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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할 여자들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과학기술사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2년 9월
평점 :
1/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과학과 혁신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경제학과 문화발전에 있어 한 번쯤 되짚어 봐야 할 논점은 없을까? 20세기 이후 정체기에 접어들고 있는 과학 분야에 있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2/
여행 가방에 바퀴를 다는 데 왜 5000년이나 걸렸을까?
전기차가 이미 100년 전에 유행했다고?
AI는 왜 체스는 이기면서 청소는 못할까?
나사는 어쩌다 우주복을 여성용 속옷 재단사에게 맡기게 되었을까?
어딘가 비슷한 듯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질문을 보고 누군가는 의아해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한 번쯤 비슷한 의문을 가져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질문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는데,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은 그 어느 누구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 자부한다.
위 질문들이 하나로 귀결되는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여성적인 것을 복원시키는 것, 지금까지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남성성 중심의 개념을 바로잡는 것을 시작으로 새롭게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역사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 현재, 미래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어 반박 불가한 여러 논점을 흥미롭게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자연스럽게 사회적 관습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묻어두고 있던 의식과 관념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유쾌하고 명확한 논리에 나도 모르게 설득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의식 너머 뿌리 깊이 박힌 고정관념과 남성성이 얼마나 많은 혁신과 과학발전, 경제학,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는지를 하나하나 되짚어보면서 참 멀리도 돌아왔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어느 정도 간접적인 영향은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너무나도 명백한'것을 코앞에서 놓쳐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보고 새삼 사람들의 인식이 과학발전의 방향과 양상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는 몇 가지 놀라운 사례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었는데, 먼저 바퀴 달린 가방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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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달린 가방은 발명이 얼마나 느리게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너무나도 명백한'것이 코앞에서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그걸로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영겁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우리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다.
1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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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그 가방이 남성성에 관한 지배적 견해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명백히 괴상한 일이다.
3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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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며, 남성은 힘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원초적인 생각들로 인해 바퀴 달린 가방의 등장은 꽤 오랜 시간 눈앞에 두고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방을 직접 나르기보다 편리함을 우선하는 남성 소비자를 상상할 수 있게 되고, 혼자 여행하는 여성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서 마침내 바퀴 달린 가방은 진면목을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뛰어넘어 바퀴 달린 가방의 유용함이 사회적으로 인식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요컨대 여행 가방은 우리가 젠더에 대한 관점을 바꾸었을 때, 남자가 짐을 들어야 하고 여자의 기동성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바닥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젠더는 왜 가방에 바퀴를 달기까지 5000년이 걸렸느냐는 수수께끼의 해답이다.
또 다른 예시로 전기차에 대한 일화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우리는 전기차가 일론 머스크에 의해 발명되고 유행을 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미 100년 전 전기차는 이미 유행했던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것이 왜 발전을 거듭하지 못하고, 휘발유 차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서도 젠더 이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자동차 산업에서 전기차는 여성을 위한 차, 휘발유 차는 남성을 위한 차라는 인식이 뿌리 깊이 박히면서 전기차가 여성적 장식으로 여겨지면서 결국엔 사장되고 만다. 경제적으로나 안전성 면에서 분명 휘발유 차보다 전기차가 훨씬 앞서 있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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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편안함은 그토록 오랫동안 최첨단의 기술 혁신이 아닌 여성적 장식으로 여겨졌을까? 왜 편리함과 수월함, 아름다움, 안전은 여성만 요구할 수 있는 특성이었을까? 남성 소비자가 괴저로 죽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시동을 걸 수 있는 자동차를 원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왜 그토록 받아들이기 어려웠을까?
6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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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산업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자동차 시장을 둘로(남성을 위한 시장과 여성을 위한 시장으로) 나눌 것을 고집했을까?
(...)
여러 여성적 '장식'이 결국 표준이 되는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휘발유 차에는 전기 장치가 점점 더 많아졌다. '여성화'가 된 것이다.
60~6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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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돌고 돌아 100년이 지난 후에 전기차는 다시 미래 자동차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여성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던 여러 전기 장치는 이제 자동차 산업에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절대적 요소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은 생각들이 당시에는 하나의 중심축이 되어 과학발전에 있어 이렇게 다른 양상과 결과를 불러온 것을 보면, 생각 이상으로 '젠더' 관점이라는 것은 매우 강력한 것이 분명하다.
이 외에도 컴퓨터 기술과 예술 분야, 문화적 관점 등 다방면에 있어 재미있는 일화를 풀어 설명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심각한 여성의 지위와 인식에 있어 새로운 고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저편의 시초에는 여성의 노동력과 소프트함, 노력의 흔적들이 깔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낮은 지위와 임금, 부속품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변화가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에는 분통이 터졌다.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도맡아 했던 여성들은 인류 보편이 될 권리마저 부여받지 못한 채 남성성이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생겨난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경제에 고스란히 노출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는데, 왜 그런 고집스러운 남성성에 얽매여 그토록 오랜 시간 시간을 허비해 왔는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성은 갈비뼈로 만든 일종의 부록으로 여겨졌으며, 출산하는 사람의 서사는 전쟁에 나간 남성의 서사만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기술사에서도 남성이 사용하는 도구는 '히스토리'에 속할 자격을 얻는 반면, 여성이 사용하는 도구는 '여성사'로 넘어갔다. 재료에 있어서도 어떤 재료는 여성적인 것으로, 어떤 재료는 남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 어떤 재료는 기술적인 것으로, 어떤 재료는 그만큼 기술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예술에 있어서는 남성이 캔버스에 유화로 추상 작품을 그리면 그 작품은 예술이라 불렸고, 여성이 직물로 똑같은 작품을 만들면 그 작품은 공예품이라 불렸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전반적으로 그동안 보고 들었던 보편의 관점이 아닌,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과학사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색다른 시각과 관점을 확인할 수 있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특히 생각의 관념을 바꿔주는 예시로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도구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류의 본성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은 특히 더 주의 깊게 읽게 되었는데, 인간의 첫 번째 도구를 곤봉과 창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뒤지개나 수렵을 위한 장바구니로 볼 것인가에 따라 폭력, 지배, 죽음 혹은 관계, 화합, 존중이라는 다른 형태의 이미지가 그려지는 것을 보며 인류의 본성이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공감이 되었다.
다시 말해, 남성 중심적 인식을 여성 중심적 경험의 측면으로 재인식하게 된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정의가 통째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의식과 인간성의 개념마저도 완전히 변하게 되면서, 근본적인 구조가 달라지고 이는 곧 최초의 발명, 과학기술의 '시작'부터 다시 되짚어보게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사고하는 방식의 180도 전환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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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하고', '짓밟고', '파괴하는' 것이 혁신이라는 논리는 여러 측면에서 비인간적인 경제를 낳았다. 대안을 찾으려면 젠더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하는데, 우리의 젠더 관념이 우리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무시하는지를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고 경제 전체에서도 그렇다.
19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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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주제로 이야기한 인공지능과 AI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는데, 미래 산업에서 이들이 대체할 수 없는 분야가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여성화' 분야로, 이는 추후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가능성이 더 높은 분야는 남성 중심 산업임을 의미한다. 아이러니 한 부분은 '여성화' 분야가 인류에게 있어 중요하고 꼭 필요한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경제적 대우나 위상은 좋지 못하다는 것인데, 앞으로 깊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대처할 수 없는 영역을 보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 대한 대처(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영역), 여러 신체 행위(생각보다 로봇의 움직임은 한정적이다), 인간의 창의력 분야(인간의 창의력 사고를 로봇은 따라올 수 없다), 감정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간관계를 맺고 집단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동안 로봇이 우리의 일자리를 전부 훔쳐 갈 것이라는 서사는 기계에 대한 과대평가이거나 자신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은 아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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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가능한 이러한 상황을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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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종업원이 사용하는 기술은 첫눈에는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 수십억 년을 거친 발전의 결과물이며, 이런 발전을 통해 인간은 지구에서 생존하는 기술을 익히고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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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으로 이해하는 일의 복잡성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24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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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을 통해 그동안 하찮게 여겼던 진짜 중요한 가치와 인간적인 면모의 중요성을 오히려 찾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도 한 번쯤 깊이 있게 생각해 볼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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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정과 관계, 공감, 인간과의 접촉이 경제에 얼마나 중요한지, 또는 이것들이 얼마나 우리 인간성의 중심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이것들을 케이크 위에 올린 체리 같은 것으로, 즉 사회의 근본 기반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 뒤이은 장식으로 여기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의 기반이다. 어쩌면 로봇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고, 그러므로 신기술은 우리의 인간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 줄 잠재력이 있다.
300~30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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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과학의 발전과 사회적 변화에 있어 여성의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그동안 통상적 관념이나 편중된 시선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반쪽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남녀 모두의 평등한 균형이 필요하고, 동등한 기회와 가치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보다 획기적이고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여태까지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왔던 젠더 이슈를 사실상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이것이 과학기술 발전에 핵심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관점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본 참신하고 획기적인 관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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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밖으로 몰아냈던 여성적인 것을 복권시켜야 과학이 바뀝니다. 지금껏 배제되었던 것, 그래서 새로운 것, 거기에서부터 혁신과 창의성이 나올 거예요. 과학 기술에게는 우리가 귀한 자원이죠.
35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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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와 예언자, 남자와 여자는 따지고 보면 작지만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한 번에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생각을 뒤집을 수는 없겠지만, 미래에 보다 큰 이상과 혁신, 독특한 창의성을 기대하고 있다면 생각의 관념을 보다 넓고 크게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젠더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사람 그 자체에 중심을 두고 사람 사이에서만 주고받을 수 있는 다양한 감정, 관계, 공감을 통해 인간다움을 지녀보자. 20세기 이후 멈춰버린 과학기술의 시계 추가 서서히 다시 움직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