서 내쫓겼고, 페니실린을 약으로 만든 플로리는 그 명예를 플레밍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간혹 노벨상이 그들에게 보상을 해주긴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그것만은 아니다. 페이지의 말, “젊은 사람들은 천연두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정말 근사하지 않나요?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정말 행복했어요.” 그렇다. 연구는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 우리 교육은 아이들에게 이런 태도를 가르치고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미친 연구, 위대한 발견>을 읽으면 한때나마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건 확실하다. 지금 연구의 일선에 있는 분들, 앞으로 연구를 할 분들도 이 책을 읽어야겠지만, 연구와 관계없는 분들도 이 책의 독자가 됐으면 좋겠다. 연구자에게 있어서 필요한 건 일반 대중들의 지지와 격려고, 위대한 연구의 수혜자는 바로 그들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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