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모습은 기복과 호국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전자는 개인적 차원에서, 후자는 사회적 차원에서 그러하다. 온전한 불교 정신을 절이 아닌 세상에서 삶으로 구현하려 시도하는 순간 불교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공격받기 일쑤다. 과연 붓다와 제자들이 만들고자 한 세상이 이러했을까. 박노자는 이런 한국 불교에 일침을 던지며 아집을 부정하고, 여기(아집)에서 비롯하는 국가, 자본주의, 제국을 해체하는 실천적 불교를 제안한다. 이는 초기 불교 정신에 대한 '해방적' 해석이자,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참 역할을 되살리는 시도다. 언제나 '아, 우리가 이렇게 사는구나' 하는 감각을 명징한 논리로 깨우치는 박노자의 신작 <붓다를 죽인 부처>. 서문과 본문 일부를 공개한다.

 

 

서언 : 해방불교를 위하여!

대개 특정 종교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종교의 교리도 실천도 결국 해석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독교를 봐도 “재판관에게 가지 마라”, “부자가 낙원에 드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기보다 더 어렵다”, “땅에서 재물을 모으지 마라”와 같은 일종의 ‘고대형(型) 공산주의’를 방불케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쪽과,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와 같은 부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쪽은 분명히 다르다.

전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레오나르도 보프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 신학’으로 귀결될 수 있겠고, 후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부자를 ‘축복받은 이’로 보는 순복음 교회 식 ‘부와 성공의 신학’으로 귀결될 수 있겠다. 해방 신학도 순복음 교회의 기복적인 성공 주의도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을 각자 나름대로 계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과는 상반된 것임이 틀림없다. 그만큼 종교를 이해하는 데 기본 경전 이상으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해석’이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다. 우리 불교가 국가 내지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역사가 이미 2,000년을 슬쩍 넘은 만큼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불교는 현실을 따라가며 인정하는 식이거나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띤다. 개인의 문제들을 모조리 개인의 악업으로 설명하는 등 탈(脱)사회화, 개별화되었고, 그 문제의 해결책 역시 개인적 차원의 ‘업장(業障) 소멸’에 그친다. 이렇다 보니 불교 하면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고 복을 비는 모습부터 떠올리게 된다. 이런 현실 순응적, 개인 중심의 불교에서는 작복(作福), 즉 선업 쌓기도 결국 개인적 수행이나 신앙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또한 불교의 대(對)사회적 측면 역시 현실을 무조건 긍정하고 재확인하는 ‘국가 수호’, 즉 소위 ‘호국’에 국한되고 만다. 그들에게는 ‘대입 기도’로 고생하는 학부모들도, 서울 삼각산 도선사 명부전에서 걸려 있는 고 박정희 부부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초상화도 별문제 될 것이 없다. 입시 경쟁도 개인의 신앙 행위(기도)를 통해서 해결될 문제고, 권력이나 재력을 장악한 사람도 “선업을 잘 쌓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긍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서 미군의 폭격을 받아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간 죄 없는 아이들을 생각해 보자. 그 아이들이 당한 고통을 두고 스스로 지은 ‘악업’의 결과일 뿐이라 말하며 은근히 워싱턴의 살인마들에게 면죄부를 건네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혹은 입시 경쟁이라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대한민국의 아들딸들을 두고 “악업을 지은 결과”라 정당화하면서, 고액 과외를 받은 강남 자녀의 ‘무사 통과’에는 “선업을 잘 쌓은 결과”라며 박수를 보내야 하는가?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살인마들의 살육도, 소수 부유층 사이의 명문대 간판 대물림도 영구화되고 또 다른 이름 모를 무수한 타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끊임없이 안겨줄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일체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음)인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고통을 영구화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원적 목표와 상반된다. 고통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고통을 이해한다면 이는 ‘나’와 우리 모두의 해탈을 궁극적으로 방해할 뿐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발생시키고 강화시키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나에 대한 집착인 아집(我執), 즉 ‘나’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가 별개의 것이라는 뭇 중생의 착각이다. 이 착각만큼 반(反)불교적인 것도 없다. 나와 너, 세계가 따로 없으며 모든 것이 상즉상입(相即相入: 모든 현상은 상호 융합되어 있고 인과관계를 이룸)한다는 불교적 진리의 차원에서는 머나먼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어간 아이들도 바로 우리고, 그들이 겪는 고통도 바로 우리의 고통이다.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개인의 악업으로 인한 결과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만든 집단적 악업의 업보(業報)다. 인류가 아직도 제국주의라는 괴물을 청산하지 못하고 합리화하고 순응한 결과, 이 괴물은 지금 아프간이라는 머나먼 지구의 한구석에서 우리들의 분신(分身)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입시 경쟁이라는 이름의 지옥도 경쟁의 당사자인 학생 개개인과 학부모들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철저한 위계서열을 받아들이고 그 서열을 매기는 기준으로 학벌 자본(academic capital)을 받아들인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결과다.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집단적 악업인 셈이다. 이 악업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불교적 실천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불교적 실천이란 결국 ‘국가 수호’의 정반대라고 할 우리의 아상․아집에 대한 부정 및 해체며, 거기서 시작되는 국가와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 및 해체의 작업이다. 이것이야말로 중생이 겪는 수많은 고통의 상당 부분을 덜어줄 수 있는 집단적 치유의 길이며 집단적 선업을 쌓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해탈과 병행될 수 있는 ‘더불어 하는 수행’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지구와 사회의 세포 하나하나를 갉아먹는 암(癌)과 같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폐해에 대항해 혁명적 투쟁을 벌이는 것도 집단 전체를 위한 해탈의 경험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혁명이 어려운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는 우리의 해방을 준비하는 모든 행위가 집단적 치유를 위한 길이라 할 수 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다거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고 읽는 등의 지적 작업 역시 집단적 해탈을 향한 수행의 일종이라 하겠다.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반대로 어쩌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행동에 동참하며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멀어지는 법을 배우고, ‘남’을 나 자신보다 앞에 두며 나보다 타인을 더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바로 여기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선이 지워지고, 우리의 ‘자아’가 궁극적으로 망상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자아도 타자도 궁극에 가서는 없으며 나만의 행복도 나만의 해탈도 무의미하게 된다. 하화중생(下化衆生: 중생을 교화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깨달음도 이기적인 정신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이 나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불교의 영혼은 도망가고 없다.

‘해방 불교’에는 사찰도 불상도 기도도 필요 없거나 이차적이다. 해방 불교는 부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이다.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 임하고, 고통의 원인을 파헤치며 모든 중생과 함께 고통을 치유한다. 고통의 원인을 식별하고 치유하는 방법은 우리가 현대를 사는 한 오늘날의 사회과학에 의존하지 않을 순 없다. 그러나 이 작업의 근저에 흐르는 정신은 지난 2,500년 동안 바뀐 게 없다. 자아의 경계선을 넘는 자비의 정신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다. 

  

9장. 한국불교, 전통이 아니라 시대를 만나라

해방적 색깔에서 방편론으로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으로 보면, 오늘날의 폭력적인 현실은 과거의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업설’이나 최악(最惡)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방편적으로 ‘차악(次惡)’을 임시적으로 인정해 이용하는 지혜는 분명히 불교의 태생적인 장점일 수 있다. 그런데 단점은 바로 이런 장점의 연장에 있다.

인도의 종교문화 풍토에서 수행자는 보통 특권계급 출신이며, 전사회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 아울러 국가·지배체제는 사회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정신적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이런 풍토에서 현실을 방편적으로 수용할 것을 전제로 한 종교운동은 국가·지배체제와 유착할 여지를 언제든지 갖고 있었다. 문제는 그 운동을 지휘하는 ‘스승’의 의지였다.

붓다 자신과 일부의 직계 제자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일부 수행자들은 불평등과 폭력이 없는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은 속인(俗人)들이 불평등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염원했다. 초기 불교를 보면 그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해방적 색깔’이 뚜렷하다. 바로 이 ‘해방적 색깔’은 불교가 민중들로부터 빠르게 인기를 얻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에의 의지’를 갖고 있던 초기 지도자들이 사라진 뒤에는, 현실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방편론’ 등이 불교가 발빠르게 ‘국가 종교화’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부턴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불교 교단의 현실에 대한 순응 형태가 바뀌었을 뿐, 그 이론적인 ‘뼈대’는 그대로 이어졌다. 법현 등 중국 구법승求法僧들이 목격한 소작인들을 부리는 부유한 인도 사찰의 권위주의적 승려들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초호화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사찰의 고용자들에겐 노조조차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한국 스님들도 외형적인 모습은 다를지언정 그 생활태도나 이론적인 토대는 같다.


 

불교의 원칙대로

국가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해,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진실한 불자다운 실천까지 불인(不認)하는 승단(僧團)의 태도를 고치려면 재가 신도로서 어떤 마음가짐과 이론적인 기반을 갖춰야 할까? 오늘날 서구에서 “교황보다 더 독실한 가톨릭(More Catholic than the Pope)”이란 말은 지나친 종교 열(熱)을 조소하는 속담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붓다 후대의 제자는 어떤 면에서 붓다 자신보다도 붓다가 제시한 근본 원칙에 충실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붓다가 제시한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무엇일까?

불교의 ‘제법무상(諸法無常)’은 우주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쉴 새 없이 달라지고 바뀌고 탈바꿈하는 만큼, 불변하며 고정된 대상물이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무아(無我)’는 ‘나’라고 보이는 주체 역시 갖가지 요소와 인연이 일시적으로 합쳐져 만들어진 늘 고통받고 바뀌어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둘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이자 원리다.

주체와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인연’에 따라 늘 유동적으로 바뀌면서도 고통을 면하기 어려운 속세에서는 누구의 이름으로도 자신과 남에게 추가적인 고통을 안겨주어선 안 된다. 어떤 국가, 단체, 운동이 ‘폭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결국 언젠가 그들의 이념이 허구였음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으로 세상에 새로운 고통을 추가시킨 행위는 ‘나쁜 원인(惡因)’이 되어 폭력행위자를 비롯해 모두에게 ‘나쁜 결과(惡果)’를 가져다줄 것이다. 수탈기구로부터의 민중 방어라는, 특정 상황에서 진보운동가들이 피하기 어려운 ‘민중 방어적 폭력’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차악은 될 수 있을망정 선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방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더라도 그 폭력의 나쁜 결과를 인식하고 이를 중지시켜 비폭력적으로 대체 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아야 할 것이다.

‘민중 방어적 폭력’도 나쁜 원인을 피하기 위해 출구를 급히 구해야 하는 ‘길이 막힌 골목’이지만, 자본이 부추기는 경쟁이나 국가가 유지시키고 훈련시키는 군대와 같은 억압적인 상설 폭력기구들은 ‘나쁜 원인’ 이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국가(특히 군대 당국)와 자본 등 사회적 고통을 제공하는 자들과의 유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교는 죽은 불교다. 그리고 “어머니가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는 붓다의 말씀을 실천할 하등의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불교 역시 죽은 불교다.

붓다가 기존 사회질서와 타협한 부분, 현실에 순응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은 붓다가 살았던 시대의 한계이자 귀족 출신 남성으로 태어난 붓다 자신의 한계다. 이 한계가 붓다의 기본 교리와 충돌할 경우 우리는 근본 교리의 정신을 선택해, ‘악의 씨’이며 제도화된 폭력으로 기능하는 국가나 소외된 노동을 잉태하는 자본에 대해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 명분과 필요가 있다. 불교 교단이 붓다의 원리를 진실로 실천하려면, 양심적 병역거부, 붓다 자신도 평등한 분배의 전제 조건으로 주장한 부유세 도입, 고질적 불안감이라는 최악의 고통을 심어주는 고용의 비정규화에 대한 반대 투쟁과 대책을 적극 지지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 아힘사(비폭력)는 자본주의적 국가 사회의 제도화된 폭력을 무저항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불교의 아힘사는 제도화된 폭력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이다. 붓다와 그 후대의 제자들이 이와 같은 투쟁을 소홀히 하거나 아예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정신과 가르침을 배반하는 그들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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