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에서 펴내는 루쉰 전집 번역자, 숭실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공상철 교수의 첫 책 <중국을 만든 책들>, 제목 그대로 중국의 각 시대를 대표하는 텍스트를 선별하여 책이 만들어진 역사, 문화의 맥락을 추적하고 이후 중국 문명사와 중국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는 책입니다. 첫 꼭지는 당연히 갑골문이겠죠. 무늬가 문(文)으로 변한 까닭, 신과 소통하던 언어가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로 바뀐 과정, 더불어 문(文)이 어떻게 문화, 문명의 기반이 되어 꽃을 피웠는지 등 갑골문에 얽힌 이야기를 강의하듯 구성지게 들려줍니다. 남은 꼭지들이 너무 기대되는 책입니다. 게다가 저는 일단 책 이야기라 하면 점수를 주고 들어가는 '책바보'니까요. ^^ 

 

   

세계의 무늬 갑골문(甲骨文)
 

길을 떠납니다. 지금부터 떠나는 이 길은 장장 3천 년 하고도 몇 백 년이 더 되는 ‘중국’이라는 문명사입니다. 이 문명이 걸어간 길, 그 길의 궤적과 굽이를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더듬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가다듬어두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여정이 그리 만만하진 않을 테니까요.
  이 길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시대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꾸었던 꿈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시간의 지층 속에서 이들은 말이 없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리 묵묵할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기행이란 세계에 말을 거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말을 걸지만, 이것이 세계에 접수될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접수되지 못하고 표류하는 말들은 불가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러니 조금은 헐거이 임해도 좋을 일입니다. 어차피 3천 몇 백 년의 시간을 열람해야 한다면, 거기서 꼼꼼한 견문록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테니까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기행의 초입에서 얼마간 예비 점검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소한 이 문명을 특징짓는 기본 원리나 힘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중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단연 ‘문(文)'을 들겠습니다. ‘문’이란 중국 문명을 관통하는 일종의 슈퍼 코드입니다. 이것이 발현되는 과정이 ‘문화(文化)'나 ‘문명(文明)'이란 말의 원래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므로 일단 이것의 의미와 성격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여정은 이 코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체 ‘문’이란 무엇일까요?


태초에 무늬가 있었다고?
문명사를 거슬러가다 보면 거기서 으레 만나게 되는 것은 시간의 오리지널 포인트를 향한 모종의 충동입니다. 흔히 ‘태초’나 ‘창세기’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지는 중국 문명조차 이로부터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살이의 존재론적 근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런데 『논어』를 읽다보면 그것에 무심한 듯한 언설 하나가 등장합니다.
  “하늘이 어디 말을 하더냐!”(『논어』 「양화(陽貨)」)
  헤브루 종족의 하늘에 ‘태초의 말씀’이 울려 퍼지던 무렵, 고대 중국의 하늘은 이처럼 침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무슨 속사정이 있었던 걸까요?
  고대 중국의 하늘은 ‘거룩한 말씀’ 대신 신비한 무늬의 형태로 강림했던 것 같습니다. 동방의 하늘이 보기엔 아무래도 사람의 귀보다는 눈이 더 미더웠던 모양이지요. 전설에 의하면, 어느 날 황하(黃河)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그 등 비늘에 신비로운 무늬가 어른거리고 있었나봅니다. 그로부터 이 무늬에 ‘황하의 도상’, 즉 ‘하도(河圖)'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전설상의 복희씨(伏犧氏)는 이 무늬에 근거해 저 오묘하기 짝이 없는 팔괘(八卦)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어느 날 황하의 지류 낙수(洛水)에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그 등짝에도 신령스런 무늬가 선연했다는 겁니다. 종으로 횡으로 더해도 각각 15가 되고 대각선으로 더해 봐도 15가 되는 이 신기한 무늬를 사람들은 ‘낙수의 그래픽’, 즉 ‘낙서(洛書)'라 불렀고, 하(夏)나라를 연 우(禹(임금은 이 마방진(魔方陣)에 의거해 ‘홍범구주(洪範九疇)'라는 세계 질서 체계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카테고리’의 뜻으로 쓰이는 그 ‘범주(範疇)' 말입니다.
   

중국의 어느 수학자는 지구 문명이 언젠가 다른 행성과 접촉할 때 이 무늬가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것이라 우기고 있지만, 아마도 이 전설은 어떤 신종 담론―음양오행설로 추정되는―을 정당화하기 위해 후인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겁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재미난 것은 ‘도서(圖書)'라는 말이 이 ‘하도낙서(河圖洛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도서’란 세계의 신비한 비밀이 담긴 무늬일 터이고, ‘도서관’이란 그런 무늬가 빼곡히 수장된 장소가 되는 셈인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책에 이런 현묘(玄妙)한 내력이 있었다니 좀 의외입니다. 이 대목에서 문득 어떤 이미지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보르헤스(L. Borges)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묘사한 ‘육각형의 진열실들로 구성’된 ‘세계’라는 이름의 거대한 도서관 같은 것 말입니다.


갑골문의 발견
사실 이 도서관의 유래에 대해 우리는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장서는 얼마나 되는지, 언제 누구에 의해 쓰이게 되었는지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풍문은 익히 들은 바가 있습니다. 도서관에 수장된 책의 종류가 의외로 다양하다는 것, 우리가 보는 종이책은 비교적 후대에 나왔다는 것, 초기의 책은 목간(木簡) 이나 죽간(竹簡)을 엮어 만들었다는 것, 여기서 책(冊)이라는 글자가 나왔다는 것, 또 어떤 책은 청동기나 비단 위에 쓰여 있다는 것 등등 말입니다. 여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적어도 그날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책 무더기가 저 깊숙한 지하 세계에 감추어져 있었을 줄 말입니다. 거북딱지나 물소 뼈에 새겨진 이 책들은 이로부터 갑골문(甲骨文)으로 명명되어 중국사의 연대기를 훌쩍 앞당겨놓고 말았습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상(商)나라―혹은 은(殷)나라로 불리는 기원전 1700년경에서 기원전 1100년경까지 존재한 왕조―의 실체가 이로부터 빛을 보게 되었으니까요.
  그 발견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지금부터 1백여 년 전인 1899년, 북경에 왕의영(王懿榮)이라는 한 관리가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가 학질에 걸려 여기에 좋다는 거북의 골편(骨片, 뼛조각)을 대거 사들였는데, 마침 그 집에 식객으로 있던 유철운(劉鐵雲)이라는 자가 거기서 이상한 글자들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에게 보인 모양입니다. 평소 고대 문자 해석에 일가견이 있던 왕의영은 그 글자들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상나라 문자가 거기에 빼곡히 새겨져 있었으니까요. 이리하여 그것을 구입한 한의원을 통해 골편의 출처를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문은 금세 퍼져 골편의 출원지 안양(安養) 소둔촌(小屯村)에선 일대 난리가 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나라의 마지막 도읍 은허(殷墟)가 바로 거기였다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해외로의 밀반출은 물론 위조품까지 대량 유통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출토된 골편의 수가 무려 16만여 개에 이르렀습니다.
  갑골문의 대부분은 복사(卜辭)입니다. 복사란 상나라 말기 12명의 왕이 통치하던 273년 동안 가국(家國)의 대소사를 점친 기록입니다. 선왕에 대한 제사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전쟁이나 자연현상, 재해 등등 그 내용은 다양합니다. 문명 초기의 형편상 하늘의 의사를 묻는 일은 지고至高의 가치였을 겁니다. 이 일의 중요성은 점에 쓰이는 거북 껍데기를 구하기 위해 거국적인 시스템이 작동되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골편에는 남방으로부터 거북이 천 마리를 공납받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요. 이런 식으로 사용된 거북이가 최소 1만 6천 마리, 물소는 몇 천 마리라는 게 학계의 통론인데,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비추어보면 이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러면 점은 누가, 어떻게 친 것일까요? 당시엔 점을 치는 직책을 일러 정인(貞人)이라 했는데, 간혹 왕이 직접 주관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점술의 중요성에 따라 정인의 숫자도 늘어났는데, 학자들에 의해 이름이 확인된 사람만 해도 120여 명에 이릅니다. 점술 과정은 거북점의 경우 대체로 이랬습니다. 먼저 배딱지를 떼어낸 뒤 가운데 난 수직선을 기준 삼아 내장이 있던 안쪽 면 양편으로 가지런하게 홈을 팝니다. 껍질이 두껍다보니 열에 잘 갈라지게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겁니다. 홈은 두 가지 모양입니다. 먼저 대추씨 모양의 홈을 파고(‘착’鑿) 거기에 약간 겹치게 둥근 모양의 홈을 다시 파는데(‘찬’鑽) 그리하여 홈의 형태는 중절모 모양이 됩니다. 이런 홈이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많게는 수십 개나 패어 있습니다. 거북 껍질이 워낙 귀하다보니 사용 효율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것이겠지요.
  이제 점을 칩니다. 점이라고 해야 나무 꼬챙이를 불에 달구어 홈에다 대고 지지는 게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지지는 건 아닙니다. 점칠 내용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소리에 담아 표출하기도 했겠지요. 이윽고 달구어진 부분이 ‘퍽’ 하며 갈라지는데, 혹자는 이 소리에서 ‘복(卜)’자가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균열은 으레 두 방향으로 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유도하기 위해 이중으로 홈을 판 것이니까요. ‘착’에선 수직선이 나오고 ‘찬’에선 수평선이 나옵니다. 그리하여 대개 ‘ㅏ’ 아니면 ‘ㅓ’ 모양의 균열이 드러나는데, 물론 뼈의 자연적인 결을 따라 미세한 차이가 발생했겠지요. 이 기본 형태와 미세한 차이가 곧 하늘의 응답인 셈입니다.
  점이 끝나면 배딱지 바깥 면에 ① 점친 날짜와 정인의 이름, ② 점의 내용, ③ 갈라진 무늬를 보고 길흉을 판단한 내용, ④ 점괘가 실현되었는지 여부 등을 새기는데, 앞의 두 항목만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마지막 항목은 점괘가 그대로 실행되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한 뒤 추가로 기록한 것인데, 그리 많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것으로 점이 완료됩니다. 그러고는 이 골편을 특정 장소에 한데 모아 보관하고 관리했을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국가문서관리국에 기밀문서를 보관하거나 국립중앙도서관에 자료를 수장해두는 개념이었겠지요. 주로 갑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도 아마 이런 까닭이었을 겁니다.


신의 언어들
그런데 여기서 정작 흥미로운 것은 해석 문제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지요. 골편에 나타난 무늬는 어디까지나 하늘의 소관입니다. 그것은 뼈의 강도와 결에 따라 달랐을 것이고, 홈의 각도와 꼬챙이의 열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이었겠지요. 그러니 같은 사안이라 해도 매번 무늬가 달랐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석하는 일은 엄연히 왕이나 정인의 몫입니다. 설령 그들이 하늘과 교통하는 능력을 지녔다 해도 어디까지나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그가 신의 의사를 판명한다고 할 때, 어떻게 자의와 주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든 해석은 사람의 숨결이 투사된 지극히 인간적인 해석일 수밖에 없겠지요. 동일한 사안에 대해 한 번의 점으로 끝나지 않고 몇 번씩 반복되었던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언젠가 TV를 보니 이런 장면이 나오더군요. 어느 오지의 원주민들은 벌꿀 채취를 생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날은 천 길 낭떠러지에 매달린 벌집을 털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산의 신으로부터 작업 허가를 받아내는 방식이 재밌습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희생(犧牲)으로 끌고 간 양의 몸에 경건히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고는 둥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기다립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이윽고 양이 세차게 몸을 흔들면서 기름을 털어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비로소 작업에 들어갑니다. 신이 이 위험천만한 작업을 허락했다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양이 제 몸에 묻은 기름을 털어내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를 신의 뜻으로 여기고 태연히 외줄 하나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골편에 드러난 하늘의 의사를 해석하는 일 역시 이런 차원이었을 겁니다. 해석학이라는 학문도 따지고 보면 그 출발은 이랬으니까요.
  그런데 고대인의 해석학에도 제법 노회한 구석은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그냥 일방적으로 물어서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꽤나 신중합니다. 먼저 긍정적인 방식으로 넌지시 물어봅니다. 그러고는 같은 사안을 다시 부정적인 방식으로 되물어봅니다. 상당히 교묘한 방식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그러면 신의 의사를 좀 더 주밀(周密)하고 분명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요? 아니면 신을 헷갈리게 만들어서 소망하는 대답을 얻고자 했던 걸까요? 다음 사례를 통해 판단해보시지요.

戊戌卜, 永貞.(무술일에 점을 치며 영이 묻습니다.)
今日, 其夕風?.(오늘 저녁에 장차 바람이 불겠습니까?)
貞 : 今日, 不夕風(묻습니다. 오늘 저녁에 바람이 불지 않겠습니까?)3
戊子卜, 貞.(무자일에 점을 치며 각이 묻습니다.)
帝及四夕, 令雨?(상제께서 나흘 뒤 저녁에 이르러 비에게 명령하시겠습니까?)
貞 : 帝弗其令今四夕, 令雨?(묻습니다. 상제께서 지금부터 나흘 뒤 저녁에 비에게 명령하지 않으시겠습니까?)
王占曰 : 丁雨, 不惠辛.(왕이 점괘를 해석하십니다. 정일에 비가 온다. 꼭 신일이진 않을 것이다.)
旬丁酉, 允雨.(열흘 뒤인 정유일에 정말로 비가 왔다.)4
이런 방식만 있는 게 아닙니다. 좀 더 직접적인 전략도 있습니다. 신더러 제발 대답을 좀 해달라고 들들 볶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다음의 사례를 보면 그 윽박지름의 정도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동방의 신들도 인간들에게 닦달을 당하느라 꽤나 피곤했을 듯합니다.
貞 : 亥王入.(묻습니다. 신해일에 왕이 들어옵니까?)
于癸丑入.(계축일에 들어옵니까?)
于甲寅入.(갑인일에 들어옵니까?)
于乙卯入.(을묘일에 들어옵니까?)5
更子卜, 何貞 : 翊辛丑, 其侑틌辛, 卿.(경자일에 점을 치며 하何가 묻습니다. 다음날 신축일에 신辛 할머니께 유제侑祭를 경제卿祭로 지낼까요?)
更子卜, 何貞 : 其一牛.(경자일에 점을 치며 하가 묻습니다. 소 한 마리로 할까요?)
更子卜, 何貞 : 其.(경자일에 점을 치며 하가 묻습니다. 희생양으로 할까요?)
……
丙午卜, 何貞 : 其.(병오일에 점을 쳤는데, 하가 묻습니다. 희생양으로 할까요?)
丙午卜, 何貞 : 其三.(병오일에 점을 치며 하가 묻습니다. 희생양 세 마리로 할까요?)


문명과 문자
위의 사례를 통해 감지되는 것은 하늘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종의 놀이입니다. 서로 주고받고 밀고 당기고 다투고 화해하는 그런 우주론적 놀이 말입니다. 문명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점차 신이 신성(神性)을 박탈당해왔음을 이야기해줍니다. 상(商)나라의 ‘제(帝)'는 그 자체로 신이었고, 주(周(나라의 ‘천(天)'은 그 자체로 하늘이었습니다. 그런데 전국(戰國) 시대 말엽에 이르면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공자의 일갈(一喝)은 그 전조이자 서막이었던 셈입니다. 이제 하늘은 늘 땅을 짝으로 요청하게 되었고, 그 결과 ‘천지(天地)'라는 신종 담론이 대두하게 됩니다. 훗날 한(漢) 제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는 이 담론은 자연히 천지지간에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사람에겐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역할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른바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가)' 이런 관념의 발로였으니, 인격신의 관념이 부재한 상황에서 사람에게 무게중심이 쏠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문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선 한창 신의 의지를 인간화된 무늬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은밀히 수행되고 있었던 거지요. 히브리 사막에 바벨탑이 고도를 더해가던 그 무렵에 말입니다. 이 작업의 고도화된 형태가 바로 상형문자였습니다. 갑골에 새겨져 있던 그 무늬들 말입니다.
  지상의 인간들이 이처럼 독자적 질서를 구축해가고 있을 무렵, 동방의 하늘에선 우려의 목소리와 탄식의 씩둑거림이 꽤나 무성했던 모양입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황제(黃帝)의 사관(史官) “창힐이 문자를 만들자 하늘이 곡식을 뿌렸고 귀신은 통곡했다”(『회남자(淮南子)』「본경훈(本經訓)」)는 겁니다. 귀신의 통곡은 지상에서 더 이상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회한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곡식은 왜 쏟아졌던 것일까요? 그런데 주석을 보면 귀신이 통곡한 이유는 회한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창힐은 처음으로 새의 발자국 모양을 보고 서계(書契)를 만들었다. 그러자 사기와 허위가 생겨났다. 사기와 허위가 생겨나자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뒤쫓으며, 농사를 버리고 송곳과 칼을 날카롭게 연마하는 데 힘을 쏟게 되었다. 하늘은 인간이 굶주리게 될 것을 알고서 곡식을 뿌렸다. 귀신은 문서로 탄핵받을까 두려워 밤새 울었다.”
  서계, 즉 문자가 생겨나자 기만과 사기술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에 의한 귀신 경영까지 가능하게 되었다는 이 해석은, ‘문명(文明)'이나 ‘문화(文化)'란 것의 본질을 다소 민망하게 짚어줍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문명과 문화에 공히 밑받침되어 있는 ‘문(文)'이라는 글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문이란 무엇인가
“文은 종횡으로 얽힌 무늬다.”(文錯畵也)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사전은 ‘文’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고대 기물에서 이 글자는 주로 두 팔을 벌린 사람의 가슴에 어떤 문양이 그려진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때의 문양으로는 ×, ∨ 형태가 일부 있고 대개는 남성의 심벌 모양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지금껏 의론이 분분합니다. 다만 ‘文’이 “사자(死者)의 미칭(美稱)으로 쓰였으며, 살아 있는 사람을 찬미하는 데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혈액을 따라 빠져나간다는 당시의 믿음을 고려할 때, 시신의 가슴에 그려진 붉은 무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는 영적 교류의 양식이자 이별의 양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의 ‘글월 문(文)’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일까요?
  비근한 사례들을 통해 이 점을 한번 생각해볼까요. 쉽게 이야기하면 요즘 유행하는 QR 코드 같은 걸 떠올리면 됩니다. QR 코드란 흑백의 격자무늬 패턴으로 정보를 나타내는 이차원 무늬의 그물이지요. 이 그물 속에 넣고 싶은 기본 정보를 다 넣을 수 있습니다.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상징하는 이 코드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의외로 대단히 아날로그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묘하게 신학적인 충동마저 들기도 합니다. 흡사 ‘하늘을 떠다니는 거대한 전자두뇌’ 같다고나 할까요. 이것의 어떤 측면이 이런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무늬’의 우주론적인 성격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걸 사람의 몸에 새겨보면 어떨까요? 이것이 바로 문신(文身)입니다.
  문신도 일종의 무늬입니다. 요즘은 일회용 문신도 있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고대 사회에서는 장식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잔재는 아직도 ‘어깨’와 ‘덩치’ 들의 팔뚝이나 등짝에 남아 있거니와, 거기서도 왜 유독 호랑이와 용이 단골 메뉴가 되었는지에 대해선 굳이 부연치 않아도 좋을 겁니다. 무력의 신성성을 강변하고 싶었을 테니까요. 부적 역시 무늬의 일종입니다. 누런 바탕에 빨간 선의 이 무늬는 과학이라는 잣대에 의해 상당 부분 그 의미가 미신의 영역으로 추방되고 말았지만, 아직도 일부 식당의 문지방 위나 누군가의 지갑 속에서 풍요와 안녕의 염念을 담고 있는 걸 보면, 우리 시대 문화의 한 양식임을 거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매년 입시철이 되면 이웃 나라에서 벌어지는 부적 열기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도장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날엔 서양식 사인 문화가 대세를 이루면서 인감 폐지론이 대두되기도 하지만, ‘둥근 도장에 붉은 인주’라는 관념은 아직도 생활세계 곳곳에 건재합니다. (따지고 보면 사인 역시 ‘신의 지문’인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보지요. 한글 도장과 한자 도장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그 사람의 존재성을 온전히 담아낼까요? 아마 대부분은 후자라고 할 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흔히 ‘도장체’라 부르는 이 문자는 진(秦)나라 공식 문자인 소전(小篆)인데, 상형문자에서 기호의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한 형태입니다. 바로 다음에 정립되는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에 비해 회화적 성격이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런 만큼 그 주름에 존재의 흔적이 훨씬 더 진하게 각인되어 있을 거라는 믿음은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요. 한글 도장이 왠지 밍밍하고 심심해 보이는 이유도 이 흔적의 결핍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명함만은 기어이 한자를 고집하는 기성세대의 취향을 시대착오라고 나무랄 일만은 아닙니다. 일종의 고전적 형태의 아바타(avatar)니까요.


문의 분화 양상
이런 점은 ‘文’의 의미 분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문자의 역사에서 ‘文’은 ‘紋’과 ‘彣’이라는 글자를 파생시키는데, 모두 ‘무늬’라는 뜻입니다. 다만 앞의 무늬에는 실이, 뒤의 무늬에는 깃털이 추가되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그 의미가 대개 ‘질서’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후자는 대개 ‘권력’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먼저 실이 갖는 맥락을 따라가볼까요. 원시 방직술의 기본 형태는 먼저 날실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그 끝에 방추차를 매단 다음 가로로 씨실을 얽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날실은 ‘경(經)'으로 씨실은 ‘위(緯)'로 불렸는데, 그러니까 경위란 직물이 만들어지기 위한 기본 얼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얼개는 왠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에도 경서(經書)가 있고 위서(緯書)가 있는가 하면, 세계지도를 지탱하고 있는 두 축이 바로 경선(經線)과 위선(緯線)입니다. 왜 이런 계열적 질서가 만들어진 걸까요? 여기서 수직선인 ‘경’이 왜 ‘바이블’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지, 수평선인 ‘위’보다 왜 가치론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미루어두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서양 문명 역시 글을 의미하는 ‘text’가 직물을 의미하는 ‘texture’와 같은 의미 계열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만은 짚어두기로 하지요.
  한편 깃털의 의미도 가볍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정치적 군장을 의미하는 ‘왕(王)'은 머리에 쓴 깃털 모자를 본 뜬 글자로도 해석되는데, 이때의 머리 장식은 그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인디언 추장의 깃털 모자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오늘날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미(美)' 자 역시 사람(大)이 양가죽(羊)을 뒤집어쓴 모습이었으니까요. 중국 운남(雲南) 지방에 남아 있는 어느 암각화는 원시 마을의 일상과 권력관계를 생생히 보여주는데, 여기서 모자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에 정확히 비례합니다. 게다가 문명이 만개하면 할수록 모자는 더 크고 화려해지는데, 그리하여 마침내 ‘황’皇이라는 대형 모자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모자에 ‘황제’라는 의미를 덧씌운 사람이 진(秦) 시황제(始皇帝)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런 식으로 빛나는 무늬는 하늘과 인간 세계를 매개하는 권능을 상징하게 되었고, 이 상징은 곧바로 현실 정치권력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엔 이 일련의 의미를 ‘문창(彣彰)'이라는 말로 포괄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彣彰’에서 오른편의 깃털을 떼어내어 보다 인간화된 무늬로 만드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장(文章)', 즉 우리가 쓰는 글이었던 것입니다.


인문의 자리
위진남북조 시대를 살았던 유협이라는 사람은 『문심조룡(文心雕龍)』이라는 최초의 문학 개론을 쓰면서 그 첫 문장을 이런 묘사로 시작합니다.
  무늬(文)의 속성은 지극히 포괄적이다. 그것은 천지(天地)와 함께 생겨났다. 어째서 그런가? 천지가 생겨나자 이어 검고 누름(玄黃)의 구분이 생겨났고, 둥글고 네모남(圓方)의 구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해와 달은 하얀 옥을 겹쳐놓은 것과 같아 하늘에 붙어 있는 형상을 나타내고, 산천은 비단에 새긴 자수와도 같아 땅에 펼쳐진 형상을 나타낸다. 이 모든 것들은 대자연의 무늬다. 위를 쳐다보면 해와 달이 빛을 발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과 강이 아름다운 무늬처럼 펼쳐져 있으니, 이는 위아래가 확정된 것으로, 이로써 천지가 생겨난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어울릴 수 있으며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이들을 삼재(三才)라 부른다. 인간은 오행(五行)의 정화요 천지의 마음이다. 마음이 생겨나면서 언어가 확립되었고, 언어가 확립되면서 문장이 분명해진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 그러한 이치(自然之道)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이 세상 만물에 확대해보면, 동식물은 모두 나름의 아름다운 색채와 모양을 가지고 있다. 용과 봉황은 아름다운 무늬와 색채를 통해 상서로움을 나타내고, 호랑이와 표범은 그 얼룩덜룩한 무늬와 색채를 통해 위엄스런 풍채를 드러낸다. 구름과 노을에 새겨진 화려한 색채는 화가의 교묘한 채색보다 더 뛰어나고, 초목의 꽃들은 굳이 자수 기술자의 신비한 솜씨를 빌리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 모든 것들은 외부에서 가해진 장식이 아니다. 모두 저절로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의식이 전혀 없는 사물들에도 이토록 무늬가 찬란하거늘 마음을 지닌 인간에게 어찌 무늬(文)가 없겠는가.(『문심조룡』 「원도(原道)」)
  이는 고대 문화사의 성장에 관한 아름다운 증언이자 유협이 살았던 위진남북조 시대의 세계지도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혼돈의 세상 속에서 꿈꾼 이념적 지도입니다. 그는 이런 무늬의 네트워크 속에 자신이 살아가는 난세를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글(文章)의 존재론적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의식이 전혀 없는 사물들에도 이토록 무늬가 찬란하거늘 마음을 지닌 인간에게 어찌 무늬가 없겠는가.”
  그러므로 이 한마디는 사람의 무늬, 즉 ‘인문(人文)’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고심에 찬 모색이자 모험이었습니다.
  유협 시대의 이 무늬의 네트워크는, 송나라 때에 이르면 ‘리(理)’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개편을 맞이합니다. 흔히 우리가 ‘이치(理致)’, ‘도리(道理)’, ‘진리(眞理)’라고 할 때의 ‘리(理)’가 그것인데, 원래는 옥을 가공하기 전에 옥 자체의 결을 면밀히 살핀다는 의미였습니다. 흔히 ‘물결’, ‘살결’, ‘숨결’ 할 때의 ‘결’이 딱 이 의미입니다. 송나라 신진 사대부들은 이 ‘리’를 절대적 진리(天理)의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질서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동아시아 중세사에서 6백여 년간 누린 영광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제 ‘문리(文理)’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 문명사에서 천문―인문―지리라는 우주론적 네트워크의 위상과 의미에 대해서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의 무늬(天文)와 땅의 결(地理), 이를 사람의 무늬(人文)로 매개하고 전환하려는 모색의 과정이 곧 중국 문명이 걸어간 길인 것입니다.
  이 모색이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떼던 그 지점에 무수한 뼈 무더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늘의 의지를 아로새겨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대 중국의 문명사는 이들의 삶과 염원으로부터 성큼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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