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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메신저, 차이를 알고 사이를 좁히다
‘소통의 메신저’로서 마리는 자신이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을 글을 통해 세상에 전하기 시작한다. 사는 것 자체가 곧 ‘소통’이라는 말처럼, 그녀가 쓴 글들과 그녀의 인생 자체가 ‘소통’을 의미할 텐데, 이번 작품은 암이라는 고통과 싸우면서도 직접 젊은이들과 얼굴을 마주한 그녀의 마지막 소통, 마지막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강의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홍성민, 옮긴이의 말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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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로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드디어 책을 만났기에, 강의실보다는 혼자 집에서 읽으려고요. ^^ 2강의 주제는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입니다.
제2장. ‘이해와 오해 사이’ 에서
같이 웃을 수 있는 기쁨
그런데도 내가 왜 통역사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도록 하자.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일 때문에 가족이 함께 체코 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5년 동안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학교에 다녔다.
4학년이 되던 해에 치보라는, 캐나다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를 둔 남자아이가 전학을 왔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아주 심한 장난꾸러기였다. 전학 온 첫날, 앞자리에 앉은 여자아이의 갈래머리를 잘라버려 그 아이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바람에 수업이 엉망이 되었다. 다음 날에는 교실에 비치해둔 지구의에서 구를 떼어내어 그걸로 복도에서 축구를 했다.
선생님들에게 치보는 몹쓸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신疫神 같은 아이였고, 치보 아버지는 치보가 못된 장난을 칠 때마다 학교에 불려왔다. 그럴 때면 치보를 잡으려는 아버지와, 교무실의 펜이며 서류를 던지면서 도망치는 치보 사이에 항상 술래잡기 한판이 벌어졌다.
분명 선생님들도 이런 치보를 미워했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치보는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등교했다. 짓궂은 장난으로 수업을 망치는 것이 그 아이가 살아가는 유일한 보람인 것 같았다. 선생님들이 치보를 보는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선생님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무렵, 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학 도형 시간이었는데, 치보가 교실에 갖고 온 거품기의 스위치를 켜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옆자리의 여자아이에게 들이대며 장난을 쳤고, 여자아이는 꺅꺅 비명을 질러댔다. 그 난리를 치니 수업이 될 리 없었다.
그러자 수업 중이던 갈리나 세묘노바라는 여선생님이 갑자기 치보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더 이상 말썽 피우기만 해. 그 불룩한 감자 얼굴을 시머트리symmetry로 만들어줄 테니까” 하고 말했다.
시머트리는 ‘대칭형’이라는 뜻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됐다. 치보까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치보는 싸움을 한 뒤여서 오른쪽 볼이 보라색으로 불룩하게 부어 있었고, 우리는 바로 전 수업시간에 ‘시머트리’라는 단어를 갓 배운 터라 굉장히 신선한 말이었던 것이다. “오른쪽 볼하고 똑같이 되도록 왼쪽 볼에 한 방 먹여주겠다” 하는 틀에 박힌 어투가 아니라 매우 시적인 여운이었기 때문에 모두감탄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 이후 치보가 수업시간에만큼은 조용한 아이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은 ‘갈리나의 기적’으로 교내에서 유명해졌다. 단, 식당의 포크와 나이프가 가끔 몽땅 사라져 모두가 의아해할 때, 옥상에서 치보가 보란 듯이 그것들을 운동장 화단을 향해 던지며 악동의 체면은 유지하고 있어서 모두 묘하게 안심하기는 했지만.
왜 치보는 ‘시머트리 사건’ 이후 수업을 망치는 장난을 갑자기 그만두었을까? 갈리나 선생님의 말은 확실히 박력이 있었다. 선생님의 애인은 플라이급인지 밴텀급인지 되는 권투 선수였는데, 애인과 나란히 서면 선생님이 훨씬 어깨도 넓고 가슴도 두꺼웠다. 그렇게 몸도 말솜씨도 헤비급인 선생님이 치보에게 왜 더 빨리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걸까?
인간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원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치보의 체험을 나의 체험에 끌어다 생각해보니알 수 있었다.
나는 치보가 전학 오기 2년 전 프라하에 살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학교로 처음 전학 갔을 때는 안데르센 동화의 인어공주와 다를 게 없었다. 매일 4시간에서 6시간 동안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에 계속 출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학교 아이들이 짓궂은 장난을 쳐도 선생님께이를 수도 없고, 아이들에게 따지거나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건 정말 억울하다. 제일 억울하고도 서글픈 것은 반 아이들이 웃는데 같이 웃을 수 없을 때였다. 그런 상황이 너무 슬펐다.
어른이라면 가방을 챙겨 집에라도 갈 수 있지만 아직 어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매일 비통한 각오로 학교를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아홉 살인 아이가 어깨 결림과 편두통에 시달릴 정도로 학교 가는 일은 고통이었다.
치보 역시 전학 온 당시에는 나처럼 낯선 환경에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짓궂은 장난으로 수업시간을 때웠던 것은 결국 나의 어깨 결림이나 편두통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갈리나 선생님이 ‘시머트리’라고 한 순간에는 선생님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소리 내어 웃었으니까.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기쁨을 그 순간 치보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치보는 더 이상 장난으로 수업시간을 때우는 행동을 멈춘 게 아닐까.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갈구하는 동물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커뮤니케이션은 불완전한 행위라서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기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커뮤니케이션을 갈구하는 동물이라는 확신이 나에게는 있다. 아마 그런 확신이 내가 통역 일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