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리처는 집도 없고 짐도 없는 극강의 미니멀리스트이다. 옷은 사서 입고, 입던 옷은 세탁하지 않고 그냥 버린다. 그런 그가 칫솔만큼은 주머니에 꼭 챙겨 다니며 이를 닦는다는 다락방님의 제보에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다.
소설 속 잭 리처의 외모 묘사를 보면, 신장 195센티미터, 체중 108킬로그램, "얼굴은 마치 재능은 뛰어나지만 시간이 별로 없는 조각가가 돌을 깎아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평평하고 각진 곳이 많았다(320)"고 되어 있다.
이 묘사에 가장 부합하는 것은 미드 <리처> 속 잭 리처이다.
영화 <잭 리처>에서 잭 리처 역을 맡은 톰 크루즈는 생김새도 피지컬도 소설 속 묘사와는 판이하다. 특히 어디가 그렇게 다른 지는.. 읍읍.. 머리부터 줄자로 재어 수작업으로 신장 150센티미터를 뚝딱 맞춰주는 <61시간> 속 빌런 플라토가 떠올라 언급을 자제한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놀드 슈워제네거 재질의 저 남자도 한국 사랑이 남다른 것 같은 이 남자도 아닌 미드 <캐슬> 속 추리소설 작가 캐슬이다.
이상하게 이 '희고 말랑한 약골의 사내'가 잭 리처에 겹쳐지는 것이다.
(19) 특히 그가 예의가 바르고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친절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말이다. 그만한 덩치의 사내가 거칠고 상스럽다면 불안하고 두려운 분위기가 조성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만한 덩치의 사내가 깍듯하고 정중하다면 매력적으로 비친다.
정확히 이 부분에서 드라마 <캐슬>의 기저에 흐르는 유머러스하지만 따뜻하고 진중한 분위기와 그런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캐슬이란 인물이 연상되었다. 내가 잭 리처에게 빠진 지점도 이와 맞닿아 있다.
(104) 이불 속은 따뜻했지만 방은 추웠다. 밤 사이에 난롯불이 꺼진 것 같았다. 리처는 예의바른 손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골똘히 고민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난로의 통풍조절기를 열고 장작을 더 넣어야 할까? 그러면 식구들이 고마워할까? 아니면 그건 너무 주제넘은 것일까? 혹시 그랬다간 이 집의 난방 주기를 흐트러뜨려 2주일 후에는 집 주인이 한밤중에 집 밖에 쌓여 있는 장작더미를 가지러 가야 하는 건 아닐까?
결국 리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는 턱까지 담요를 바짝 끌어당겨 덮은 다음 눈을 감았다.
현실에서 만났으면 답답해하며 "그냥 장작 넣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맘에 들었다. 난 왜 이런 게 좋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이 생각의 흐름 전체가 정확히 내가 생각하고 행동했을 방식과 흡사했다. 정작 집주인은 그렇게까지 개의치 않을 난방 주기까지 고려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적극적인 비행동. 민폐를 끼치느니 차라리 춥고 말자는 결정까지. 그냥 딱 나다. 그만 내적 친밀감이 돋아버렸다. 나는 나와 유사하게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리처의 행동엔 허세와 과잉이 없다. 주어진 조건과 가진 역량 내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생각을 종합해서 가능한 최적의 대응을 한다. 리처가 가진 똑똑함의 본질은 자신과 주위 세계를 정확히 측량하는 능력이다. 이건 정말이지 갖기 어려운 능력이고 내가 그에게서 느낀 섹시함의 팔할은 다 여기서 왔다.
리처에게 반했던 또다른 포인트는 누구와 붙여놔도 대화가 좋다는 것이었다. 수잔 터너 소령과 결혼 밀당도 좋았지만, 재닛 솔터와의 대화도 맘에 들었다.
(224) "늘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호의를 거부하나요?"
"대개는요."
"그렇다면 그쪽도 그쪽 집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군요."
"그럴 겁니다. 하지만 애초에 별로 중요한 사람들도 아니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집안 사람들은 악당들이었지요."
그 유명한 결혼 밀당은 이런 식이다.
(262) 반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밖에 다른 건요?"
리처가 물었다.
"자네 결혼했나?"
그녀가 물었다.
"선배님은요?"
"안 했지."
"한 번도?"
"한 번도."
"별로 놀랍지도 않네요."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을 읽고 뜻밖에 <닥터스>의 김래원이 떠올라버리고 말았는데.. (응 그거 아니야) 혼자 괴롭기 괴로워서 공유해본다.
"잘 지내셨어요?"
"결혼했니?"
"아니요."
"애인 있어?"
"아니요?"
"됐다 그럼."
수잔 터너 소령의 결혼 여부는 451페이지에서 밝혀진다(이 부분의 둘의 대화가 아주 미쳤다). 궁금하면 읽어보시길(어서 이 괴로운 천국으로 오세요)!!
덧 1.
(53) "지금 이게 춥다고요?"
"따뜻한 건 아니죠."
"이 정도면 약과입니다."
"알죠." 리처가 말했다. "한국에서 겨울을 나 봤으니까. 이것보다 훨씬 매섭죠."
"그런데요?"
"군대가 따뜻한 외투를 지급해줬거든요."
"그리고?"
"그리고 한국은 최소한 재미있기라도 했죠."
리 차일드 님이 겨울 한파 때 철원에 계셨는지 이런 식으로 한국의 추위를 들먹이며 '춥부심'을 부리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런데 너네 사우스다코타 거기 영하 35도라며, 바람 불면 체감온도 영하 45도. 우리 그 정도는 아닌데?
덧 2.
미드 <캐슬>에는 캐슬의 포커 친구로 실제 작가들이 등장한다. 이 중엔 제임스 패터슨과 마이클 코넬리도 있다. 여기 리 차일드도 등장했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보다.
덧 3.
위의 세 권은 읽어서가 아니라 중고로 사서 상태가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