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 오후 4시 반, 여름 날씨라고 하기엔 바람이 심심찮게 불고 가을이라 하기엔 여전히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당기는 긴 햇살을 맞으며 약속 장소로 걸어가는 길. 봄날인양 원피스 자락을 하늘거리는 ‘작가 목수정’을 만났다. 알라딘 인문학스터디 강의가 6월 3일이었으니 정확히 세 달만의 만남, 강의에서 들려준 ‘야성의 사랑학’은 그 사이 <야성의 사랑학>으로 무르익었고 그는 한국에서 파리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작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으로 우리가 목수정을 발견했다면 이번 책은 그가 발견한 우리의 스산한 풍경이지 않을까. ‘야성의 사랑학’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지 그에게 물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알라딘 인문MD 박태근)
(이 인터뷰는 책이 출간되기 전에 진행한 ‘사전 인터뷰’이며, 진행자는 원고의 절반 정도를 미리 읽고 진행했다. 알라딘과 그의 첫 번째 인터뷰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www.aladin.co.kr/author/wauthor_interview.aspx?AuthorSearch=@827060)
우리 시대의 ‘사랑학 개론’을 시작하다
첫 질문은 편집자께 드리겠습니다. 지난 목수정 선생님과 알라딘의 인터뷰에서 이번 책의 단초를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생각의 고리를 잡아 선생님을 만났는지 궁금한데요.
인터뷰 말미에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같은 사회적 질병을 앓고 있는데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겠느냐”, 선생님께서는 “마음껏 달리면서 당신 속에 있는 야성과 만나라, 당신의 야성이 해답을 줄 거”라고 말씀하셨죠. 흔한 자기계발서나 심리치유서에서는 만날 수 없는 대답이었어요. 그리고 ‘사랑학’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이런 분이라면 임기웅변 같은 사랑의 잔기술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바꿔낼 만한 제대로 된 사랑의 기술을 말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이야기가 시작된 거죠.
선생님께서도 지난 인터뷰에서 그런 주제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셨는데요. 이런 제안을 받고 바로 쓸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셨나요?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은 게 작년 3월인데 5월부터 집필을 시작했어요. 다음 책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그 제안이 불을 당겨준 셈이죠. 사실 문화정책에 대한 책과 사랑학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방향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거든요. 주변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특히 첫 책에 추천사를 써주신 박재동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까지 주시며 재촉을 하셨어요. 선생님도 그 나이에 가장 결핍된 부분, 가장 아쉬운 부분이 “어떻게 사랑하는가”의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게 이 부분인데 우리는 어디서도 배우지 못하고 탐구할 자유도 얻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거죠. 하루아침에 할 수 없는 일인데도, 당장 시작해야 한다며 강하게 말씀을 하셨어요. 사실 이 주제는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뒤에도 공부하면서 새롭게 쓰고 싶은 마음이에요. 이 책은 그 시작이죠. 대학 시절부터 고민한 문제지만 구체적으로 책을 쓰게 된 원동력은 프롤로그에 쓴 문제의식이에요. 그걸 화두로 삼아 내가 고민해왔던 사랑학에 대한 얘기를 풀어보자. 그렇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참 많이 부족하고 미완성인 상태에서 시작한 책이에요.
"슬픈 풍경들에 부대끼던 마음이 차츰 무뎌질 무렵, 하나의 부재가 선연히 고개를 들었다. 거리에서 마주친, 자신들의 가슴을 불시에 두드리는 여인에게 다가가 차 한 잔 할 수 있냐고 청하는 남자들의 부재. 그걸 어떻게 발견한 걸까? 3개월 남짓 면밀한 관찰자의 입장에 있으면서,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나는 광경을 전혀 목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모래바람 이는 황량한 산하와 이미 오래전에 방전되어 버린 에너지를 통찰했다면 믿으시려나."(8쪽)
말씀처럼 프롤로그의 첫 장면이 중요하고 또 강렬한데요. 제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 같습니다. 제가 주변을 탐문해본 결과 대략 96, 97학번까지는 그런 경험이 있는데 99, 00학번에 접어들면서 그런 일을 보지 못했다는 대답이더군요.
네, 의외로 세대적인 경계가 아주 선명해요. 그런데 부끄러움의 측면에서 보면 이전 세대도 마찬가지거든요. 제 기억을 돌아보면 어떤 남자가 학교까지 작심하고 쫓아왔는데, 제가 그 사람이 쫓아오는 걸 알고는 지하철에서 내려 다음 열차를 탔거든요. 그 사람도 따라 내려서 또 같은 열차를 탔는데 문에 딱 끼인 일이 있거든요. 그런 수모를 겪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에요. 게다가 그때는 전화번호를 달라는 말을 할 수도 없고, 무조건 시간 있으면 차 한잔 하자, 이런 거니까요.
본문에서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을 말씀하시잖아요. 우연히 마주친 인연을 찾아주는 코너가 있다고.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환경하고는 다른 듯한데 이것 역시 이성과 야성의 문제로 볼 수도 있을 듯해요. 언론이라는 매체가 다뤄야 하는 대상, 시각 이런 부분에 대한 사회적 기준과 틀이 일정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일정한 엄숙주의에 묶여 있는 거죠. 모두가 베일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대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너는 어떤 일을 하는 것과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 가운데 뭐가 더 중요해?’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저는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거든요. 그 이상 가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대답을 하고 나서는 잠깐 후회도 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맞는 얘기 같은 거예요. 내가 뭘 하든지 그걸 함께 나눌 사람이 곁에 없으면 즐겁지 않거든요. 영원할 필요는 없지만 사랑으로 서로를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상대와 함께 있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이런 능력을 배양하는 일도 중요하고요. 물론 그런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사랑을 키워내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죠. 삶의 퀄리티를 크게 좌우하는 일이니까요.
지난 인터뷰에 우리가 범상치 않는 사람에게 ‘예술하세요?’라고 물어본다는 얘기 있잖아요. 다들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걸 읽으면서 사랑, 정치, 예술이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 이 책의 구성도 그렇지 않을까 짐작이 가는데요.
네, 맞아요. 문화 내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쌓아왔던 것들, 족쇄가 되는 것들을 끊어내는 해방의 과정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이 예술이고 사랑이고 정치죠. 이 세 가지가 제대로 작용을 한다면 말이죠.
가장 자연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가장 야성적인 것이 가장 문명적인 것이다
<야성의 사랑학>, 제목이 강렬한데요.
제목이 마음에 들어요?
네, 일전에 출판사에서 제목에 대해 물었을 때 좋다고 생각했어요. 야성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은 아니잖아요. 사실 ‘야성’과 ‘사랑’을 함께 생각하면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과격하고 치명적인 사랑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야만’과 ‘야성’을 예민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을 듯한데요.
야성이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말이 자연인 것 같아요. 타고난 본성, 타고난 직관. 그러니까 일고여덟 살짜리 아이들이 보여주는 본능적인 반응을 보면 되는데, 아이들은 정말로 자연이 하는 소리를 듣나 봐요. 우리는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라는 걸 뒤늦게 막 깨우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아는 거예요. 아이와 길을 걷다가 껍질이 벗겨진 나무를 봤는데 “엄마, 저 나무 아프겠다. 얘 이렇게 상처 나서 아프겠다.” 비가 보슬보슬 오고 있었는데 “비야, 사람에게 내리지 말고 얘한테 내려. 얘가 너무 목이 마를 거야. 빨리 커야 해.” 이렇게 말을 해요. 옛말에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도 그런 연구 결과들이 있잖아요. <물은 답을 알고 있다> 같은 책도 있고요. 우리가 고맙다는 말을 하면 물이 가장 아름다운 결정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가이아 이론도 있고요.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지식으로 습득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있는 거예요. 이걸 교육이라는 틀로 묶어 놓는데 사실은 ‘그 상태로 아이들에게 있는 것’, 그게 인간의 본성, 야성인 거지요.
그 패턴이 사랑에도 적용된다는 말씀이죠?
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슴이 쿵쾅거리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취향이 있어요. 아무리 잘생긴 애가 있어도 모두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요.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방식이, 문화가 있는 거죠. 저는 오늘날의 교육이 그걸 죽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서 성인이 되었을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봐요.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본능을 대신해서 스펙이 내 짝을 찾아주는 촉수가 되는 거죠. 취향이 다양하지 못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획일화되는 현상이 야만이고, 자연에 가까울수록 야성이면서 진정한 의미의 문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책에서 콘라드의 거위를 예로 드는데, 거위들도 짝짓기를 할 때 모든 문화적 코드를 동원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가장 많이 파괴된 동물이 인간이라는 거죠. 제 이야기와 연결해보면 짝짓기나 살아가는 방식에서 오히려 거위 같은 동물이 인간보다 문명화되어 있다는 거예요.
문명과 이성, 이성과 야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발상이군요.
우리 인간들은 많이 먹으면서 한편으로는 다이어트로 살을 빼는, 이런 일들을 하잖아요. 너무 많은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그걸 정수하기 위해 돈을 쓰고. 굉장히 어리석은 일을 끊임없이 하는 존재예요. 어쩌면 가장 고등한 삶의 방식은 식물일 수 있어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가장 적게 소비하고 가장 오래 평화롭게 생활하는 거죠. 자연이 만들어낸 것 가운데 촌스러운 건 하나도 없어요. 정말 신기하게 모든 자연은 우아함을 갖고 있거든요. 가장 자연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가장 야성적인 것이 가장 문명적인 것이라는 말이죠. 현재 한국사회에서 제가 보는 가장 끔찍한 야만적인 풍경은 학원버스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예요. 전교 1, 2, 3등의 이름과 학교가 적혀 있는데, 글을 깨치기 시작한 아이들부터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가 보잖아요. 예전에는 적어도 이름 한 글자는 지웠던 거 같아요. 본격적인, 거침없는 경쟁 사회가 된 거죠. 이런 게 야만이에요.
그럼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쉬어가는 질문 하나 드릴게요. 선생님의 소울메이트, 빌헬름 라이히는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사실 한국에 있을 때는 몰랐어요. 그런데 희완이 저에게 당신은 하이쉬를 만나야 한다, 이렇게 자꾸 말하는 거예요. 라이히가 프랑스어로 하이쉬거든요. 그때만 해도 누군지 모르다가 어느 날 하이쉬가 라이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처음에는 라이히 전기를 봤어요. 그런데 제 자신이 라이히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희완이 저를 잘 본 거죠. 평소에 한국 사회의 위선적인 모습, 그 중에서도 성에 대한 위선이 가장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을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부분이 대화 중에 튀어나왔겠죠. 그러면서 희완이 제가 말하는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이 있다고 알려준 거죠. 라이히의 책을 읽으면서 빙의된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라이히가 성과 정치를 결합하면서, 그러니까 프로이트와 맑시즘을 결합하면서 양쪽으로부터 다 버림을 받거든요. 우리 사회에서도 계급 문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여전히 개량이라는 비판을 받잖아요. 제가 레디앙에서 겪은 수모도 운동권 내에 여전히 살아 있는 엄숙주의 때문이었죠. 이런 주제를 감히 신성한 운동의 공간에 퍼질러대는 저라는 인간에 대한 단죄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받아야 할 비판과 수모가 라이히의 삶에서 보였던 거죠. 라이히는 망명을 다니면서도 자기 주장을 놓지 않았고, 결국 감옥에서 죽었어요. 정말 ‘혼자’였죠. 한 사람이라도 마음 깊이 이해해줘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랑을 좀먹는 것들, 사랑을 일깨우는 것들
책이 3부로 되어 있는데요. 2부 ‘위선, 연애불능의 사회’에서 ‘사랑을 좀 먹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주시잖아요. 특히 유교와 효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시는데, 한국사회에서는 적어도 심성적으로는 여전히 이 가치가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잖아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 그러니까 사랑에서는 접점은 전혀 보이지 않고 결절 지점만 보이거든요. 혹 다른 맥락에서 일말의 가치를 찾아볼 수는 없을까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말이죠.
가장 큰 문제는 효란 단어에 너무 많은 것들이 뭉뚱그려져 있다는 거예요. 효가 뭐냐고 물으면 ‘부모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거든요. 대부분 사랑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면 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효라고 따로 불러야 하냐는 거죠, 다 똑같은 사랑인데. 왜 그토록 각별한 작명이 필요했느냐 하면 사실 효는 도리거든요, 사랑이 아니라. 도리는 ‘그럼에도 불구하는 지켜야 하는’ 거예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자식에 대한 엄청난 권력을 갖고 행사하는 사람들이죠. 제 경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진짜 내가 쓰고 싶은 걸 다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내 안의 도덕의 틀, 자기 검열을 엄마라는 존재가 계속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유교가 정말 작동을 잘 한 거죠.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가정으로 위임하면서 전체 가족들의 위계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 셈이니까요.
효가 당연한 걸 다른 것으로 구분하면서 권력을 획득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효, 아니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포함하는 ‘사랑’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사랑의 기본적인 조건은 ‘자발성’이에요. 그렇지 않은 사랑은 없잖아요. 그런데 도리는 자발성과 무관한 개념이거든요. 자발성에 맡겨두었을 때 작동하기 너무 힘들기 때문에 도리로 만들어 놓은 거죠. 어쩌면 효가 부모에 대한 사랑을 좀 먹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하고 싶다가도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예를 들면 추석 때 찾아뵙고 싶지만 못 갈 수도 있잖아요. 불효자가 되는 거죠. 그런데 불효자가 되는 건 내 부모와의 관계뿐 아니라 내 부모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지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거든요. 저는 효라는 게 불효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검열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효가 불효를 양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이게 사라지면 더 좋아질 거라고 봐요. 검열이 있으면 검열의 안과 밖이 생기지만, 검열이 사라지면,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것, 그리운 사람,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게 되겠지요. 효도하기 위해 그 어떤 모험도 하지 못하는 사람, 효도하지 않기 위해 자기 인생을 일부러 망치는 사람은 이제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2부에 있는 ‘언어에 담긴 성의 사회적 온도차’에서 프랑스나 스페인 말은 남녀 성을 구분한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몰랐던 사실이 아님에도 새롭게 다가왔거든요.
저는 여성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언어를 배울 때 맨 처음 검열하는 건 어떤 명사에 남성을 붙이고 어떤 명사에 여성을 붙이는가 하는 부분이에요. 독일어는 하늘에 여성을 붙이는 유일한 언어예요. 대부분의 언어에서 하늘은 남자고 땅은 여자거든요. 동양의 언어들도 겉으로 드러나 있진 않지만 감춰져 있고요. 저는 성에 주어진 계급적 의미들을 가장 먼저 관찰했던 것 같은데, 결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구분해서 부르고 남자는 구분하지 않는 나라가 여럿 있어요. 프랑스의 마담(madame), 마드모아젤(mademoiselle), 므슈(monsieur)도 그렇죠. 한국에는 처녀, 총각, 아줌마, 아저씨가 있으니까 덜 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웃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모든 종류의 순결, 정조에 대한 요구는 여성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저는 순결이란 단어가 여자에게만 있는 단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20대가 되어서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던 거죠. 그게 바로 여기서 드러나더라고요. 여자는 언어 자체가 결혼 전과 결혼 후를 구분하고 남자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세상의 모든 언어가 이걸 기준으로 여자의 의미를 매겨왔고 본질적으로 성에 대한 억압은 오로지 여성에 대한 억압이었다는 걸 그런 언어를 통해서 다시 느꼈어요.
하나의 명제로 제시하신 게 ‘성과 애는 결합시키고 성과 경제는 분리해야 한다’는 말인데요. 이 책에서 문제제기 하신 부분이 해결되려면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명제의 반대 상황이 주류 사회에서는 하나의 포맷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제도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성평등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아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중요한 지향점이란 말이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성적 억압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에요. 여성을 덜 억압하는 사회가 되면 성적 억압이 줄어들고, 이게 양성 평등에 가까워지는 길이거든요. 사실 능력이나 참여에 있어 남여는 이미 동등한데 사회는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악랄하게, 외환위기 이후에는 더 극심하게 차단하고 있거든요. 이 부분이 제도로 보장되면 바로 성과 경제가 분리되는 거예요. 여자들이 혼자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비혼모가 되었을 때 85%의 여성이 아이를 낳길 원해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이들에 대한 시선이 따갑지만, 정책적으로 비혼모에게 일정 기간 동안 지원을 해주는 제도가 생겨서 출산과 양육을 위한 경제적 여건이 마련된다면, 그들은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낳으려는 사례가 많다는 거예요. 이게 프랑스의 모습이기도 하고 러시아 혁명 직후의 모습이기도 하거든요. 사소한 제도 하나가 현상을 확 바꿀 수 있다는 거죠. 관념적인 게 아니라 제도적인 장치로서 바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에요. 흔히 관념적 혁명이 이루어져야 제도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제도가 움직이면 사람들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아요. 민주노동당의 경우를 봐도 처음 국회에 입성했을 때 사람들이 이런 당이 있는 줄도 모르다가 국회의원 10명이 되니까 한 달 만에 지지율이 25%로 뛰었거든요. 내심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주저하던 이들이 너도나도 지지하게 되는 상황인 거죠.
제가 차례를 보고 얄팍한 생각으로 이걸 먼저 읽어야지 했던 꼭지가 ‘야성을 일깨우는 아홉 가지 방법’인데 아쉽게도 이 부분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힌트를 좀 주시지요.
제가 첫 번째로 꼽은 게 접촉이에요. <감각의 박물학>을 쓴 다이앤 에커먼의 이야기인데, 생명체에 있어 접촉은 태양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거예요. 애정은 추상적일 수 있는데 이건 직접적인 거죠. 아무리 사랑해도 직접 안아주지는 않는,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이 한국에는 진짜 많아요. 지금도 접촉이 전혀 없어요. 이게 알게 모르게 어떤 한이 쌓이는 것 같아요. 내가 왜 그렇게 20대에 애정을, 사랑을, 연애를 갈구했을까 생각을 해보면, 본능적으로 요구했던 접촉의 결핍이 쌓여온 결과로 보이거든요. 실제로 제가 몇 가지 사례를 들었는데, 12세기 여러 나라를 점령했던 하인리히 2세의 실험이 대표적이에요. 아이들이 어떤 접촉도 없을 때 처음 하는 말이 무엇일까 알아보기 위해 어떤 접촉도 없이 먹이기만 했는데 그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거예요. 또 다른 사례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에서 낙태를 금지하고 여자들에게 아이를 5명씩 낳으라고 강요한 일인데요. 아이가 늘어나니 결국 한 보육사가 100명이 넘는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때 거기서 양육되었던 많은 아이들이 다른 나라로 입양이 되었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자폐증을 앓았어요. 사실 사육에 가까웠던 거죠.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아주 살벌한 관계를 형성하는 가정의 아이들은 성장기에 성장이 멈추기도 해요. 불안이나 공포 속에서 접촉 없이 자란 아이들 말이죠. 반면에 꽃향기가 있는 오일로 마사지를 해주면 치매가 호전이 된다고 해요. 아이들이건 어른이건 접촉이 생명과 같다는 거죠.
접촉이 생명과 같다, 선생님께서도 이 방법을 실천하고 계신가요.
저도 어쩌면 접촉을 많이 할 수 있는, 많이 하는 사람과 살고 있기 때문에 10년, 20년 전보다 야성이 발달한 것 같거든요. 이게 머릿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 아이한테는 널 만지지 않는다는 게 무척 슬픈 일이더라고요. 이 아이는 접촉이란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한 아이인데 이게 없으면 엄청난 형벌인 거죠. 자기가 받아야 할 접촉의 함량을 인지하면서 요구하는 삶. 그러면서 명랑하고 쾌활하게 성장하는 거죠. 직관이 잘 발달하고요. 직관이 발달하려면 오감이 발달해야 하거든요. 현대인이 가장 덜 발달한 부분이 촉감이라고 생각해요. 내 손끼리 부딪치는 게 아니라 남과 맞닿으면서, 정 어려우면 마사지라도 받아야 하는 거예요. 나를 안아주는 연인이 내 곁에 없다면 마사지를 받고 해주는 감각을 일깨우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도 시도할 필요가 있어요.
나머지 여덟 가지 방법도 궁금한데요. 선생님께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중년의 사랑, 노년의 사랑도 들려주실 거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알라딘 인터뷰의 공식질문입니다. 우리의 야성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몇 권 추천해주시지요.
우선, 조금 전에 말씀드린 <감각의 박물학>이 있고요. 리처드 윌킨슨이 쓴, <평등해야 건강하다>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평등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거든요.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도 추천하고 싶어요. 저자 A.S 닐은, 멀리서나마, 라이히를 끝까지 지지하고 격려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고, 라이히가 생각한 방식으로, 그리고 제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대로 학교를 운영한 사람이죠. 모든 금기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열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해줘요.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는 2년 전에 선물을 받았는데 최근에야 읽었어요. 이 책을 읽고 책을 쓰면 더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좋은 책이에요. 조기유학을 계획하는 모든 소녀들,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꾸는 모든 제3세계의 여자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에요.
재미난 말씀 고맙습니다. 책이 나오면 많은 독자들과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서울과 파리를 잇는 새로운 접촉의 방법을 고민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