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하반기 <반자본 발전사전>,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로 분명한 색깔을 드러낸 아카이브 출판사에서 네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미국 중심의 세계화가 문화의 본성,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배제하는지, 이로 인해 문화의 다양성과 가능성, 인류의 종 다양성과 문화의 탄력성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있는지를 파헤친 논픽션입니다.
저자는 홍콩의 거식증, (쓰나미 이후) 스리랑카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일본에서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로 팔아먹은 다국적 제약회사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가며 세계화의 일방적 문화서사가 몸과 마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단순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치료와 치유라는 동서양 문화 차이에 대한 단순하고 은유적인 접근이 아니라 인간과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상황을 취재하고 분석하는 이야기가 꽤나 신선합니다. 이제 미치는 것도 미국식이라니 입이 씁니다.
서론과 옮긴이의 글을 함께 올립니다. 옮긴이의 글 제목이 '가능한 반론들'이라 서론과 함께 비교해보시면 윤곽을 잡으실 수 있겠습니다. 물론 논픽션의 매력은 취재와 보고이니 본문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론]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가?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미국 문화가 전 세계를 잠식하는 모습에 갈수록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탄자니아의 항만 도시 다르에스살람에 새로 문을 연 미마니 실내 쇼핑몰 앞에서 우리는 기겁한다. 천안문광장에서 맥도날드 매장을 만나거나, 말레이시아에서 나이키 공장을 볼 때도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전 세계의 시각적 풍경은 우울할 정도로 익숙하고 비슷해졌다. 미국인들이 즐겨 하는 오래된 농담, ‘어딜 가든 우리가 있다’는 이제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우리가 세계 다른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값비싼 대가─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의 상실─를 강요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모든 자백과 인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미국이 세계 다른 지역에 미치는 가장 심각한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골든 아치는 우리가 다른 문화들에 미치는 가장 골치 아픈 영향의 상징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인간 정신의 풍경 자체를 불도저로 밀 듯 평탄하고 단조롭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정신에 대한 이해를 미국화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빠져 있다.
이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처럼 보일지 모른다. 설령 그런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60억이 넘는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해진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현상은 정신질환들이 발생하는 세계적인 패턴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년 전부터 섭식장애가 홍콩에서 발생해왔고, 이제 중국 내륙으로 퍼지고 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흔히 진단하는 병이 되었고, 전쟁과 자연재해를 겪은 후에 찾아오는 인간적인 고통의 공통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특유의 우울증이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증가하고 있다.
이런 병들을 발생시키고 유행시켜온 병원균은 무엇인가? 이 병들은 어떤 흐름을 타고 이동하는가? 그 바이러스는 바로 ‘우리’라는 것이 이 책의 전제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인들은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열심히 수출해왔다. 우리의 정의와 치료법은 국제 표준이 되었다. 비록 이것이 최선의 의도에서 나왔다 해도, 우리는 그러한 노력의 여파를 충분히 예측하지 못했다. 결국 한 문화를 가진 한 민족이 정신병을 생각하는 방식─증상들을 분류하고 우선순위를 매기고, 치료를 시도하고,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는 방식─이 질병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 않은가. 세계의 다른 지역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세계가 미쳐가는 방식을 균일화하고 말았다.
오늘날 괄목할 만한 양의 연구를 통해, 정신질환은 때때로 가정하는 것처럼 전 세계에 균등하게 퍼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정신이상은 다양한 문화에서 무한히 복잡하고 특수한 형태를 띠고 출현해왔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아모크’란 정신착란에 걸린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착란에 빠진 사람은 사소한 사회적 모욕에도 장기간 원한을 품고, 일시적으로 맹렬한 살상 욕구를 느끼곤 한다. 동남아시아 남자들은 때때로 성기가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노심초사하는 ‘코로’에 걸린다.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울고, 웃고, 소리치고, 노래하는 등의 분열 증상을 일으키는 빙의현상(또는 신들림), ‘자르’를 전역에서 목격할 수 있다.
각기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는 다양성은 각기 다른 시대에서도 발견된다. 사람들은 개별 문화들의 다양한 종교적, 과학적, 사회적 믿음에 의거해 병든 정신을 인식해왔기 때문에, 한 시대와 한 공간에 나타나는 정신착란의 형태는 종종 다른 시대의 한 공간에 나타나는 형태와 매우 다른 모습을 띤다. 이 다양한 형태들은 때때로 한 세대 만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미친 여행객들》이란 저서에서 이안 해킹은 유럽에서 빅토리아 시대에 젊은이들이 몽롱한 정신으로 수백 마일을 걷는 몽환 증세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고 기술했다. 정신질환 증상들은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번개이고, 특수한 시대 및 특수한 장소의 문화와 믿음이 빚어내는 산물이다. 19세기 중반에는 수천 명의 상류층 여자들이 히스테리성 하지마비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부과된 구속이 얼마나 컸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갈수록 속도를 더하는 세계화는 변화를 몰고왔다. 한때 각기 다른 문화의 다양한 정신이상 개념들에서 볼 수 있었던 놀라운 다양성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미국에서 확인되고 유행해온 몇몇 정신병─우울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특히 신경성 식욕부진증(일명 ‘거식증’)─은 오늘날 문화적 경계를 넘어 빠르게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토착성 정신병들과 치료법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질환 범주와 치료법에 밀려나는 형국이다.
서양의 정신의학이 세계적으로 정신질환의 의미와 치료법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쳐온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양에서, 특히 미국에서 훈련받은 정신보건 전문가들이 정신질환의 공식적인 범주들을 만들어낸다.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정신질환 진단분류체계’인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때때로 정신의학의 성서라 불린다)은 이제 범세계적인 표준이 되었다. 게다가 미국 과학자들과 단체들은 심리학과 정신의학 분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학술지들을 운영하고, 최고의 학회들을 개최한다. 정신질환에 관한 연구 자금을 대고 약물치료 마케팅에 수십억 달러를 쓰는 것도 서양의 제약회사들이다.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나면 서양에서 훈련받은 외상학자들이 달려가 ‘심리 응급치료’를 하고, 정신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치료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관한 가정들을 풀어놓는다.
그들의 생각과 의료 행위는 단순히 문제의 질환들을 묘사하는 증상 리스트를 넘어 훨씬 더 큰 의미를 내포한다. 정신 건강과 치료에 대한 서양의 개념들을 홍보하는 이면에는 인간 본성에 관한 여러 문화적 전제가 깔려 있다. 예를 들어 서양인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종류의 인생 경험이 심리적 외상을 입힐 수 있는가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금욕적인 침묵보다는 말로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는 데 동의한다. 서양인들은, 인간은 선천적으로 허약해서 수많은 감정 경험들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질병으로 여겨야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의 생의학적 접근법이 환자의 증상을 완화시켜주고, 또 우리의 약이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오래된 사회적 역할을 내던지고 개인주의적인 자기 성찰에 몰두하면 정신건강(그리고 현대적 형태의 자기 인식)을 찾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정신에 대한 이 서양의 개념들은 세계의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패스트푸드와 랩음악처럼 매혹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으며, 그런 환경에서 우리는 빠르고 힘차게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
전 세계를 우리처럼 생각하게 만들려는 이 지구적인 노력은 어떤 동기에서 출발하는가? 몇 가지 동기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매우 간단하다. 제약회사의 이익이 그것이다. 자산 규모가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이 복합기업들은 보편적인 질환 범주를 홍보할 만한 동기를 갖고 있다. 그 질환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약들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들은 보다 복잡하다. 오늘날 많은 정신보건 의료인들과 연구자들이 우리의 약들, 질환 범주들, 정신에 관한 이론들을 뒷받침하는 과학이 끊임없이 변하는 문화적 경향과 믿음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 터전을 잡았다고 믿는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말 그대로 정신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뇌의 화학작용을 변화시킬 수 있고, 불구나 기형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DNA 서열을 조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한 세대 전부터 정신질환의 생의학적 개념을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정신질환들도 신체의 질병처럼 임상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그 밑에는 이 같은 놀라운 과학적 진보 덕분에 오늘날 정신보건 의료인들이 선배들의 편향과 실수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실제로 현대의 정신보건 의료인들은 종종 이전 세대의 정신과의사들을 돌아보면서 경멸과 연민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그들이 어떻게 해서 당시의 문화적 믿음에 그렇게 휩쓸렸을까 의아해 한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에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히스테리에 관한 이론들을 문화적 유물로 취급한다. 심지어 불과 15년 전에 갑자기 나타났던 다중인격장애처럼, 최근에 의사의 잘못으로 생겨나 유행한 질환들까지도 고대의 역사로, 지금은 위험하지만 과거에는 안전했던 우회로처럼 여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에서만 발견되는 질병들은 종종 서커스의 막간을 때우는 여흥쯤으로 생각한다. ‘코로’와 ‘아모크’ 같은 질환들은 미국 진단분류체계의 끄트머리(《DSM─Ⅳ》, 845~849쪽)에, ‘문화 구속적 증상들’이란 제목 아래 기술되어 있다. 이 정도라면 ‘이국적이고 신기한 정신병: 1회 관람에 25센트’라는 표지가 붙을 만도 하다.
서양의 정신보건 의료인들은 《DSM─Ⅳ》에 문화 구속적 증상이 나오기 전까지 844쪽에 수록된 질환들은 문화적으로 고안된 정신병 증상들과는 다른 ‘진정한’ 정신질환, 즉 징후와 결과가 변덕스러운 문화적 믿음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질환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 논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그 질환들이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분명 모든 곳의 인간에게 보편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소개된 교차문화 연구자들과 인류학자들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정신질환의 경험이 문화와 분리될 수 없음을 입증해왔다. 우리는 여러 이유 때문에, 예를 들어 개인적인 외상, 사회적 격변, 뇌의 화학적 불균형 때문에 심리적인 흔들림을 겪는다.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는 항상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문화적 믿음들과 이야기들에 의존한다. 빙의에 관한 것이든 세로토닌 감소에 관한 것이든, 그 이야기들은 대단히 극적이고 종종 직관에 반하는 방식으로 질병의 경험을 구체화한다. 결국 우울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심지어 정신분열병처럼 명백해보이는 범주들을 포함한 모든 정신질환은 히스테리성 하지마비, 침울증, ‘자르’와 같이 인간 광기의 역사를 스치고 지나갔던 다른 모든 정신질환들처럼, 모든 면에서 문화적 믿음과 기대의 영향을 받고 그에 의해 구체화된다.
문화가 정신병 환자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언제나 지역적이고 사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비록 이 책은 세계적인 추세를 묘사하지만, 그럼에도 세계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세계적 척도가 아닌) 인간적 척도와 관련된 영향을 드러내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네 나라의 네 가지 질병을 다루기로 결정했다. 내가 이 이야기들을 고른 이유는 정신의학에 관한 서양의 믿음이 어떻게 저마다 다른 흐름을 타고 세계로 이동하는지를 각각의 이야기가 실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빙의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생의학적인 정신병 개념에 밀려나고 있는 잔지바르 섬 이야기에서, 나는 정신분열병과 싸우는 두 가족 이야기를 묘사할 것이다. 또한 홍콩에서 거식증이 발생하는 현상을 보고하기 위해 14세 소녀 찰린 슈 치잉의 마지막 행적을 역으로 추적하고,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매스컴의 관심이 어떻게 그 지역에 서양 특유의 질병을 끌어들였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또 일본에서 벌어지는 항우울제 팍실의 메가마케팅을 해체해, 제약회사들이 어떻게 치료약뿐 아니라 질병 자체를 팔아먹는지를 폭로할 것이다. 2004년 스리랑카에 몰아닥친 쓰나미의 여파는 외상후스트레스라는 진단과 외상의 영향에 대한 서양의 확신을 양손에 무기처럼 들고 재난 지역에 몰려든 외상 상담사들의 영향을 조사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이들 각 장의 맨 끄트머리에서 초점을 다시 서양에, 특히 미국에 맞출 것이다. 먼 해안에서 보면, 정신질환과 인간 정신에 관한 우리 자신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문화적 전제들과 확신들이 숨이 멎을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시점에서 보면 종종, 정신이상과 자아에 관한 우리의 전제들이 참으로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 책에서 교차문화 접근법을 보여주는 정신과의사들과 인류학자들을 통해, 나는 우리가 인류 역사의 주목할 만한 순간에 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정신질환과 정신건강에 대한 매우 다양한 문화적 이해들을 기록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는 동안, 그들의 눈앞에서는 그 차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나는 그들이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불도저 바로 앞에서, 아직 남아 있는 종의 다양성을 필사적으로 기록하는 식물학자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정신병 개념과 다양한 치료법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생물학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현상을 대할 때처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 치유법들 그리고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문화 고유의 믿음들은 멸종해가는 동식물처럼 한번 사라지면 다시는 우리 곁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동식물처럼 정신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도 우리가 그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기 전에 사라질 수 있다. 생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열대우림의 무성하고 활기찬 생물의 다양성 안에는 언젠가 현대 전염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화합물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건강과 질환에 대한 문화적 이해의 다양성 안에는 우리가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되는 지식이 존재할 수 있다. 이 다양성을 지우면 우리 자신이 위험해진다.
[옮긴이의 글]
가능한 반론들
‘옮긴이의 글’을 쓰면서 첫머리에 반론을 소개하기는 처음이다. 대부분은 책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생각을 적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 책은 옮긴이가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과 크게 부딪히는 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진화생물학과 관련된 책을 20여 권 번역해온 옮긴이에게 뇌과학과 생의학의 성과는 거의 절대적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옮긴이는 여러 책에서 프로작을 비롯한 항우울제들의 효과를 극찬하는 글을 접했고, 한편으로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는 치료제가 나오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은 작으나마 지나칠 수 없는 충격을 주었고, 그간의 기대와 희망에 혼란과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가벼운 글이라도 혼란과 의심은 펜을 쥔 손을 얼어붙게 한다. 이 막막함 속에서 옮긴이는 미국 독자들의 평가가 궁금해 amazon.com의 독자서평을 훑어보았다. 수많은 칭찬과 긍정적인 평가들이 이어졌다. 저자의 저널리스트다운 문제의식과 성실하고 세심한 서술 방식에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서평은 저자의 기본적인 관점을 비판한 글이었다. 짧고 단순한 서평이었지만 이 책에 대한 반론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해, 그 서평에 담긴 세 가지 반론을 소개하고 이 책의 내용과 비교 및 재검토하는 것으로 ‘옮긴이의 글’을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정신질환이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이 책의 전제에 대한 반론이다. 모든 인간은 공통의 뇌를 갖고 있고 정신질환은 뇌의 질환이라는 것, 우울증과 양극성 장애(정동장애), 정신분열병과 망상(사고장애), 섭식장애들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스트레스 반응) 같은 여러 질환이 인류의 오랜 역사 기록에 꾸준히 보고되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질환들이 문화와 시대에 따라 어느 정도 다른 형태를 띤다고 해도, 기본적인 양상은 보편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적어도 이 책에 대한 반론으로는 부적합하다. 바로 그것이 생의학적 관점이고, 이 책에서 비판하는 미국식 관점이기 때문이다(이것이 반론이라면 이 책 자체가 그에 대한 재반론이 되므로 무의미한 순환에 빠진다). 생의학적 관점은 정신질환을 뇌질환으로 보고, 생의학적 진단과 치료법을 최우선으로 하며, 특히 뇌의 생화학적 불균형을 바로잡아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홍콩의 식욕부진증과 19세기의 히스테리를 비롯한 여러 사례를 통해 생의학적 관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정신질환들을 소개하고 DSM의 전지전능함을 비판한다. 특히 거식증과 폭식증 같은 섭식장애나 과거 서양의 히스테리와 몽환 증세(1장) 등은 DSM의 진단 기준에서 빗겨나 있는 것이 분명하고, 그런 질환의 생의학적, 뇌과학적 기초가 무엇인지 또는 그런 기초가 존재하는지 불분명하다. 이 질환들과 함께 동남아시아의 ‘아모크’나 중동의 ‘차르’ 같은 지역적인 정신병들이 모두 뇌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생의학적 질병일까? 개인간의 원인이 달라도(예를 들어, 자존감 붕괴와 서양 문화의 영향) 병의 양상이 똑같이 거식증으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생의학적 진단을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진단에 기초한 생의학적 치료법은 과연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은 극단으로부터 한발 물러나는 겸손함을 요구한다.
둘째, 서양의학의 치료법이 만국 공통이 아니라는 전제에 대한 반론이다. 그리고 그 연장 선상에서 생의학적 접근법이 문화적인 차이와 현지 전통을 이해해 문화적 감수성을 충분히 갖춘다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임을 강조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정신질환의 문화적 차이를 설명할 때, 과학적 증거나 통계 또는 충분한 비교연구 등을 소개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몇 개의 일화와 그 자신의 경험, 그리고 몇 권의 저서에 불과하다. 그것을 기초로 DSM의 중요성을 깎아내리거나 무시한다면 매우 위험한 시도일 것이다.
이 책의 강한 어조와 저널리즘에 가까운 서술 방식 때문에 저자가 마치 DSM을 전면 부인하고 새로운 교차문화적 의학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의학적 관점에 반하는 명백한 사례들과 개인적인 관찰이 무의미해지진 않는다. 물론 저자의 보고와 결론 사이에 과학적 공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한 증거와 통계 또는 비교연구를 수반해야 하는 연구논문이 아니라 관찰과 경험에 기초한 보고서이므로, 그런 공백 때문에 이 책의 가치가 희석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관찰과 서술이 충실하다면, 또 직관과 상상이 깊고 날카롭다면 그런 공백을 가로지르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파브르의 곤충기는 충실한 관찰과 기록만으로 훌륭한 과학을 만들어냈고, 아인슈타인의 직관과 상상은 우리에게 상대성이론을 가져다주었다.
셋째, 약물치료와 거대 제약회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대해, 현대의 뇌과학과 약물치료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저자도 그걸 부인하진 않는다. 다만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뿐이다. 한 국가의 어떤 문제점을 지적할 때 국가의 기본적인 기능을 되짚을 필요는 없다. 더 나아가 한미 FTA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시점에서 미국 제약회사들의 감춰진 면모를 볼 수 있는 4장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더욱 의미심장하다. 백혈병을 비롯한 난치병 치료제들의 약가 협상을 둘러싼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오늘날 거대 제약회사들은 성실한 연구 개발보다는 대학 연구소를 뒤지며 연구 성과를 ‘수색’하고 매입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그들이 약가 협상의 근거로 내놓는 ‘연구개발비’를 우리 정부가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뼈아프게 들린다. 그뿐이 아니다. 제약회사들이 실제로 치료제의 부작용을 감추고 데이터를 왜곡한다면(4장), 이는 도덕적인 수준을 넘어 법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는커녕 그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번역하는 중간에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를 받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의문이 들었다. 과연 DSM의 진단과 치료법이 그 장병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혹시라도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스리랑카에서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불편과 번거로움을 초래하거나, 혼란을 가중시키거나, ‘괴물’을 일깨우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인간 사회에서 과학보다 신뢰할 만한 것은 드물지만, 맹신을 견제하는 문제의식은 항상 필요하다. 이 책이 바로 그것을 일깨운다고 확신한다.
2011년 2월, 김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