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인 박웅현은 전작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서 "광고라는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통하는 방법을 찾을 때 창의력이 필요한 거고요."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이번 책 <책은 도끼다>는 그 창의력의 근간인 독서를 다룬다. 고은의 시부터 톨스토이의 고전까지, 다채로운 텍스트 읽기 속에서 '보는 눈'을 확장하는 그만의 방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사고와 태도에 변화를 주지 못하는 독서는 책과 나를 동시에 죽이는 독서라 말한다. 이 책은 죽은 독서를 쳐내고 갇힌 생각을 열어주는 강력한 도끼질이라 하겠다.
광고인은 자본주의 시대의 시인일 터, 이들이 세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방법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장 처절하게 체득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슬프지만,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저자의 말
울림의 공유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내가 읽은 책들은 나의 도끼였다. 나의 얼어붙은 감성을 깨뜨리고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도끼. 도끼 자국들은 내 머릿속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어찌 잊겠는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쩌렁쩌렁 울리던, 그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얼음이 깨진 곳에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촉수가 예민해진 것이다.
“콩나물 줄기 속에 물기가 가득하구나!”
“단풍잎의 전성기는 연두색이구나!”
“그 사람의 그 표정이 그런 의미였구나!”
그 예민해진 촉수가 내 생업을 도왔다. 많은 경우, 광고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회의실에서 예민해진 촉수는 내가 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나의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했다. 신록(新綠)에 몸을 떨었고, 빗방울의 연주에 흥이 났다. 남들의 행동에 좀더 관대해졌고, 늘어나는 주름살이 편안해졌다.
머릿속 도끼질의 흔적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경기창조학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11년 2월 12일부터 6월 25일까지 강독회를 진행하게 됐고, 학생들과 삼 주마다 한 번씩 토요일에 만났다. 냉정한 겨울에서 찬란한 봄을 거쳐 맹렬한 초여름까지, 나의 도끼였던 책들과 나의 독법(讀法)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어차피 독법에 정답은 있을 수 없는 것. 그저 나의 독법일 뿐이었다.
종이 낭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무릅쓰고 그 강독을 이렇게 책으로 묶어내는 이유는, 이 책이 다른 책으로 가는 다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작은 기대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의 도끼였던 책들을 독자 제현(諸賢)에게 팔아보고자 하는 의도. 결국, 나는 광고인이니까.
인간에게는 공유의 본능이 있다. 울림을 공유하고 싶다.
본문 한 자락
삶의 풍요를 위한 훈련
저는 지금 인문학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저를 통해 듣고 싶어했던 것은 '창의력'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가르치는 학과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침 창의력이 광고의 수단이 되니까 광고를 만드는 박웅현이 발상하는 과정을 보여줘봐라 해서 얘기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됐지요. 창의력이라는 게 가르치기 참 어려운 것이더군요. 그런데도 그동안 사람들은 이걸 기어이 가르치려고 했구나, 그래서 '좋은 카피를 쓰는 20가지 방법' 같은 것들이 나왔구나 싶었죠. 저도 사회 초년병 때 배웠던 것들입니다.
좋은 카피를 쓰는 20가지 방법.
1. 의문문으로 써본다.
2. 명령문으로 써본다.
3. '나'를 주어로 써본다.
4. '너'를 주어로 써본다.
……
이런 식으로 20가지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십사 년간 광고 현장에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이번에는 카피를 의문문으로 써봐야지, 이번에는 '나'를 주어로 써볼래, 그렇게 마음 먹고 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카피란 그렇게 써지는 게 아니거든요. 창의성이라는 건 상품화하거나 규정화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디어는 총체적으로 나오지 도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도식적이지 않으면 어려우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엔 저도 그 도식적인 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생각 끝에 내가 만든 카피를 범주화해볼까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더군요. 그러니까 광고 일은 소림무술영화 같은 겁니다. 이론을 읽고 느낀 걸 잘 정리하면서 배우지만, 그것이 발상에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일목요연한 정리도 좋지만, 아이디어를 내는 건 현장입니다. 만약 이연걸이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우고 내려와 싸움을 하게 된다면 싸울 때 배운 대로 될까요? 소림사가 등장하는 무술영화를 보면 소림사의 넓은 마당에서 상대와 마주보고 인사한 후 싸움을 시작합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싸울 때는 그렇지가 않아요. 일도 마찬가지죠. 그런 규칙은 없습니다. 상황이 다 달라요. 저의 경우라면, 같은 광고주도 두 달 전과 지금이 달라요. 모든 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니까요. 소비자의 반응, 경쟁사의 반응에 따라 다 달라집니다. 적이 내가 밥 먹고 있다고 해서, “그럼 너 밥 다 먹고 싸우자, 조금 있다가 마당으로 나와”라고 하지 않습니다. 밥을 먹고 있는데 표창이 날아오고 만두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발이 날아와요. 그럼 그걸 쳐내야 하잖아요. 걸어가고 있는데 공격해올 수도 있고, 그러다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말이죠. 순발력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이론 대부분은 소림사 마당입니다. 그 마당에서는 기본만 익히는 거예요. 생각의 기초체력만 기르는 겁니다.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이론으로 전부 다 정리해놓을 수는 없어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다른 일들도 그렇겠지만, 광고는 특히 변수가 많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요즘 강의할 때 광고에 필요한 발상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실은 책이나 수업이 아니라 회의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대처 능력이 커지는 것이죠.
요즘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고수들이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구나 싶습니다. 박재삼이, 존 러스킨이, 헬렌 켈러가 같은 생각을 했어요. 사과가 떨어져 있는 걸 본 최초의 사람이 뉴턴이 아니잖아요. 사과는 늘 떨어져 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겁니다.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 절박함이 사과를 보고 이론을 정리하게 했죠. 답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나한테 모든 것들이 말을 걸고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들을 마음이 없죠. 그런데 들을 마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창의적인 사람입니다. 두 시간 강의에서, 한 권의 책으로 제가 가르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 여러분 안에 씨앗이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울림을 줬던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의성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모두 창의적이 되어야 하는 거죠? 저는 광고를 해야 하니까 창의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창의성과 관련 없지만 가치 있는 일도 꽤 많잖아요. 그런데 이게 왜 필요하느냐, 왜 다들 굳이 배워야 하느냐? '직업'의 범주를 벗어나 '삶'의 맥락에서 볼 때, 저의 대답은 창의적이 되면 삶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풍요’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생각해볼까요? 풍요로운 삶이라 하면 대부분 성공한 삶을 떠올려요. 그럼 성공한 삶이 무엇이냐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한번 해봅시다. 성공한 삶이라는 게 뭘까요? 일단 당장 성공한 삶이라면 외제차, 좋은 집, 돈이 떠오르겠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세요. 돈만 많은 사람과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의 표정을 떠올려보세요. 진짜 어떤 것이 풍요입니까? 최고급 샴페인과 캐비어를 매일 먹을 수 있는 삶이 풍요로운 삶일까요? 그가 죽을 때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만족할까요? 햇살과 나뭇잎의 아름다움 하나 보지 못해도 최고급 샴페인과 캐비어만 있으면 행복한 삶일까요? 행복은 순간에 있습니다. 중국의 옛 시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으나 보지 못했네
짚신이 닳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헤맸네
지쳐 돌아오니 창 앞 매화향기 미소가 가득
봄은 이미 그 가지에 매달려 있었네
― 작자 미상
봄을 찾아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는데 정작 봄이 집 매화나무 가지에 달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자, '봄'을 '행복'으로 바꿔서 읽어보세요. 모두 멀리 보고 행복을 찾는데 행복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은 순간의 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레이스로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명문 중학교를 가야죠, 명문 중학교를 가면 행복해질 거야, 명문 중학교 갈 때까지만 희생하자. 명문 중학교 가면 외고에 가야 해요. 외고 갈 때까지만 희생하자. 그럼 행복해질 거야. 외고를 가면 서울대를 가야 하고, 서울대에 가면 대기업에 가야 하고 대기업에 들어가면 부장이 되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나이가 일흔이에요. 레이스가 된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죠.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저는 순간순간 행복을 찾아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행복은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러나 풍요롭기 위해서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같은 것을 보고 얼마큼 감상할 수 있느냐에 따라 풍요와 빈곤이 나뉩니다. 그러니까 삶의 풍요는 감상의 폭이지요.
이철수의 한 문장을 읽고 나서는 열매를 그냥 못 지나칩니다. 삶에 변화가 생기는 겁니다. 옛날에는 1킬로미터를 걸어가면서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지금은 베인 나뭇잎, 날아가는 새, 반짝이는 빗방울이 다 아름답습니다. 제가 죽을 때 떠오르는 장면은 프레젠테이션 석상에서 박수 받는 순간이 아닐 겁니다. 아마 어느 햇살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어느 나뭇잎이 떠오를 것 같고, 어느 달빛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혹은 어떤 대화, 표정, 그런 것들이 많이 축적되어 있으면 풍요롭게 살다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시로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고, 매일 로열 캐리비언 크루즈를 탈 수 있고,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야 빨리 빨리 와, 찍어, 가자” 하는 사람. 그리고 십 년 동안 돈을 모아 간 5박6일간의 파리 여행에서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이라는 그림 앞에서 얼어붙어서 사십 분간 발을 떼지 못한 채 소름이 돋은 사람.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풍요롭게 생을 마감할까요?
중요한 것은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를 보면서 소름이 돋으려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문화미와 예술미는 훈련한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처음 피카소의 작품을 볼 때 왜 좋은지 몰랐습니다. 좋다니까 감동을 짜내며 좋은가보다 했죠. 그런데 지금은 좋은 걸 알겠습니다. 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같은 책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책들을 읽고 난 다음에 본 피카소의 그림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이젠 앙리 루소의 어떤 그림을 보고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생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철수가, 최인훈이, 유홍준이, 김훈이, 그 외의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나를,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었고, 해주고 있습니다.
‘시청’이냐 '견문'이냐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은 깊이 보고 듣는 거죠.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그저 지겹다고 하는 것은 시청을 하는 것이고요, 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 건 견문이 된 거죠. <모나리자> 앞에서 '얼른 사진 찍고 가자'는 시청이 된 거고요, 휘슬러 <화가의 어머니>에 얼어붙은 건 견문을 한 거죠. 어떻게 하면 흘려보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는가가 저에게는 풍요로운 삶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겁니다. 존 러스킨은 “당신이 보고 난 것을 말로 다 표현해보라”라고 했습니다. 나뭇잎을 봤다면, 나뭇잎의 균형감각이 어떻게 되어 있고, 앞뒷면의 촉감이 어떻게 다르고, 끝부분은 어떤 모양이고, 햇살이 떨어진 각도에 따라 나뭇잎의 색깔이 어떻게 다른지 볼 줄 알면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또 이렇게 얘기했죠. “내가 대학교 총장이라면 '눈 사용 법(How to use your eyes)'이라는 필수과목을 만들겠다”라고요. 보지 못하는 자신보다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더 못 본다는 것이죠. 전부 다 '시청'을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아름다운 영미 에세이 50선에 드는 헬렌 켈러의 에세이, 「삼 일만 볼 수 있다면」에 나오는 말입니다. 헬렌 켈러는 책 첫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숲을 다녀온 사람에게 당신은 뭘 봤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하길 '별것 없었어요Nothing special'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겁니다. 자기가 숲에서 느낀 바람과, 나뭇잎과 자작나무와 떡갈나무 몸통을 만질 때의 전혀 다른 느낌과, 졸졸졸 지나가는 물소리를 왜 못 보고 못 들었냐는 거죠. 이렇게 인생이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에 떠오를 장면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거미줄에 달려 있는 물방울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들은 죽을 때 떠오를 장면들이 풍성하겠죠.
삶은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놓고 여기에 진주를 하나씩 꿰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주는 바로 그런 삶의 순간인 겁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삼 주 정도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더니 난리가 난 겁니다. 삼 주면 수학 수업, 영어 수업을 몇 번이나 빠져야 하는지 아느냐는 거죠. 얘기 끝에 가족이 내린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아마도 수학을 놓치고 영어를 손해볼 거다, 하지만 평생 아이가 가져갈 수 있는 순간, 우리가 살면서 문득 떠올릴 수 있는 순간, 마지막에 당신은 뭐가 생각나느냐는 질문을 받고 떠올릴 순간, 이런 것들 하나가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진주 한 알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진주들은 내가 눈이 있고, 훈련이 되어 있어야 생길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전 11시에 고양이가 내 무릎에 앉아 잠자고 있고, 제이슨 므라즈의 음악이 들리고, 책 한 권 읽는, 그런 순간이 잊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몇 개가 각인되어 있느냐가 내 삶의 풍요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드렸듯 그것들은 약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기준을 잡아주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고, 그 사람들 대부분이 책을 씁니다. 그래서 그 책들을 읽으면서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