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고전을 대신 읽고 핵심 개념을 쏙쏙 설명해준 뒤 한국 사회의 현재성에 비춰 진단과 처방까지 내려주시겠다니 이런 보석 같은 분..
1장까지 읽었고 나머지 부분을 읽기 전에 혼란스런 머리를 정돈하기 위해 밑줄 그은 부분들을 가져온다.
(36)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는 사회경제적 변화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집단이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에 분노를 투사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사회적 현상이다. 여기서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감정 전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들이 사회적 약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격차가 줄고 있으며, 특히 그들에 대한 공격이 사회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라는 문화적 코드와 특정 시기 민주적 변화에 대한 반발이 겹친 가운데, 사회문화적으로 공격이 용인되는 취약한 집단으로서 여성, 그리고 이 취약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페미니즘과 그것을 해체하려는 여성운동이 공격의 목표물로 떠올랐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점은,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에 대한 공격을 사회적으로 허용하거나 인정하는 정치적 맥락의 중요성이다. 이런 공격을 용인하는 정치적 맥락 속에서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는 힘을 갖는다. 따라서 그러한 정치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을 때, 즉 어떤 정치세력도 이런 공격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정치적 주장으로 승인하지 않을 때, 안티페미니스트 세력도 존재감을 드러내기 어려울 것이다.
백래시의 정동에는 '르상띠망'이 있고 이러한 정동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 강화된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의 비대한 자아감과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현실 간의 부조화는 개인에게 불안과 좌절을 야기한다. "개인은 홀로 세계의 불확실성에 맞서고 절대적인 책임을 지지만, 명목적인 개인일 뿐 실질적 의미에서 자신을 실현해갈 수 있는 힘(능력)은 갖지 못한다(36)." "심리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못하고, 현실을 왜곡시켜 불안에서 벗어나고 체면을 유지해 자기를 보존하려는 무의식적 책략(36)"으로 "내면의 위협적 충동을 초자아가 수용 가능한 하위의 대상에게 분풀이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보다 약하거나 사회적으로 허용된다고 여겨지는 약자로 목표를 바꾸어, 관련 대상이 아닌데도 분노를 투사해 풀어버리는 행동(36)"이다. "나의 분노를 투사할 누군가로서,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 제공자로서 '그들'이 지목된다(11)." 여기서 '그들'은 (아니나 다를까 또!) 여성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왜 이토록 현 정권을 우려스러워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현 정권이 단순히 무능하기만 했다면 이렇게 걱정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기조로 재난을 방치하고, 복지를 축소하고, 근로시간 제도를 역행시키는 등 사회경제적 환경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어 개인의 고통을 가중하는 이 정권은 그러한 고통을 야기한 원인이면서 엉뚱한 곳으로 책임을 돌려 혐오를 부추긴다. 즉, 이 정권은 사회적으로 여성혐오를 승인하고 있다.
여성혐오와 백래시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성혐오는 일상적이고 미묘하게, 표식 없는 규율 양식으로 작동하는 구조화된 위계이며, 백래시에 선행한다(27)." "이에 비해 백래시는 정확하든 아니든 여성들이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는 지각에 의해 촉발된다(28)." 백래시는 '교정적인 것'과 '선제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교정적 백래시가 여성운동의 성취가 일정 수준 달성된 상황에서 이를 무화하려는 시도라면, 선제적 백래시는 여성 운동의 성과가 가시화되기 전에 미리 제압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29)." 여성혐오 - 선제적 백래시 - 교정적 백래시 순으로 발동되는 것이다.
이때 백래시는 두 가지 양상을 띤다. "여성운동의 특정 이슈, 의제, 성과를 둘러싸고 일시적이거나 비교적 짧은 기간에 격렬히 진행되며 폭발적인 힘을 갖기도(25)" 하는 1) 일시적 반격으로서의 백래시와 2) 일상적, 지속적 공격으로 나타나는 백래시이다. "특별한 계기 없이도 여성 정치인들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개인적인 괴롭힘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다(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