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숭례문 화재의 책임을 지고 문화재청장 직에서 사임한 이후 나는 참회하는 마음에서 일체의 사회적 활동을 자제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 왔다. 그런 지 1년이 지난 지금, 아무래도 나의 본업은 문화유산에 대한 글쓰기에 있다는 생각에서 이제 국보 순례 길에 나서게 됐고,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당연히 숭례문이 되었다."

2009년 4월 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유홍준의 국보순례", 지난 2년 동안 연재한 100회분을 모아 같은 이름의 책으로 정리했다. 본문을 보강하고, 특히 이미지를 시원하게 한 면에 배치해 일종의 도록 역할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올해 <답사기> 시즌 2로 돌아온 유홍준의 연이은 책이 무척 반갑다. 이 책의 서문과 본문 한 꼭지를 먼저 소개한다. 올 여름 문화유산에 흠뻑 빠져보시길 바란다. 현재 예약판매 중, 8월 2일 출간 예정.

 

‘나라의 보물’을 순례하는 마음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문화재로 지정된 국보, 보물만이 아니라 ‘나라의 보물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우리 마음속에 간직할 기념비적인 유물들을 하나씩 찾아가는 명작 해설이며, 우리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명품들의 뒷이야기를 소개한 책이다.
전체를 놓고 보면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의 낱낱 장면을 유물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은 통사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고 미술사적 사항 이외의 이야기들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이에 반해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순례자의 느긋한 여유가 허용된다. 객관적 사실을 명확히 제공한다는 데는 차이가 없지만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면서 때로는 에세이 풍으로, 때로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전개할 수도 있다.
  명작 해설이란 결국 간결한 대중적 글쓰기에 다름 아닌데 이게 보통 힘겨운 것이 아니다. 본래 짧고 쉽고 간단하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 대중적인 해설이란 전문적 지식을 대중의 눈높이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문 지식을 대중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내어 눈높이를 높이는 것이다. 피겨스케이팅에 비유하자면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은 선수권대회의 지정 종목이고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갈라쇼 같은 것이다.
  이 책은 2009년 4월부터 조선일보에 매주 목요일마다 기고한 ‘유홍준의 국보순례’의 2년치, 100회분을 묶은 것이다. 신문에 연재할 땐 반드시 200자 원고지 5.2매에 맞추어야만 했다. 그러나 책으로 엮으면서 각 해설을 책의 판형에 맞춰 약간 늘려 쓰고 유물에 따라서는 세 쪽 또는 네 쪽을 할애하기도 했다.
  해설 맞은편에는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유물사진을 실었다. 본래 미술사 책은 글 못지않게 사진이 중요하다. 사진만으로도 저자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미술사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들도 즐길 수 있도록 유물사진에 영문을 병기하였다. 특히 이번 책에서는 해외문화재를 많이 다루었다. 일본의 경우는 아직도 찾아갈 곳이 많지만 미국과 유럽에 있는 중요한 유물들은 미술관별로 대략 일별해본 셈이다.
  책이 나오게 되니 누구보다도 조선일보 문화부 식구들과 변용식 발행인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이 일어난다. 가끔 내게 왜 ‘유홍준의 국보순례’를 조선일보에 연재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것은 조선일보가 내게 원고청탁을 했기 때문이다. 이 지면은 상당한 연륜과 권위를 갖고 있다. 나 이전에는 유명한 ‘이규태 칼럼’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문일평 선생의 ‘화하만필(花下漫筆)’도 있었다. 나로선 영광된 지면을 제공받은 것이다.
  글, 사진, 편집 모두에서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내 책을 기꺼이 맡아준 눌와의 김효형 대표, 변함없이 나를 도와주는 명지대 문화유산자료실의 김자우ㆍ김혜정 연구원, 신문에 글이 나가면 미세한 잘못을 지적해주었던 독자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뜻을 보낸다.
  나의 ‘국보순례’가 언제까지 이어질 지에 대해서는 생각한 바가 없다. 나라에서 국보로 지정한 유물만도 400점이 넘으니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남았다. 또 어느 정도 순례를 마치면 두 번째 책으로 엮어 독자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 2011년 7월 유홍준

 


연담 김명국의 죽음의 자화상


화가에게 있어서 술은 간혹 창작의 촉매제였다. 취옹(醉翁)이라는 호를 즐겨 사용한 17세기 인조 연간의 연담(蓮潭) 김명국(金命國)은 정말로 취필(醉筆)을 많이 남겼다. 사람들은 그를 주광(酒狂)이라고 불렀고, 실제로 그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영남의 한 스님이 지옥도를 그려달라고 할 때 그는 술부터 사오라고 했다.
  그리고 번번이 술에 취하지 않아 그릴 수 없다며 술을 요구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하여 스님이 찾아가 보니 염라대왕 아래서 벌 받는 사람들을 모두 중으로 그려놓은 것이었다. 스님이 화를 내며 비단 폭을 물어내라고 하자 연담은 껄껄 웃으며 술을 더 받아오면 고쳐주겠노라고 했다. 스님이 술을 사오자 연담은 술을 들이키고는 중 머리에는 머리카락을 그려 넣고 옷에는 채색을 입혀 순식간에 일반 백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남태응의 증언에 의하면 연담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술에 취하면 또 취해서 그릴 수 없어 다만 욕취미취지간(慾醉未醉之間), 즉 취하고는 싶으나 아직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명작이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연담의 명작으로는 취필이 분명한 <달마도>가 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연담다운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은 〈죽음의 자화상〉이다. 상복(喪服)을 입은 채 지팡이를 비껴 잡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림 위쪽에 마구 흘려 쓴 화제(畫題)를 보면 저승으로 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데 將無能作有
그림으로 그렸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을 덧붙이랴 畵貌己傳言
세상엔 시인이 많고도 많다지만 世上多騷A客
그 누가 흩어진 나의 영혼을 불러주리오. 誰招已散魂

동서고금에 자화상은 많고도 많다. 그러나 죽음의 자화상, 그것도 저승으로 표표히 떠나는 그림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 연담에게 술은 창작의 촉매제이자 삶과 죽음을 초탈한 경지로 들어가게 한 묘약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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