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사실상 방대한 규모의 인류 문명사 전반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 속의 '지식'보다는 '지혜'를 밝히고자 한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거북살스런 오만함이 없다. 약삭빠른 속도감보다는 그 뒤에 감춰진 느린 움직임들의 미덕을 품어 안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단순히 당위와 규범이 아니라 인류 문명사 전반에서 발견되는 명백한 사실들을 놓고 희망의 근거를 삼고자 한다는 점에서 종말론적 위협으로 먹고사는 다른 환경 도서들과도 다르다. 그래서일까. 왠지 이 책을 읽고 나면 '잘 모르겠다'는 소리도 맘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첨단과학기술의 똑똑함 앞에서 피곤하게 경쟁적으로 똑똑한 척하려 애쓰지 않고, 차라리 잘 모르겠다는 (무책임이 아닌) 겸양의 태도를 내보이는 것이 오히려 생존에 도움이 되는 지혜로운 태도가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옮긴이의 말)

 
   

 

 

꽤 오래 전 책인데 <도둑 맞은 미래>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90년대 후반에 환경호르몬 문제를 제대로 알린 책이지요. 공저자 다이앤 듀마노스키가 오랜만에 신간으로 찾아왔습니다. <긴 여름의 끝>이란 멋진 제목은 지난 1만 1700년 동안 (고마운 줄 모르고) 누린 기후의 축복을 말합니다. 이 막간이 끝나면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그렇다고 인류가 하루 아침에 멸망하거나 지구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큰 어려움을 이겨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제 기존의 진보 서사는 잊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가올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문화 서사가 필요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무엇에 맞서야 하는지,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새롭게 묻고 답합니다.

듀마노스키의 주장이 잘 정리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공개합니다. 

 

 

9.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_ 정직한 희망

 
이 세상을 뚫고 지나가는 길은 우회로보다 찾기 어렵다.
─월리스 스티븐스

 
위험의 시대에는 달콤한 거짓말보다 쓰디쓴 진실이 더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근대의 세기에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준 신화의 약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진보를 통한 구원의 믿음은 오존 구멍과 지구온난화 같은 사태가 나타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오늘날 가장 빠른 진보는 이 행성 을 우리 자신을 비롯한 많은 생명체들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십 년 뒤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손실이 나타날 것이 확실하다. 가을철 뉴잉글랜드의 설탕단풍나무숲이나 열대 바다의 산호초들, 북극곰과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식물들과 저지대 섬들과 모래 해변, 그리고 일부 해안 도시들 같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오늘 태어난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바꾸게 하려고 겁을 주는 환경종말론의 어두운 예언이 아니다. 이미 벌어진 변화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일 뿐이다. 지금 당장 모든 온실가스를 차단하더라도 온난화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엔진을 끄더라도 질주하던 기차가 산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물론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재난의 강도가 약한 경로로 들어설 수도 있다). 앞으로의 100년은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 틀림없다.
  앞에 놓인 장애물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이제까지 세상의 변화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일어났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의 미래를 대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다. 앞으로의 몇 세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처럼 인식 가능한 형태로 펼쳐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인류의 여정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에 따르면, 역동적이고 변화 가능한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이 세상의 부자들이 당연시해왔던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기대할 권한이 없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본 경험은 얼마 되지 않는다. 중요한 원인은 기후가 너무 불안정해서 농업이나 정착 문명을 형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난 1만 1700년간 인간은 긴 여름과도 같은 기후상의 축복을 만끽했다. 이 간빙기는 유례없이 길고 도 평화로웠다. 기후사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이 막간의 시기는 특수한 가능성의 경관으로서 수천년 간 인간이 전 지구적인 문명을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막간극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내일의 가능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의 다음 장이 어떨지는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 특히나 기후시스템이 과거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변칙적인 양상으로 돌아갈 경우 상황은 더욱 난감할 뿐이다. 하지만 3만 2000여 년 전 우리 선조 가 완성해놓은 아름답고도 강력한 프랑스 쇼베 동굴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본질적인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다. 복잡한 문명이 발생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복잡한 방식으로 인간으로서의 특징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황갈색의 암벽에 목탄으로 그려넣은 말 머리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히 목이 굵고 턱이 묵직하며 칫솔모처럼 뻣뻣하게 일어선 갈기를 가진 말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몽골의 초원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말을 본 적이 있었다. 프셰발스키말이라고 하는 이 말은 동굴 벽에 있던 그 말들과 너무 닯은 모습이었다. 이 말이 풀 뜯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단단한 근육질의 몸과 그 세련된 빛깔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황금빛의 어깨에서 초콜릿 빛깔의 다리까지 색깔이 차츰 어두워지는 것이 이 말의 색깔은 열대 지방의 새처럼 현란하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하며 섬세했다. 귀의 끝은 동양의 수묵화 느낌이 나는 어두운 색이었다. 불에 탄 검은색 나무덩어리를 쥔 손은 암석상의 음영 처리와 대담한 선들을 가지고 그 턱과 어깨를 선명하게 그려내고, 귀의 어두운 윤곽과 뻣뻣한 검은색 갈기를 따뜻한 사슴털빛의 몸 색깔과의 대비 속에 그려냄으로써 그 위력적인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표현해낸 것이다. 이 고대의 예술가의 세상에 대한 반응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서 내게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예술가와 나는 같은 눈과 심장으로 야생마를 보았다.
  만일 지구가 이다음 몇십 년간 더욱더 거친 음악 속에 몸을 맡긴다면 나는 인간들이 복잡한 문명을 포기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 춤사위의 일부로 남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바람을 갖는 것은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체들의 연방제 속에서 인간이 예외적이라거나(위장술의 천재인 오징어는 오징어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각각 특수한 존재이긴 하다) 가이아 또는 우주가 우리를 어떤 이유로든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유구한 드라마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하고 이 푸르고 생기 넘치는 지구상에서 자기만의 순간을 갖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3만 2000년 뒤에도 누군가가 나와 마찬가지로 그 야생마 그림에 사로잡히고 감동을 받아서 말이나 이미지로 그것을 표현했으면 좋겠다. 이 탐험 과정에서 내게 분명해진 것은 오늘날의 문명이 인류의 척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유일한 또는 최선의 방식은 아니라는 말이다. 지구는 인간이 없으면 더 나아질 것이라거나 우리는 본성적인 결함 때문에 자멸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내릴 이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위험은 과감한 문화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전 지구적 문명이 스스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조직된 인간 사회를 가능케 하는 조건까지도 파괴할 것이라는 점에 있다. 최악의 경우 근대 산업문명이 유발한 전 지구적 변화는 지구를 우리의 생명에 유해한 새로운 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다. 만일 지난 역사를 통해 어떤 지침을 얻을 수 있다면, 지구와 그 거대한 가이아의 과정은 산소 위기와 소행성의 충돌, 다른 충격적인 재난들 속에서 살아남았던 것처럼 근대적 세기의 공습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시간이 있다면 생명은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창조적이고 그 어마어마한 지구의 과정은 이미 레몬의 가장 쓴 부분을 가지고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독 성의 산소는 복잡한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었다. 나는 우리가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인간이 근대적 세기의 악영향 속에서도 살아남아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쓸 수 있기를 기도한다. 


 
 

혼란 속의 길

앞으로 다가올 세기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지점은 그것이 엄청나게 불확실하다는 점뿐이다. 우리 시대의 거대한 유혹은 이 불확실성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충동일 수 있다. 서구의 사고방식이 흑백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때 절망‘(너무 늦었다’는 확신)에서든 과학에 대한 기대를 품고 근거 없는 장밋빛 환상을 대안으로 여기는 방식에서든 위안을 얻으려는 욕망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인류의 미래가 어두워질수록 희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인 희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지난 사회들이 문화적인 함정에 빠져 환경 변화의 도전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점을 돌아보며 인류학자 폴 보해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추려내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맹목적인 희망을 가지고 달리고 있는가? 이런 종류의 희망은 죽음을 몰고올 뿐이다.”
  나는 우리가 금지의 목록들을 다 추려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절망만큼이나 맹목적인 희망이 두렵다. 기술적인 조정에 대한 신념이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구원이든 인류의 역사는 그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종말론적 믿음이든 간에 불확실성에서 달아나 거대한 섭리라는 갑옷 속에 몸을 숨기는 경우, 우리는 미래에 대한 책임에서 멀어진다. 거칠고 비참한 변화의 한 중간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야 할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어려운 선택을 하고 행동하며 미래를 결정할 의무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인간의 문화는 그동안 도피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존재의 필연적인 불확실성과 대면하기 위해 눈앞의 길을 밟아왔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베다의 영향권에 있던 인도처럼 극동의 고대 문명들은 이 세계의 질서인 코스모스는 언제나 혼돈의 위협 속에 있었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존재의 드라마는 끝없는 투쟁 속에 펼쳐지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지속된다. 이들의 신화에 따르면 존재의 핵심에는 바로 이 꾸준한 투쟁이 있다. 손쉬운 탈출구에 대한 약속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와 비슷하게 편안한 방법을 찾으려는 생각을 경계하는 북미 나바호 인디언들 사이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고난이나 슬픔이 없는 인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보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사회는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정상적인 불행을 인정하지 못한다.”
  영국의 역사가 존 그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비극의 경험을 부정하는 종교와 철학을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은 그의 결론에 동의한다.
  “훌륭한 삶은 진보의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대처 속에 있다.”
  내 경험에 따르면 현실의 위기는 내가 이전에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것은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들에 대한 것이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두 질병을 통해 나는 사람은 상황이 닥치면 강해지고 이전까지 끔찍하고 불가능해보이던 것도 쉽게 견뎌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치명적일 수도 있었던 위급 상황에서 너무 늦어지기 전에 나 자신을 구제하는 데 필요한 차분함의 경지에 얼마나 재빨리 도달했던지 나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는 생명이 평상시에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강요함으로써 우리
를 단련시키고 더 깊어지게 할 수 있다.
  앞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일 이들 또한 폴란드와 보스니아에 있는 내 친구들이 그 길고도 잔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아 투쟁과 상실의 한 가운데서 발견해낸 것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거대한 시도의 시기들은 단지 최악의 시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는 최고의 시기 또한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생명을 가장 소중하고 강력하며 의미있는 형태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피크레트는 사라예보 위쪽에 있는 언덕으로 등산을 갔을 때 이 놀라운 역설을 설명하려고 했었다. 우리는 세르비아의 준군사 조직들이 역사상 가장 긴(고문과 다를 바 없는 치명적인 4년이었다) 포위 공격이 진행되던 동안 아래쪽 도로를 지나는 시민들을 추적하던 위치를 찾아나선 참이었다. 피크레트는 그 엄청난 공포에도 불구하고 포위당했던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하는 생존자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피크레트에게 물었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아주 분명했거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면 위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긴 하지만, 이 불확실한 미래에 삶을 개척해나갈 이들은 특별한 기회 또한 손에 넣을 것이다. 이것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인간으로서의 여정을 지속하려는 투쟁 속에 이들은 거대한 의도에 대한 공유된 의식을 통해 확장되고 상상력이 배어 있으며 생존에 필요한 창의성으로 더욱 풍부해진 삶을 살 수 있다.
  지난 500만 년간 부침과 큰 고난 속에서도 가까스로 생존해 아주 불확실한 세상에서 창의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낸 우리 선조들처럼 우리는 꿋꿋하게 이 거대한 불확실성에 맞서 이 어두운 혼란 속에서 길을 찾아내야 한다. 항상 그랬듯이 우리는 보호자도 없이 우리 아이들 이 미래의 도전과 맞서도록 내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현명하고도 겸손하다면, 아이들에게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유구한 가정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불안정을 양산했는지를 이해시킬 것이다. 또한 이윤과 효율성보다는 유연성과 중복성을 중심으로 고안된 복원력 있는 제도들과, 이들이 살아갈 변덕스러운 자연의 성질을 반영하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문화 지도,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세대를 거쳐 전해져 내려온 가장 값진 자산인 지식과 용기, 또한 정직한 희망을 심어줌으로써 이 험난한 길을 대비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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