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에 관해 책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면서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이 중첩되어 명멸했다. 나는 우리 대통령이 인문학적 통찰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우리 시민들이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는 제발 묻지마 아무개 식으로 투표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정말로 역사학자마저도 역사적 유물을 깔아뭉개면서 건조물을 만드는 것을 개발이라 여기고, 그렇게 하여 많은 업적 을 쌓은 사람을 유능한 지도자라고 지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자신의 언행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 정도의 지각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의 시인의 이름쯤은 몰라도 괜찮다. 한시 한두 구절은 못 외어도 상관없다. 가끔 성질에 못 이겨 상소리를 내뱉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면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어떤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반성하고 성찰할 줄 알아야 한다. 반성과 성찰을 하는 사람은 남의 비판과 충고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줄 안다 옛날 현명한 왕들은 남의 좋은 충고를 들으면 그 말에 절을 했다고 하지 않은가. 경연은 남의 지혜를 빌리는 자리 곧 지존의 왕이 신하들을 스승으로 삼아 그들의 지혜와 경륜을 배우는 자리이다. 남의 머리를 빌리는 것,남의 말을 듣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교양을 쌓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에서 당대의 문제를 솔직하게 묻는 왕과 이에 대범하게 답하는 젊은 인재의 모습으로 시대의 과제에 대응하는 조선의 모습을 보여준 김태완 선생이 신작 <경연, 왕의 공부>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최고 권력자이면서도 하나의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읽고 또 읽고, 묻고 또 묻고, 논쟁에 논쟁을 거쳐야 했던 조선 왕의 공부의 장, 즉 경연을 현장에서 바라보듯 그려내고 이에 당대의 역사 맥락으로 해설을 붙이고,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평을 더했다. 지도자 혹은 리더란 무엇인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묻는 요즘, 공부하고 토론하는 열린 리더의 모습뿐 아니라 이에 부응해 함께 공부하고 논의하여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시민의 자세까지 생각해볼 좋은 기회다. 경연이란 무엇인지 이와 함께 왕의 일과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짧게 살펴보고 실제 조강의 한 대목을 따라가보자.

 

 

경연과 왕의 하루 

조선시대 왕들은 날마다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萬機)을 몸소 점검해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틈틈이, 아예 시간을 정해놓고 유학의 경전과 역사서를 중심으로 공부하면서, 그 시간을 이용하여 정책을 의논하고 토론했다. 이처럼 왕이 군주로서 덕성을 수양하기 위해 공부하고, 현명하고 경륜이 많은 관료들과 정책토론을 하게끔 제도적으로 마련한 공간이 바로 경연이다.
  국왕의 하루는 일어나자마자 죽이나 미음 등 간단한 초조반(初早飯)으로 요기를 한 다음, 웃전에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 많은 왕들이 모후(母后)보다 일찍 죽었기 때문에 당대의 왕에게는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층층시하로 살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유교적 가치와 윤리가 체화한 사회의 왕으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왕은 어머니(대비)와 할머니(대왕대비)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빠뜨리지 않았다.
  문안을 마친 왕은 신료들을 만나 국정에 관한 업무를 시작한다. 약식 조회인 상참(常參)이 끝난 뒤에는 경연을 열었는데, 세종 이후 상참과 경연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상참의 연장으로 시사(視事)를 아뢰고 경연을 했다. 그러다가 영조 이후에는 상참 전에 경연을 먼저 해서, 국왕은 해가 뜰 무렵 조강(朝講)으로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경연이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하고, 이어서 문무 관료들과 조회를 하면서 업무 보고를 받는 등 국정을 돌본다. 정오에는 주강(晝講)을 하고, 요즘 시간으로 오후 2시(未正)에 석강(夕講)에 참석하는데, 이 세 차례의 경연을 삼시강(三時講)이라고 한다. 이것이 국왕의 공식적인 경연, 곧 법강(法講)이다. 그리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특강 또는 보강 형식의 소대(召對)가 있는데, 특히 밤에 열리는 소대를 야대(夜對)라고 한다. 소대나 야대에는 학덕이 뛰어난 학자나 은퇴한 원로가 특별히 초빙되어 왕과 담론을 하기도 했다.
 

  

위 인장(정조의 만기지가 인장)에 새겨진 ‘萬機之暇’, ‘萬幾餘暇’는 왕이 온갖 업무(萬機)를 처리하는 틈틈이, 여가를 활용해 책을 읽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국정을 돌보는 바쁜 와중에도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던 국왕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경연이 제도상으로 이처럼 완비되어 있었지만, 아무리 경연에 열의를 갖고 임했던 왕이라 하더라도 매일 삼시강과 소대를 열지는 않았다. 왕의 분주한 일과를 생각하면,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는 며칠에 한 번 경연을 여는 때도 있었고, 오랫동안 경연을 거른 때도 있었다. 또 성실하게 경연에 임한 왕도 가끔씩은 몇 차례의 경연 내용을 한꺼번에 몰아서 공부하기도 했다.
  삼시강과 소대 및 야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조선 초기의 정치적 안정을 구가한 성종의 경연 사례를 들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편의상 왕이 하루 동안 참석하는 경연으로 구성했지만, 실제로 어느 특정한 하루 동안에 삼시강과 소대를 모두 행한 왕의 사례는 <실록>이나 다른 사료에서도 찾아보지 못했다.(내가 게을러서!) 또한 실제로 삼시강과 야대에 모두 참석했다 하더라도 진강한 내용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므로, 성종 대의 대표적인 경연 가운데 독자의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을 위주로 선별해 재구성했다. 그리고 소대는 <성종실록>에는 적당한 사례가 없어서, 영조 때의 기록을 가져왔다.

조강
강론이 끝난 뒤 관직에 선발된 관리의 적격성 여부를 토론하다
성종9년(1478)10월7일

경연에 나아갔다. <예기(禮記)>'상복소기喪服小記'의 “조부가 죽고 조모의 후사가 된 자는 삼년상을 입는다(祖父卒而後爲祖母後者, 三年).”라는 구절을 강론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승소(李承召)  수양부모(收養父母)에 대해 삼년상을 입는 것은 옛 글에는 실려 있지 않은데, 우리나라에서는 행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있는데 양부모에게 삼년상을 입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임금  당초에는 어찌하여 이 법을 세웠는가?
영경연사(領經筵事) 윤필상(尹弼商)  수양부모는 어루만져 기른 은혜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복(服)을 입습니다.
이승소  예전에는 계후(繼後, 양자로 후사를 이음)에 관한 글이 없었을 뿐더러, 오직 대종(大宗, 대종손)에게만 계후가 있었습니다. 선조(先祖)를 중히 여겨서 후사가 끊어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들을 데려다가 후사를 잇고 사람들도 기꺼이 후사가 되려고 하는 것은 땅과 백성을 탐내서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공자가 확상(矍相)의 채소밭에서 활을 쏘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남의 후사가 된 자는 들어오지 못한다(爲人後者不入 <禮記>'射義').”라고 하였습니다. 후사가 되는 것을 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후하는 법은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지 오래되어서 가볍게 고칠 수는 없습니다.

강을 마쳤다.

지평(持平) 허침(許琛)  창원군(昌原君)은 죄를 범한 것이 가볍지 아니한데, 한 해가 안 되어 갑자기 벼슬을 돌려주었습니다. 또 임사홍(任士洪)은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게 해서 먼 지방에 귀양 보냈는데, 겨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소환하였습니다. 아마도 국가의 법이 이로부터 허물어질 듯합니다.
임금  임사홍이 벌써 돌아왔는가?
우승지(右承旨) 김승경(金升卿)  임사홍이 서울에 들어온 지 벌써 사흘이 되었다고 합니다.
임금  공주의 병이 나은 뒤에 배소(配所, 귀양지)로 돌려보내겠다.
허침  이조(吏曹)는 인물을 전형(銓衡)하고 백관을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게 하는 곳이므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하루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박중선(朴仲善)을 판서로 삼았습니다. 박중선이 무신이라서 그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임금  문신으로서 비록 경적(經籍)을 밝게 통달한 자일지라도 일을 처리하는 데는 간혹 잘못 조처하는 수도 있고, 무신이라 하더라도 일을 잘 처리하는 자가 있다. 하나만 가지고 논할 수는 없다. 박중선은 어떠한 사람인가?
윤필상  박중선은 세조조에 여러 번 좋은 벼슬을 역임하여 병조 판서까지 되었는데, 지금 이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이승소  박중선이 비록 무신일지라도 글을 알고 사리에 통달하였습니다. 다만 일을 처리하고 판단하는 데 능한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시험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임금  박중선은 참으로 바꿀 수 없다.
허침  참판 신정(申瀞)은 비록 자질이 명민하나, 역시 물망(物望, 여론)에 맞지 않은 자입니다. 이 두 사람이 어찌 인물을 전형하는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신은 전선(銓選, 인물의 전형과 선발)이 정밀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임금  참판이 물망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허침  여론이 모두 청렴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임금  이조는 중대한 곳인데, 그 사람됨이 이와 같다면 그 벼슬에 둘 수 없다. 저마다 아는 것을 말하라.
윤필상  신정은 일찍이 도승지가 되었으니, 그 사람됨을 성상께서 자세히 알고 계실 터입니다. 그가 청렴하지 않은지를 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승소  신정이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은 신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듣건대, 신정은 사는 것이 넉넉하다고 합니다. 대개 부(富)란 원망의 대상이므로 여론이 이와 같습니다.
시독관(侍讀官) 안침(安琛)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한 뒤에야 쓸 수 있습니다. 신정이 청렴하지 못한지는 신이 자세히 알지 못하나, 여론이 이와 같으면 전형의 지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전경(典經) 안윤손(安潤孫)  신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나, 여론은 참으로 대간(臺諫)의 말과 같습니다.
임금  신정이 도승지로 있을 때 잘못한 일이 없었고, 이제 참판이 되어서도 잘못이 없으며, 또 무슨 일이 청렴하지 못하다고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근거 없는 말만 가지고 갑자기 벼슬을 바꾸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허침  유양춘(柳陽春)은 행실이 경박한 사람이라서 참으로 조정의 벼슬에 서용할 수 없는 사람인데, 지금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로서 승문원(承文院, 외교문서를 맡아보던 기관) 교리(校理)에 올랐습니다. 온당치 못합니다.
임금  자기 의견을 말하라.
윤필상  유양춘이 예문록(藝文錄)에 참여하여 뽑혔으니, 만약 이문(吏文, 조선시대에 공문서에서 쓰던 특수한 양식의 이두문체 또는 용어)과 한훈(漢訓, 중국어)에 정통하다면 쓰더라도 괜찮습니다.
이승소  그러합니다.
임금  승문원의 소임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양춘이 이문에 정통하다면 쓰더라도 무방하나, 정통하지 못하다면 쓸 수 없다. 이문에 정통한지 여부를 전조(銓曹, 인물을 전형하는 부서. 이조와 병조)에 물어보도록 하라.
 

풀이
이날 경연에서는 <예기>를 텍스트로 삼아, 거기 수록된 예(禮) 규범과 실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토론했다. 이어서 종친이나 권신에게 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 사례를 들어서 비판하고, 관직에 선발된 관리의 적격성 여부를 논의했다.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은 세조와 근빈(謹嬪) 박씨의 둘째 아들이다. 종친이라는 신분을 믿고 제멋대로 불법을 자행했고, 오만무례하고 포악하게도 국가의 기강과 질서를 어지럽혔다. 지방에 가서는 수령들을 능욕하고 함부로 폭력을 휘둘렀다. 궁중의 법도까지 어지럽혀,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의 비)가 여러 차례 꾸짖어도 뉘우치지 않았다. 심지어 여종을 살해한 죄로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여종 살해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종 9년(1478) 1월에 창원군의 구사(丘史, 종친이나 공신에게 소속된 관노비) 곱지(古邑之)라는 여자가 살해되었다. 곱지는 음악을 할 줄 알고 이름처럼 용모도 고왔던 모양이다. 가외(加外)라는 여자가 진술한 내용은 이러했다. 자신의 팔촌 동생인 곱지란 여자가 음률(音律)을 조금 아는데 창원군의 구사로서 그 집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다, 창원군이 곱지를 간통하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죽은 여자가 아마도 곱지일 듯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곱지의 용모와 복색을 말했는데, 여자의 시체를 직접 보게 했더니 곱지가 맞다고 했다. 그래서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창원군에게 노비등록대장인 ‘구사입안(丘史立案)’을 들이라고 요구했으나, 창원군은 ‘입안’이 없다고 대답했다. 삼사에서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환관(宦官) 조진(曺疹)과 한림(翰林) 최진(崔璡)을 창원군의 집에 보내 ‘구사입안’을 가져오게 했다. 조진이 창원군의 집에 이르니, 창원군은 이미 그것을 벌써 보냈다고 했다.
  다음 날 동부승지(同副承旨) 이경동(李瓊仝)이 공초를 받은 내용을 아뢰었다. “창원군의 종 원만(元萬)·석산(石山)·산이(山伊)가 승복하였습니다. 그 공초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옥형(洪玉亨)이란 자가 주인집의 여종 옥금(玉今)을 아내로 삼고, 또 곱지를 간통하였습니다. 하루는 곱지가 옥금에게 “내가 꿈에 홍옥형을 보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상전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서 “네가 꿈에 옥형을 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고 우리들을 시켜 죽이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머뭇거리자 곱지를 익랑(翼廊, 대문의 좌우 양편에 이어서 지은 행랑) 처마에 달아매고 칼로 죽였습니다.>”
  곱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창원군은, 곱지가 홍옥형이라는 자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알고 불같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곱지를 추궁하다가 죽였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자, 중신들이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논고했다. “창원군 이성의 큰 죄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에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이 일어나서 삼사의 낭청(郞廳)이 왕명을 받들고 그 집에 이르렀는데, 창원군이 왕명을 거역하고 그들을 집에 들이지 않은 것이 그 하나입니다. 살인한 형적이 이미 드러나 상께서 인견(引見)하고 친문(親問)할 때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이 그 둘입니다. 칼로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거리낌 없이 멋대로 포학한 행위를 자행한 것이 그 셋입니다. 종들이 그가 흉악한 행위를 감행할 때 사용한 환도(環刀)의 형체와 모양을 분명히 말하였는데도, 내관이 전교를 받들고 가서 물었을 때 굳이 숨기고 승복하지 않았던 것이 그 넷입니다. 성이 비록 왕자이나, 이 같은 큰 죄를 범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건이 종묘사직에 관계된 것이 아니니, 상께서 재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창원군이 종친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해주고 원방(遠方) 부처(付處)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충청도 진천에 유배하기로 결정했으나, 세조의 소생으로는 창원군 형제밖에 남지 않았다고 정희대비가 간청하여 며칠 만에 원방 부처한다는 판결마저 철회했다. 그 뒤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판결 철회가 부당하다며 몇 차례 상소했으나, 성종은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직첩(職牒)도 다시 돌려주었다.
  임사홍은 텔레비전 사극의 단골 주인공으로 곧잘 등장하는데, 연산군의 타락과 학정을 부추긴 간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훈구파의 거물로서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연산군 10년)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며, 그의 두 아들이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어서 왕실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성종 9년(1478)에는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친아버지처럼 그를 의지하던 공주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으나,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임사홍은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자광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았고, 그 뒤 갑자사화 때는 그의 둘째 아들 임희재(任熙載)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루되어서 화를 입었는데도 구제하지 않았다. <중종실록>에는 그가 아들이 처형되던 날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렸는데,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이를 엿보고는 더욱 신임하고 총애하며 한결같이 그의 계교를 따랐다고 한다. 


   

묘비에는 ‘정헌대부 이조판서 풍천임공 휘 사홍, 정경부인 효령대군 손녀 전주이씨지묘(政憲大夫吏曹判書豊川任公諱士洪貞敬夫人孝寧大君孫女全州李氏之墓)’라고 쓰여 있다. 임사홍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둘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성종조에서는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하다가, 연산군 때 재기하여 사화를 주도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

작은 소인 숭재, 큰 소인 사홍(小任崇載大任洪)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라(千古姦兇是最雄)
천도는 돌고 돌아 보복이 있으리니(天道好還應有報)
알리라, 네 뼈 또한 바람에 날릴 것을(從知汝骨亦飄風)

마지막 구절은 당시 죄인의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빗대 표현한 것인 듯하다. 작은 소인이라고 지목된 숭재는 임사홍의 넷째 아들로, 전에 장녹수와 간통했는데 장녹수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 되자 일이 탄로 날까 두려워하여 “만약 평소의 일에 대한 말이 나오거든 희재가 한 일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나를 믿고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너도 보전될 것이다.”라고 몰래 말했다. 이 때문에 화가 그의 형 희재에게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랬던 임숭재도 그의 아비 임사홍보다 먼저 죽음으로써 나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처형을 모면할 수 있었다.
  임사홍은 연산군 10년(1504)에 왕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함께 모의하여,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되고 사사된 내막을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성종 대의 중신과 사림들이 대거 제거되었다. 그러나 결국 1506년, 중종반정 뒤에 임사홍은 아버지 원준(元濬)과 함께 처형당했으며, 아들 숭재는 관직을 추탈당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가산도 몰수당했다. 임사홍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으로 승문원(承文院)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해서에 능했다고 한다.
  경연에서 성종이 공주의 병을 운운한 것은, 현숙공주가 아버지 예종을 여읜 뒤 시아버지 임사홍을 친아버지처럼 따랐는데, 그가 유배 간 뒤 그리워하여 거의 병이 날 지경이 되었던 것을 말한다.
  세종 이후로 혼란했던 조선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제도를 확립한 성종도 친·인척의 부정과 비리는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앞의 경연 기록을 보더라도 권력자나 관료, 공무원의 친·인척 비리는 국가의 기강을 흐트러뜨리고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 근원이 됨을 알 수 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공정하게 선발하고 적재를 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정치의 알파요, 오메가다.
  사신(史臣, 사초를 기록하는 신하)은 이 날짜의 일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허침이 신정을 청렴하지 못하다고 배척한 것은 참으로 여론인데, 좌우에서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으니 그들을 곧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박중선은 무인으로서 시서(詩書)를 알지 못하므로 인물을 전형하지 못할 것은 명백한데, 그를 전조(銓曹)의 장관으로 삼아서야 되겠는가?

시서를 알지 못하므로 인물을 전형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문신관료는 이조에서, 무신관료는 병조에서 전형을 했다. 그런데 박중선이 무인으로서 이조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에 사신은 그가 문신관료를 제대로 알아보고 전형할 수 없으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종의 말처럼 경적에 통달한 문인도 일처리를 잘하지 못할 수 있으며, 무신이라도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 행적이나 이력을 보고 평가해야지, 선입관으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국가 고위 공직자를 선발하여 임명할 때 사전 검증하는 제도(인사청문회)가 도입된 이래, 2011년 현재 전 국민은 국무총리 후보와 몇몇 부서의 장관을 물망에 올려놓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몇 건의 ‘쇼’를 관람했다. 특권층의 가치관과 법의식이 보통 시민들의 그것과 정말 소양지판이요, 천양지차이다! 아무리 법도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지만, 위장전입, 탈세, 공사(公私) 혼동, 특권의식에 따른 위법이 점입가경이다. 고대 헬라스의 어느 소피스트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한 말은 언제나 불변의 진리인가? 우리나라에서 법은 거미줄이다. 새는 아예 걸리지도 않고, 설령 걸린다 하더라도 날갯짓 한 번에 찢어지고 말 뿐, 나비, 파리, 모기, 잠자리 같은 잔챙이 벌레들만 걸려드는 거미줄이다. 청문회 자리에 불려나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번이 나라에 봉사할 마지막 기회’라면서 인정을 호소한다. 무슨 놈의 마지막 기회가 저리도 여러 번이란 말인가! 마지막은 딱 한 번밖에 없다. 뻔뻔한 것도 유만부동이다. 작금의 인사청문회 관련 소식을 보고 있으려니, 상피(相避)와 피혐(避嫌, 상피와 피혐: 상피는 일정 범위 내의 친족 간에는 같은 관사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어느 지역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관리도 그 지역에 파견되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피혐은 어떤 사건에 관련되어 혐의를 받으면 그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을 삼가는 것을 말한다.
  이 상식이었던 조선시대라면 과연 이런 사람들이 언감생심 관료를 꿈에나 꿀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염치를 모르는 사람을 ‘파렴치하다’고 한다. 파렴치할수록, 얼굴이 두꺼울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대한민국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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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그늘 2011-08-11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극단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조선.
당파와 외침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500년을 버틴 건
정치의 근본엔 '민'이 있었기 때문에, 경연과 같은 장치들이 있었기 때문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8-26 11:40   좋아요 0 | URL
지금은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법 체계인데도 왜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걸까요...

상생 2011-08-1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으로 치자면 대통령이 비서진들과 각료들을 수시로 모아놓고 고전을 읽고 세미나를 하는 모습일텐데,
그럴리는 없지만, 생각만 해도 즐거운 상상입니다.
오늘날 정치지도자들의 헛짓거리들은 다 내면의 인문학적 소양과 자기성찰의 부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낡은 과거로만 인식되던 조선, 우리가 과거보다 발전에 왔다는 단순한 생각이 실은 얼마나 비성착적인 관점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김태완씨의 전작 <책문>을 읽은 독자들은 기대해도 좋을 듯...

인문MD 바갈라딘 2011-08-26 11:39   좋아요 0 | URL
퇴임 후였지만 비서진과 각료 들 모아놓고 책 읽고 세미나하던 대통령도 있었지요. 말씀처럼 경연 자체가 과거로부터의 배움이니, 지금의 비성찰적 태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