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라는 위로 - 불안과 두려움을 지난 화가들이 건네는 100개의 명화
이다(윤성희) 지음 / 빅피시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그림을 통해 원하는 만큼 쉬고, 고요히 힘을 얻어 다시 자신의 삶을 채우는 시간을 가지길 바랍니다.
5페이지 中
-----


한때는 사람이 좋고,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껴 무리에서 어울려 지내던 때가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이 많은 곳은 피곤한 곳이 되면서 홀로 있는 시간을 더 즐기게 되었다.

덕분에 꽤 많은 것을 즐길 시간과 여유를 얻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오래전부터 관심 있던 분야를 탐구해 보는 것, 평소 가보지 못했거나 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마음 편히 도전해 보는 것, 눈치 보지 않고 내 스케줄을 내 맘대로 정해보는 것 등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림'도 이런 변화 덕분에 얻게 된 즐거움 중 하나인데, 관심 있는 전시회를 가서 보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보기도 하고, 책을 통해 명화나 작가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지식의 목마름도 채우고, 힐링과 위로도 얻게 된 것이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보는 재미가 있는데, 그 재미를 알고 나니 더더욱 찾게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 책도 그런 개인적 호기심과 관심이 이어져 읽게 된 책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읽으며 깊은 위로를 얻는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기쁨도 누려본다.


위로, 희망, 치유, 휴식 총 4개의 테마로 구성된 이 책은, 100개의 명화를 통해 감동과 위로를 전한다. 화가에 대한 간단한 배경 이력과 함께 대표작들을 선보이며, 독자들이 깊이 빠져들 수 있도록 돕는다.

작가 내면에 깊이 각인된 삶들이 그림을 통해 전해지면서 일상, 꿈, 고통, 죽음, 행복, 불안, 추억, 희망 등이 떠올랐다 이내 마음으로 들이친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되고, 힐링이 된다.

그림들은 화가가 가진 스타일에 따라 저마다의 색감과 빛, 모양새로 인물이 되었다가, 불현듯 풍경이 되기도 하고, 그 외에 어떤 것이 되어 그들 안에 깃든 무엇을 마치 선물 꾸러미처럼 풀어놓는다.

마음이 불안한 순간, 위로가 필요한 순간 가만히 명화를 들여다보며 숨죽여보자. 어쩌면 나를 다독이는, 즐거움을 야기하는, 희망을 노래하는, 고통을 이겨낸 순간들을 포착하게 되면서 새로운 긴긴밤을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텍스트로 무언가를 대단히 설명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간단한 설명과 대표작으로만 페이지를 채움으로써 더 많은 것들을 건네준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그림을 더 자세히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되고, 더 많은 것들을 상상하게 된다. 나아가 더 알고 싶은 것들은 탐구하고 찾아보게 만든다.



19인의 화가와 100여 점의 작품 중 이번에 나의 눈을 사로잡은 화가와 작품들을 위주로 선별해 보았다. 그저 한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작품들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그랜마 모지스
=====

▶본명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1860년 미국 뉴욕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남

▶강과 언덕이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10남매와 함께 자람

▶12세에 가사도우미로 사회생활을 시작, 이후 토마스 모지스라는 남자를 만나 평범한 가정을 꾸림

▶그녀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시기는 76세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거치지 않았기에 데생이나 채색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농장 마을 풍경과 이웃과의 소박한 일상을 담은 그림들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할머니가 되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는 본명보다 '그랜마 모지스'라고 불렸다.

▶그녀의 그림들은 엽서와 기념품으로 제작되어 고향과 추억을 그리워하는 미국인들을 위로했으며 그녀의 열정적인 삶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랜마 모지스, <창밖 후식 밸리의 풍경>, 1946년

(좌) 그랜마 모지스, <5월의 케임브리지>, 1943년
(우) 그랜마 모지스, <시럽 만들기>, 1955년

그랜마 모지스, <7월 4일>, 1951년


*************
낡은 물건 하나라도
또 다른 쓸모가 있는 것처럼,
가치를 만들어 내는 데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다면,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갈 힘은
분명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을 것입니다.

-그랜마 모지스-
*************

그녀의 작품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추억'과 '그리움'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더해 '편안함'과 '정겨움'도 느껴진다. 작은 액자에 담아 두고, 내내 지켜보고 싶은 시골 전경이다.


=====
귀스타브 카유보트
=====

▶1870년대 부유한 파리 상류층 가문에서 자라난 카유보트는 법대를 졸업했지만 화가가 되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고전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철교와 도로가 깔린 파리의 모습과 도시인의 고독한 감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한 화가였다.

▶살롱전 낙선 후 드가를 통해 인상파 화가들을 소개받고 이후 인상파 전에 참여하며 재정적인 후원자가 된다. 가난한 모네에게 자신의 화실을 빌려주고 르누아르와 피사로의 그림을 사주는 등의 배려로 그들의 열정을 지지하면서 차츰 화가보다 예술가의 후원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그림을 그렸다.

▶카유보트는 당대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의 예술적 재능은 1970년대에 이르러 재조명 받게 된다. 근대화 속 지친 도시인을 위로하는 평온한 전원생활의 감성이 돋보이는 그의 그림에는 차분한 여유가 흐른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예르, 비의 효과>, 1905년

귀스타브 카유보트, <산책하는 두 사람>, 1881년

전반적으로 여유와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분위기다. 그래서인지 더 오랫동안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풍경들이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첫 번째 그림을 들여다보며 비가 주는 차분함과 리듬감을 느껴보면 어떨까?


=====
클로드 모네
=====

▶1840년, 파리 9구역에서 태어난 모네는 아버지의 일로 프랑스의 해안 도시 르아브르로 이주한 후 외젠 부댕을 만나 풍경 화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1890년 이후부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작품을 그렸는데 <건초더미>와 <루앙 대성당>, <수련>이 대표적인 연작 작품이다. 이 연작들은 빛의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바뀌는 사물의 모습을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그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직접 야외에 캔버스를 펴놓고 태양이 뜨고 지는 모든 순간, 하루 종일 빛을 바라보면서 작업했고 이 때문에 시력이 크게 손상됐다.

▶<수련> 연작은 1차 세계대전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만년에는 거의 시력을 잃게 되지만 그는 끝내 붓을 놓지 않았으며, 과학자의 탐구 정신과 예술가의 감성을 모두 보여주며, 길고 긴 시간 동안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낸 화가다.

클로드 모네, <수련>, 1906년

(좌) 클로드 모네, <수련>, 1919년
(우) 클로드 모네, <해돋이, 인상>, 1872년

(좌) 클로드 모네, <라방꾸에서 본 센강>, 1879년
(우) 클로드 모네, <에트르타의 절벽>, 1885년

(좌/위) 클로드 모네, <여름의 끝, 아침의 건초더미>, 1891년
(좌/아래) 클로드 모네, <석양 속의 건초더미>, 1891년
(우/위) 클로드 모네, <한낮의 건초더미>, 1891년
(우/아래) 클로드 모네, <눈 위의 건초더미>, 1891년

같은 작품을 오랫동안 지켜봐도 질리지 않는 작품이 있다. 모네의 작품이 그렇다. 어쩜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잘 담아냈는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는 순간 포착의 힘이 대단하다.

삶의 놓치고 싶지 않은 명장면들이 모네의 그림 속에 모두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소장하고픈 작품이기도 하다.


=====
구스타프 클림트
=====

▶1908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미술전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는 단연 클림트의 <키스>였다. 관능적인 곡선과 황홀한 장식, 정교한 금세공 기술이 어우러진 독보적인 이 작품을 통해 클림트는 빈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고 '황금의 화가'로 불렸다.

▶그러나 이 작품을 완성하기 4년 전만 해도 사회적인 비난에 시달리다가 주문받은 계약을 자진 반납하고 빈의 중심에서 떠나야 했다.

▶1862년 빈의 외곽에서 가난한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등교육을 마친 후 빈 장식공예학교에서 장식 미술을 배웠다. 17세부터는 남동생과 동창생 프란츠와 함께 예술가 컴퍼니를 결성해 빈 미술사 박물관의 장식을 맡는 등 빈에서 많은 일감을 소화했다.

▶1892년 아버지와 남동생이 사망한 뒤로, 깊은 슬픔에 빠진 그는 3년간 창작의 위기를 맞았다.

▶그의 고난이 본격화된 것은 빈 대학의 의뢰로 그린 <철학> 등이 공개되면서부터로 빈 대학 교수들과 정면 충돌한 것이다.

▶그러나 클림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한 독창적인 양식을 강화하여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등을 내놓으며 이른 '황금시대'를 연 것이다. <키스>는 바로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8년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907년

(좌) 구스타프 클림트, <캄머성의 고요한 공원>, 1899년
(우) 구스타프 클림트, <캄머성 공원>, 1909년

금으로 장식된 그림들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클림트의 그림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안에 무수히 자리한 색감과 디테일은 자꾸만 더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디테일을 눈으로 좇게 만든다,.


=====
칼 라르손
=====

▶1853년 스톡홀름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에서 태어난 그는 술과 도박으로 집을 떠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와 거리로 내몰려 노숙자 생활을 해야 했다. 이때 어린 남동생을 잃기도 했다.

▶가난했지만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과 친구들 도움으로 스웨덴 왕립예술 아카데미에 다니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그는 장학금을 받고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된다.

▶파리 유학은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의 빛이었지만, 1883년 살롱전에 입선하기까지 9년 동안 가난한 이방인의 삶을 견뎌야 했다.

▶이 시기 그에게는 평생 짝이 되는 여인 카림 베르그가 찾아오는데, 1883년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을 때 그는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던 불행의 그늘이 마침내 걷히는 감정에 북받쳐 울었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결혼은 마침내 찾은 삶의 진정한 보금자리였다.

▶8명의 아이를 낳은 두 사람은, 고향 스웨덴으로 돌아와 훗날 '릴라 히트나스'라 불리게 되는 집을 아름답게 가꾸고 돌보았다. 후에 그는 이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한 다양한 순간들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집안의 러그와 꽃무늬로 장식한 벽난로, 차분한 컬러로 톤을 맞춘 의자와 소파 커버 등의 장식은 부부가 함께 꾸민 것이다.

칼 라르손, <영명 축일의 날>, 1895년

칼 라르손, <자작나무 아래 아침식사>, 1895년

(좌) 칼 라르손, <꽃이 있는 창문>, 1894년
(우) 칼 라르손, <벌 받는 자리>, 1900년

(좌) 칼 라르손, <화실에서 아내와 딸>, 1885년
(우) 칼 라르손, <브리타와 나>, 1885년


*************
아내와 함께 꾸민 집,
내 가족에 대한 추억,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그림들이
내 인생 최대의 작품입니다.

-칼 라르손-
*************

뭔가 동화책에서 볼법한 그림체가 인상적이다. 여기에 더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건 자신의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 속에서 기념하고 추억할 만한 내용들을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평생 간직할 앨범이 완성된 셈이다.

그의 집 '릴라 히트나스' 속 유쾌하고 즐거운 가족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가족을 애정하고 아꼈는지가 엿보인다.


=====
오귀스트 르누아르
=====

▶르누아르는 마흔 즈음하여 기존의 성공적인 화풍을 버리고 약 10년간의 고투 끝에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확립해 낸 위대한 화가다.

▶1841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청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미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예술 인생은 1881년의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크게 바뀌게 되는데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다소 고전적인 성향을 띤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49세에 르누아르 특별전에 전시한 <피아노 치는 자매>는 호평 속에서 프랑스 정부에 판매되기도 했다.

▶1900년에는 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기를 계속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기 때문이라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베니스의 도제 궁전>, 1881년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자매>, 1892년

오귀스트 르누아르, <뱃놀이 일행의 오찬>, 1880~1881년


그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아름다움이 그림 속에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어 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들이다.

내가 사랑하는 공간에 이 그림들을 배치하고 하루에 한 번씩 마주하며 행복한 기운을 받아보면 어떨까?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이르는 화려하거나 멋진 그림을 그리기 보다, 그저 집안에서 우유 따르는 주방 일에 분주한 여인, 영수증 고지서를 정리하는 여인의 일상을 담았다.

▶처가댁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거들며 살았던 그의 눈은 평범한 여인들의 내면세계를 향해 있었다.

▶내면도 들여다보면 보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가 창조한 걸작이 <진주 귀걸이 소녀>다.

▶렘브란트만큼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기에 동시대 사람들은 집안 여인들의 인상을 담는 그림들이 얼마나 특별한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담아낸 평범함의 가치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와 지금까지도 은은하게 진줏빛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고리 소녀>, 1665~1666년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델프트 풍경>, 1661년

(좌)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물병을 든 젊은 여인>, 1662~1665년
(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목걸이를 하는 여인>, 1664년


담담하고 담백한 느낌이 전해지는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은 당시 여성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평범함이 가지는 가치, 내면의 모습들을 심도 있게 작품에 담아내면서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함을 가진다.

그림 속 여인의 의복, 머리모양, 분위기, 액세서리, 배경 등을 통해 무엇을 하던 중인지 유추해 보며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그 상상 덕분에 화가나 작품이 더 친밀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다양한 작품을 만나다 보면, 나만이 느끼는 특별한 포인트가 있기 마련이다. 컬러가 되기도 하고, 디테일이 될 때도 있으며, 어떨 때는 전체적인 분위기나 특정 형태에 꽂혀 한참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론과 배경지식에만 혈안이 되어 정작 작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화가나 작품을 제대로 모르면 어떤가? 그냥 내가 보는 느낌을 소중히 하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감상하면 된다.

음악이 그러하듯, 그림 또한 내면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슬프고 우울한 날, 혼자 조용히 쉬고 싶은 날, 불안과 두려움에 잠식 당한 날 명화와 시간을 보내보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위로, 희망, 치유, 휴식을 얻게 될 것이다. 오늘 하루 너무 애쓴 나에게 그림이라는 작은 위로를 건네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이민규 낭독 / 어크로스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인생을 사는 동안 근심하고 애정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사소한 취향부터 일상, 사회, 영화, 정치, 대화 등 많은 주제를 담고 있다.


처음에는 저자의 경험이나 생각들을 하나 둘 살펴본다는 느낌으로 읽었는데, 다 읽고 보니 꽤 괜찮은 선생님 한 분과 일대일로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다.


특히 살면서 한 번쯤 경험해 보는 불합리함, 말로만 하는 입바른 소리들에 눈살이 찌푸려졌던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저자의 취향과 생각들에 환호를 내지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남자 어른 사람 중에 '왜 이런 사람은 없는 걸까' 하고 생각했던 유형을 이번에 만날 수 있었는데, 어쩌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아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지난 10여 년간 일상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영화에서, 대화에서 저자가 만나고 경험한 56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수임에도 생각이 고루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의식을 깨고, 비판적인 사고를 전하는 것에 있어 어떤 면에서는 속 시원함도 느껴진다.


약자의 위치에 있기에 강자들이 부리는 억지스러움을 그저 '네'라는 말로 수용하거나 불공정함이나 불공평함을 알고도 그대로 당해야 하는 이들의 억울함마저 해소시켜주는 소신 있는 글에서 통쾌함을 느낀다. 이와 동시에 사회의 이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당하는 이들이 당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하는 것,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서기 위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사고해야 하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게 한다.


책을 읽으며 생각을 깨고, 사고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며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나는, 우리는, 우리 사회는 어떤 것에 주목해야 하는지 화두를 던진다.



'일상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영화에서, 대화에서' 다섯 가지 주제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내용은 '일상에서'라는 주제였다. 그 이유는 삶을 보다 견고하고 탄탄하게 해주는 노하우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저자가 건네는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나는?'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건네보면서 잘해내고 있는 부분과 부족한 부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부분은 관심사가 달라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저자의 깨어있는 생각과 유머 넘치는 경험담 덕분에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인상 깊었던 몇몇 문장들을 통해 흥미로웠던 부분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

저자의 취향

=====


■만화도 무척 좋아한다.

■동창회에 안 나가고 경조사에도 잘 안 다닌다.

■몰려다니면서 술 퍼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 대신 디저트를 먹는 편이다.

■미술관 가는 것도 좋아한다.

■노래방도 적극적, 능동적으로 가지 않는다.

■쉽게 말 놓는 사람, 걸핏하면 동문 운운하는 사람도 경계한다.


저자의 취향을 알고 나니 더 관심이 간다. 교수라고 콧대 높게 굴기보다 친근하게 다가온다. 마음에도 없는 예의 차리느라 시간 버리기 보다 취향껏, 소신껏 시간을 활용한다.


술 대신 디저트, 미술관 가는 것, 노래방을 가지 않는 부분은 또래 남성 교수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장면이기에 신기하면서도 엄지 척을 해주고 싶은 취향이다.


더불어 쉽게 말 놓는 사람, 걸핏하면 동문 운운하는 사람을 경계한다는 점은 반대로 말하면 자신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석되어 건강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드는 문장들

=====


-----

살아가다 보면, 자기 안의 관광객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깨달음을 얻는 곳, 금각사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자기 안의 고지식한 안내자가 천천히 답을 생각하고 길을 가르쳐 주려고 하면 그 관광객은 이미 서둘러 떠나고 없다. 그래서 삶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대개 허공에 흩어지게 된다. 허공에다 이야기하다가 죽는 게 인생이지. 그러나 이것도 사치스러운 생각일 거야. 병원에 누워 있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지.

32~33페이지 中

-----


문장 끝까지 읽다 보면 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빨리빨리'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무언가를 심도 있게 고민하고 천천히 답을 내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어떤 계기로 잠시 잠깐 내면의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불현듯 답은 듣지 않고 그대로 다른 화두에 빠져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정작 아무것도 듣거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그저 흐트러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꺼내게 되는 순간은 한참이 지난 뒤 아프거나 죽기 전이다.


그때는 이미 너무 늦는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인내를 가지고 내면의 나와 소통해 보자. 이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시간이지 않을까?



-----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관조 속에서 상처 입은 삶조차 비로소 심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

상처도 언젠가는 피 흘리기를 그치고 심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

37페이지 中

-----


이 글을 읽는데, 문득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죽음, 인간의 유한성, 깨달음, 예술 등의 키워드가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인듯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깨닫게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련의 과정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을 보다 먼저 엿볼 수 있는 것이 어쩌면 예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자신의 삶과 고통을 갈아 남긴 예술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겪어나갈 모든 과정이자 결과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책을 꼭 읽어야 하나요? 물으면 사실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만, 책은 인류가 발명한, 사람을 경청하게 만드는 정말 많지 않은 매개 중 하나죠. 그렇게 경청하는 순간 우리가 아주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자세요.

318페이지 中

-----


책을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하나를 획득했다.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경청의 자세를 배우기 위함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오늘보다 내일 더 발전할 나를 위해, 책! 책! 책! 을 읽읍시다!



-----

"인간이 평생 다만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하면 불행해지기 쉽다. 살아남는 게 직업이 되면 안 되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적잖은 사람이 그런 지경에 몰리고 있다. 이때 정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가 사회적 안전망을 충분히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재원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국민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국가 자체를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 곳을 못 봤다는 생각에 증세에 대한 저항감도 크다. 지금 집권한 분들은 이걸 불식할 책임이 있다. 권력이 제대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336페이지 中

-----


권력의 순기능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최근 이런저런 일로 정치의 중요성과 힘에 대해 깨닫고 있는 중인데, 정치인들이 언제쯤 정신 차리고 제대로 일하는 날이 올까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여러 사회 문제가 산재해 있는 지금, 필요한 것은 두 팔 걷어붙이고 발로 뛰는 정치인이다.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정치인이다.


혈세로 외국 나가 명분만 화려한 해외여행을 즐기는 공무원과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 고통스러워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바로잡아줄 이들이 필요하다.



-----

책을 읽고 만화를 보고 더 많은 사람이 극장을 찾으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질까. 한국 사회의 고통스러운 단면을 조명한 영화를 본 뒤라 이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적어도 각자의 삶은 좀 더 즐거워질 것이다. 아니, 즐겁기보다는 풍요로워진다는 표현이 맞겠다. 적어도 내 삶은 좀 더 풍요로워졌다."


김 교수의 답이다.

338페이지 中

-----


때때로 우리는 책, 영화, 드라마에서 삶의 단면을 보며 웃고 웃으며 위로받는다. 타인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삶을 더 다채롭게 볼 수 있게 된다.


꼭 행복하고 여유 있는 날들만 이것들에 시간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일상의 모든 순간, 이를테면 고통스럽고 괴로운 순간에도 책과 영화, 드라마를 보며 비워진 속을 채워 넣을 수 있다.



=====

유머가 돋보였던 글

=====


-----

악몽의 정점은, 내가 사자 인형 가죽의 아랫도리 앞뒤를 뒤바꿔 입는 바람에, 꼬리를 엉덩이가 아닌 정면에 대롱대롱 매단 채로 한동안 그 짓을 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아무리 사자의 양물이기로서니 그처럼 길고 클 수야 있겠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으며 뒤로 넘어가기에, 그저 내가 마스코트 노릇을 의외로 꽤 잘하나 보다 생각했다..... 흑흑.

111~112페이지 中

-----


사자 인형의 탈을 잘못 써서 벌어진 해프닝인데,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한바탕 큭큭 거리며 박장대소를 했을 것만 같다.


저자에게는 악몽 같은 일이었겠지만, 그 모습을 보던 이들에게는 모처럼 대차게 웃을 수 있는 일화가 아니었을까?



-----

이제 시간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 나머지, 급기야 머리에 탈모가 진행 중이고, 몸은 근육을 잃어버린 망국의 슬픔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제 자기만의 사적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쓸 때가 되었다.

136페이지 中

-----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샛길로 빠지기 있기? 없기? ㅎㅎ


너무 현실적이라 웃프다. 실컷 웃고 나서 문득 잃어버린 내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왠지 웃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

마무리

=====


사회적 권위나 위치를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경험담과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누군가에겐 권력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위치에 서 있는 자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주 소싯적 이야기까지 꺼내가며 기꺼이 모든 것을 투명하게 내보여준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뒷소리를 듣거나 배척당할 수 있음에도 그다지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되려 자신이 오래전에 겪었던 부조리에 대해 고발하며 자신과 같은 교수들에 대해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모습은 형태는 다르지만 과거부터 현재까지 너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사실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꽤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예컨대 면접관이 서류도 제대로 보지 않고 면접자를 부르는 상황을 말할 수 있을듯하다.)


또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그 또래 나이들에게 전혀 남자답지 않은, 이상한(?) 취향이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모습에서 참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남자아이가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하면 보통 놀림거리가 되어 감추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도리어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취향을 떳떳하게 밝히고 즐기는 모습에서 중심이 잘 잡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담긴 56편에 에세이는 이렇듯 저자의 건강한 생각과 가치관이 잘 녹아들어 있다. 그가 고민하고 애정한 것들에서 그의 삶이 엿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앞서 읽었던 최은영 작가의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어쩐지 그녀의 소설을 더 파보고 싶어 이번에는 등단 작품을 만나보았다. <쇼코의 미소>라는 책으로, 7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이다.


이 책을 살펴보면, 앞서 읽었던 책과 전반적인 결이 비슷한 느낌인데, 극을 이끌어 가는 화자 역시 모두 여성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지만, 하나의 이야기에 담겨있는 상징 혹은 의미가 단순하지 않아,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고 본다.


특히 등장인물의 감정 상태나 상황별 묘사에 있어 읽는 사람의 경험, 지식, 상황, 전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 최은영의 소설은 참 기묘하고도 생각이 많아지게 만드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읽는 것보다 '쓰는 일'이 더 까다롭게 느껴진다. 어떤 부분에 포인트를 두고 써야 할지, 각 소설 속 인물들의 상황이나 감정 상태에 대해 나는 어떤 느낌을 받았고 또 이것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하고 또 생각하며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을 자꾸 찾게 되는 건, 이야기 속에 녹아든 그녀들의 삶이 비단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 그녀가 그리는 인물과 상황의 정밀함과 세밀함이 더 깊이 파고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총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공감과 유대에 포커스를 맞춘 이야기들로 화자가 모두 여성이다. 그래서인지 딱딱하고 강압적인 느낌보다 포용력과 유대감, 공감적 느낌이 강하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울하고 슬프지만, 그럼에도 연대하고 공감하는 누군가가 등장해 끝까지 끈을 놓지 않는 열성을 보여줌으로써 끈끈한 우정과 친밀감이 돋보인다.


이 역시 여성-여성의 조합인데, 강하지만 누구를 해치지 않는 힘, 좌절 속에서 꺼내주는 힘 덕분에 이들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순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이 소설들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

쇼코의 미소

=====


쇼코를 비롯한 세 명의 여학생이 지방 소읍의 한 고등학교로 견학을 오게 되면서 쇼코는 소유와 만남을 가지게 된다. 같은 나이, 같은 반인 것은 물론, 담임의 부탁으로 일주일간 소유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둘은 사적으로도 꽤 가까워지게 된다.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없다는 점 그리고 조부와 함께 산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둘은 영어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주 소식을 전하게 된다. 이때 쇼코는 동시에 소유의 할아버지와도 일본어로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그러다 고교 졸업 직후인 3월 쇼코의 편지가 끊기게 되고 이때쯤 소유는 새내기 생활에 푹 빠져 잠시 쇼코를 잊고 지낸다. 그러다 캐나다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고, 유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 뉴욕에서 마지막 여행을 즐기던 중 우연히 쇼코와 함께 견학을 왔던 일본 여학생 중 한 명을 만나게 된다.


이때 쇼코의 소식을 간략히 듣게 되는데 원하던 도쿄에 있는 와세다 대학에 합격했으나 가지 못하고 대신 도읍에 있는 물리치료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할아버지의 건강 문제와 경제적 사정이 있었음을 듣게 되면서 소유는 자신의 이메일 주소 등을 전달해 달라 요청하지만, 끝내 쇼코로부터 연락이 닿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 사학년 여름, 소유는 쇼코의 집을 직접 찾아가 보기로 하고 편지를 주고받던 주소지로 향한다. 거기에서 쇼코의 할아버지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고, 쇼코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지만 어쩐지 쇼코는 할아버지가 집을 벗어나서야 방문을 열고 나타난다.


오랜만의 만남에 쇼코는 그리웠다 말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어쩐지 소유는 잘못 찾아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스케치북에 그린 알 수 없는 그림과 읽어주는 글자들은 섬뜩하게 느껴지고, 여기에 더해 그녀의 스킨십에는 소름이 돋는다.


그런 상황 때문인지, 소유는 자신도 모르게 선을 넘는 말을 내뱉고 난 후 이내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나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소유는 자신의 꿈을 좇아 영화감독이 되려고 시나리오도 써보고 스태프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를 흠뻑 맞은 할아버지가 자신의 자취방을 찾아오게 된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쇼코의 편지를 내밀고는 이내 자취방을 떠나게 되는데, 이후 엄마로부터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그저 무뚝뚝하기만 했던 할아버지가 마음에 쓰였던 소유는 그 길로 본가로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정을 듣게 된다.


할아버지와 소유, 엄마는 안방에서 함께 자면서 평소 못다 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서로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말들도 용기를 내서 주고받게 된다. 덕분에 마음의 앙금도 풀게 된다.


덕분에 할아버지가 무뚝뚝했던 이유가 부끄러워서였음도 알게 되고, 엄마도 용서하게 되면서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좋아진다.


할아버지는 그런 시간을 보내다 예순다섯 밤을 더 보내고 영면하셨고, 쇼코는 그런 할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오게 된다.


쇼코는 그동안 할아버지와 일본어로 주고받았던 편지를 건네며 위로를 전한다. 더불어 일본어로 쓰인 편지 내용을 영어로 해석해 주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소유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또 쇼코는 그동안 밝히지 못했던 자신의 사정을 전하며, 사실은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으며, 자신의 할아버지 역시 돌아가셨음을 알린다. 더불어 일본으로 찾아왔을 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며 용서를 구한다.


이렇게 세 번째 만남이 마무리된 후 쇼코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


전반적인 스토리를 보면, 조부에 대한 사랑과 도플갱어 같은 두 소녀의 성장담에 대해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더 크게 부각되는 부분으로 인해 이런 스토리는 뒷전으로 밀리는 느낌이다.


어쩐지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 쇼코의 미소와 단순히 우울증으로 보기에는 괴기스럽게 보였던 이중적인 행동, 여기에 더해 묘하게 다가왔던 쇼코의 스킨십이 소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두 여학생은 나름의 방식대로 조부와 유대를 맺고 살았다. 겉으로 보기에 부정적으로 보일지언정 결론적으로는 끈끈함 유대감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결론을 통해 알 수 있다.


각각의 모양새로 보면 쇼코와 소유의 모습은 닮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쇼코의 모습은 이중적이다.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짓말과 위선으로 무장한 채 마치 불결한 무엇처럼 이야기하지만, 소유의 할아버지에게만큼은 빠뜨리지 않고 편지를 할 만큼 상냥한 모습을 보인다.


또 동시에 같은 분량의 편지를 영어와 일본어로 써서 각각 보내지만, 담긴 내용은 완전히 정반대다. 소유에게는 부정적인 내용을, 할아버지에게는 긍정의 내용을 담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쇼코의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게 다가온다. 진짜 웃음이 아닌, 거짓 웃음 속에 감춰진 쇼코의 미소가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쇼코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주 상냥하게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처음 교실에서 쇼코가 수줍어하는 표정을 봤을 때처럼 나는 쇼코의 웃음에서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쇼코는 정말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라, 공감을 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라, 그냥 상대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포즈를 취하는 것 같았다.

11~12페이지 中

-----


-----

출국장으로 들어가던 쇼코의 모습을 기억한다. 보딩패스를 내밀고 자동 유리문안으로 들어가는 쇼코의 얼굴. 그때 쇼코는 그 예의 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64페이지 中

-----



여기에 대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쇼코의 모습 또한 남다르게 다가온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처음 쇼코와 만남을 가졌을 때부터 쇼코는 우울증 증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내 점점 더 심해져 우울증 약을 먹고 꽤 힘든 날을 보냈다고 토로한다.


그런데 쇼코가 보이는 증상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계획한 거짓의 탈을 쓴 사람처럼 보인다.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쓰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괴기스럽고, 완전히 이중적 면모를 보이는 모습에서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

"어쩌면 넌 영화 만드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

쇼코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15페이지 中

-----


더불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컨트롤하기도 급급한 상황에 힘주어 타인의 미래를 지지하고 응원할 여유가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글쎄'라는 답만 떠오른다.



-----

"할아버지에게 나는 종교이고, 하나뿐인 세계야.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죽어버리고 싶어."

(...)

쇼코는 할아버지가 자기를 마치 여자친구처럼 생각하는 게 소름 끼친다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도쿄로 떠나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13페이지 中

-----


여기에 더해 자신을 돌봐주는 할아버지에 대해 욕을 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변모시켜 어떤 의미에서는 성추행을 당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것에서 '위험'이 감지된다.



소유가 연락이 끊긴 쇼코를 만나러 일본에 갔을 때 마주한 쇼코의 모습은 어떤 의미로 쇼킹했다. 그리고 우울증 증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이질감이 크게 느껴진다. 후에 이때의 행동에 대해 쇼코는 약물로 인해 기억이 흐릿했다고 전하는데, 이게 과연 약물로 인해 벌일 수 있는 행동일까 의심이 든다.


-----

"하지만 네가 여기에 있어서 기뻐."

쇼코는 두 손으로 마루를 짚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

쇼코의 원피스가 마루에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노인들 특유의 이상한 외로움을 쇼코에게서 느꼈다.

(...)

쇼코는 노인이었다.

쇼코는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차갑고 부드러운 쇼코의 팔이 뜨겁고 축축한 내 팔에 닿았다. 소름이 끼쳤다.

(...)

"여기서 나랑 지내자. 한국에 가지 말고 여기서 나랑 같이 살자."

쇼코는 마치 그게 가능한 일이라는 듯이 발랄하게 말했다. 나는 다시는 쇼코를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28페이지 中

-----


한국에서 쇼코가 처음 경험한 팔짱은 또래 여자아이들끼리 하는 우정의 스킨십이었다. 이때 처음 팔짱을 껴본 쇼코는 화들짝 놀라지만, 이내 학교에서 동성끼리 흔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안심한다.


이후 일본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소유를 보고 쇼코는 담백함이 사라진 유혹의 손길을 건넨다. 외로움에 젖어든 모습으로 뜨겁고 축축한 스킨십을 건넨다. 쇼코는 한국에 가지 말고 함께 살자며 소유를 유혹한다.


이 모습을 본 쇼코의 할아버지의 표정 또한 굳는다.


<쇼코의 모습>이 담고 있는 큰 줄거리는 분명 가족, 연대, 화해, 회복 같은 키워드처럼 보인다. 그런데 쇼코의 모습에서(미소, 이중적 행동, 우울 증상 등)으로 인해 이 모든 것들은 어느새 지워지고 남는 것은 섬뜩한 쇼코의 모습뿐이다.



=====

씬짜오, 씬짜오

=====


어떤 이유 때문인지, 한국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다시 한국으로, 또다시 일 년 만에 한국에서 독일 플라우엔에서 살게 된 우리 가족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실질적인 도움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가족이 바로 호아저씨네 가족으로, 호아저씨는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였다.


나는 호아저씨네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을 꽤 좋아했는데, 일단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이 가족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이 호아저씨에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그나마 눈을 마주치며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같은 나이, 같은 반이었던 투이와 함께 즐겁게 놀 수 있어 여러모로 좋았다.


응웬 아줌마는 두 살짜리 동생을 돌보며 고립된 생활을 하던 엄마와 종종 말동무도 해주고,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은 척척 도움을 주며 둘도 없는 사이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하는 자리에서 나의 말실수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이 거론되었고, 이로 인해 두 가족의 사이가 완전히 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저 어린 마음에 칭찬받고 싶어 멋모르고 내질러 버린 나의 말로 인해, 가족 모두가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응웬 아줌마의 상처가 들쑤셔졌고, 아버지의 아픈 가족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두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만나는 일은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른 입장, 각자의 아픔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감히 우리가 이해한다 말할 수 있을까? 그저 미안함 마음만 건넬 뿐이다.



*****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한 사람은 일가족 모두를 잃었고, 또 다른 사람은 소중한 형을 잃었다.


직접적인 피해를 겪은 것은 물론, 가해국의 국민임에도 엄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응웬 아줌마가 엄마는 그저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베트남 전쟁에 용병으로 출전하여 목숨을 잃은 형이 있어 미안한 마음 한편에는 억울한 마음도 자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마음에 꼭꼭 숨겨둔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접어두고 서로를 의지하며 둘도 없는 사이로 지낸다. 그러다 결국 한순간에 모든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펑 하고 터져버린다.


그 이후로 이 두 가족이 다시 마주하는 일은 없게 된다. 우리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엄마는 떠나기 전 이들 가족을 위해 부지런히 뜨개질을 했고, 이것을 전해달라며 나에게 건넨다.


이들을 만난 나는 투이와 응웬 아줌마에게 마지막 선물을 건네며 다정하지만 슬픈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씬짜오, 씬짜오.'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어릴 적 할머니의 일을 돕기 위해 순애 이모가 서울로 오게 되면서 엄마와 인연을 맺게 된다. 순애 이모는 당시 열여섯 살로 열한 살인 엄마보다 몸집이 작아서 모든 옷을 줄여 입거나 스스로 지어 입을 만큼 왜소한 체격이었다.


이모는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졌고 같이 살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게 되면서 혼자가 되었는데, 엄마는 이런 사정은 할머니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어쩐지 언니가 생겼다는 사실에 처음 봤을 때부터 순애 이모가 좋았다고 한다. 언니라는 말의 울림이, 그 다정하고도 애틋하게 들리는 말이 그저 좋았다고 한다.


엄마는 이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쏟아냈고 이모는 일을 하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서로 의지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후에 이모는 엄마의 친구 난이 아줌마의 오빠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모의 결혼생활은 생각만큼 순탄하지 않게 흘러간다.


이모부가 북에서 지령을 받고 움직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면서 집은 엉망이 되고 이모는 여기저기 맞아 멍투성이가 됐기 때문이다. 이후 잡혀간 이모부는 재판에서 다행히 사형과 무기형은 면했지만 몸이 성치 않게 된다.


그렇게 이모가 도망치듯 급하게 그곳을 떠나게 되고, 엄마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직장에서 의외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엄마는 침묵을 깨뜨리게 된다.


당시 아빠는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한 후 오 년을 혼자 지내고 있던 상태로, 엄마를 위로하게 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러다 결국 식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한 후 살림을 합치게 된다.


엄마의 집에서는 후취 자리에 직업도 재산도 변변찮은 남자와의 결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게 되고, 결국 엄마는 가족으로부터 절연당한다. 그즈음 순애 이모와 다시 연락이 닿은 엄마는 아이를 낳았다며 놀러 오라는 순애 이모의 말에 오랜만에 이모를 만나러 안양으로 가게 된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만남을 이어가지만, 서로 솔직하지 못한 탓에 항상 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받게 된다. 현실적인 격차와 멀어진 감정선 사이에서 점차 엄마는 이모가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기 시작하고, 둘은 다시 연락이 끊기게 된다.


그 후에 엄마는 이모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이모부가 출소한 해의 겨울이었다. 통닭을 사들고 간 이모의 집은 퀴퀴한 냄새가 났고, 가족들의 상태는 매우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억지스럽게 참아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머무르던 중 예상치 못한 순간을 경험하게 되면서 엄마는 그 집을 뛰쳐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이모와 엄마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이모는 엄마가 사 온 통닭을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혼자 통닭을 먹기 시작했고, 딸아이는 닭 다리를 아버지에게 건네지만 장애를 입은 아버지는 먹지 않겠다며 거절하다 이내 소변을 지리게 된다. 소변 줄기는 엄마의 손과 옷을 적시게 되면서 황급히 엄마는 자리를 뜨게 된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러 각자의 삶을 이어가던 중 엄마가 인공관절 삽입수술을 받고 입원한 병원에서 엄마는 순애 이모를 봤다며 자고 있던 나를 깨운다.


어린 시절 자신이 알던 언니의 모습으로 찾아왔다며 생생한 경험담을 전하지만, 나는 그저 무섭게만 다가온다. 하지만 엄마의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엄마가 이모의 유품을 건네받게 되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숨겨둔 그리움과 미안함의 응어리가 터져 나온 탓은 아니었을까?



*****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오랫동안 소식을 끊고 살게 되면 한동안 서먹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큰일을 겪고 내쫓기듯 멀리 떠난 언니를 다시 만난 엄마의 입장에서 함부로 말을 건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모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 주지 못했다.

114페이지 中

-----


이렇듯 서로를 배려한다고 생각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결국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면서 결국 과거의 관계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

이십 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 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115페이지 中

-----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줬던 언니를 잃고, 엄마는 한동안 또다시 그런 인연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할 만한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

"언니는 가벼워지고 있구나"

엄마는 손바닥만큼 작아진 이모를 보며 말했다.

(...)

창에서 햇살이 내려오자, 엄지손가락만큼 작아진 이모가 빛에 실려 떠났다

(...)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었다.

121페이지 中

-----


수술 후 회복하는 과정에서 만난 언니에 대한 꿈은 어쩌면 또 다른 복선을 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언니의 유품을 마주한 뒤에 떠오른 오랜 죄책감이 꿈을 통해 전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차마 하지 못한, 마음속 이야기를 엄마는 어쩌면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라는 말로 대신한 것은 아니었을까?



=====

한지와 영주

=====


영주는 프랑스 여행 중 일주일만 머물기로 했던 수도원에서 일곱 달을 보내게 된다. 때문에 수도원의 도움으로 비자를 받아야 했고 대학원을 휴학해야 했다. 그때 영주의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수도원은 열아홉 살부터 서른 살 미만의 사람들만을 장기 봉사자로 선택되어 머물렀는데, 그래서인지 영주는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원래 계획이라면 영주는 대학원 공부도 마무리해야 했고 할 일이 많았다. 발전하기 위해,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 더는 머물러서는 안됐다. 그럼에도 어쩐 일인지 영주는 이곳에서 머물기를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남자친구와 부모님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수도원에 머문 지 네 달이 지났을 때 영주는 새로 이곳에 봉사자로 오는 이들을 픽업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한번은 케냐에서 출발한 한지와 카로를 테오와 함께 마중 나가게 된다.


그중 한지는 영주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았는데, 검은 유화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려진 사람처럼 그 애의 피부는 순수한 검은빛이었고, 한눈에도 190센티미터는 넘어 보이는 장신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봉사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크게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늦은 시간 수도원 근처에 있는 크고 작은 마을로 방문객들이 가서 소음공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방문객을 막는 '나이트 가드' 일에 한조로 편성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저녁 아홉시부터 열한시까지 짝이 되어 이주일간 A 구역을 맡는 일이었는데, 그때 둘은 벤치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대학원에서 지질학을 공부하고 있는 영주와 나이로비에서 수의사로 일했던 한지가 일반적으로 나눌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해 어느 순간에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까지 공유하게 된다.


당시 이 둘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꽤 친밀해 보였는데, 그러다 어느 날 한지는 돌연 영주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영주는 바로 전날까지도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한지의 단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때가 한지가 나이로비에 가기 이주 전인 9월 12일이었는데, 그때부터 한지가 돌아갈 때까지 둘은 그렇게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보내게 된다.


그런 한지의 태도에 대해 영주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는데, 가끔씩 한지가 영주를 향해 웃으며 '단순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계속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을 할 때 어쩐지 말에 뼈가 있다고 느꼈던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한지는 대놓고 영주를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고, 영주는 마침내 한지의 그런 행동에 대해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한지를 괴롭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주는 한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한지의 뜻대로 영주도 한지를 못 본척한다.


한지가 떠나는 날, 영주는 자신이 쓴 일기를 테오를 통해 한지에게 전달하지만, 결국 일기는 다시 영주에게 돌아오고 이내 함께 머물렀던 친구인 테오 또한 그곳을 떠나게 된다.



*****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유일하게 다른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소설은, 이유 모를 단절에 대해 다루고 있다. 속에 담아둔 가정사까지 털어놓을 만큼 영주와 친밀하게 지내다 돌연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한지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밝히고 있지 않아 사유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영주는 어림잡아 대략적인 짐작만 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명확한 사유는 알기 어렵다.


어쩌면 이것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단편을 그리고 있는 소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잘 지내던 친구가, 지인이 어느 날 갑자기 이유 없이 연락을 두절하게 되면 상대방은 그냥 그렇게 배척을 당하고 만다.


이 이야기는 그런 상황에 대한 일들을 빗대어 그린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기를 멈춰 서는 안 된다고 말해 왔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 버릴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 머물기를 택했다.

129페이지 中

-----


영주는 어찌 보면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었다. 만약 예정대로 그곳에서 일주일만 머물다 떠났다면, 어쩌면 한지와도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일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둘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음을 알고 친구들은 이유도 모른 채 영주만을 질책하는데, 여기에서 어쩐지 흔하게 일어나는 기시감을 느낀다. 그들은 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영주에게만 그런 태도를 보였던 걸까?


한편 영주가 그곳에 일곱 달이나 머물게 된 사연은 뭘까? 어쩌면 너무 지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후에 수도원을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영주에게 있어 그곳에서의 일은 어쩌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먼 곳에서 온 노래

=====


소은은 미진 선배를 그리며, 봄 학기 강의를 마치고 페테르부르크에 가게 된다. 미진 선배가 페테르부르크 대학원에 입학한 지 십 년만으로, 당시 미진 선배의 룸메이트였던 율랴가 마중 나와주었다.


율랴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삼 년을 미진 선배와 함께 살았는데, 소은마저 살뜰히 챙겨주며 미진 선배가 머물렀던 방도 내어준다.


소은에게 있어 미진 선배는 대학 때 노래패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로,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당시 선배는 스물다섯 살 고학번 선배였고, 이들은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에 마로니에 광장에서 공연도 함께 했다.


처음에는 그리 큰 접점이 없었으나 술자리에서 미진이 선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소은을 구해주게 되면서 가까워지게 되고, 이후 함께 살 때는 도스토옙스키로 인해 친밀감을 느끼게 되면서 둘은 둘도 없는 절친이 되게 된다.


소은과 미진은 미진이 러시아에 가기 직전 삼 년을 함께 살았는데, 이후 세 달 후 노래패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 노래패는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소은과 미진의 사이는 여전히 지속된다.


미진이 러시아에 있을 때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소은을 보기 위해 무리해서 한국으로 달려갈 만큼 둘의 사이는 각별했는데, 이제는 그런 미진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상황이다.


2009년 여름밤, 아무 이유 없이 그녀의 심장이 정지하게 되면서 서른두 살에 객사했기 때문이다. 이제 소은은 그녀에게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건넬 수 없다.


애초부터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던 소은이었기에 어쩌면 우울증이 깊어졌을 때 더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의지하고 또 의지했던 미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그녀는 자제심이 무너질까 봐 노래도 듣지 못하고 페테르부르크에도 발을 딛지 못한다. 감정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때 손을 잡아주던 사람이 율랴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폴란드 여자에게 소은은 일기를 쓰듯 지난 일 년간 메일을 쓰면서 감정을 추스르고 마침내 페테르부르크에 올 용기도 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은 그렇게 미진 선배를 그리며 돌고 돌아 페테르부르크에 오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


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연대를 통해 아픔을 치유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먼 곳에서 온 노래>는 미진을 회상하며 소은과 율랴가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한국에서 3년, 페테르부르크에서 3년을 각각 룸메이트로 보냈던 이들이 각자 간직하고 있는 미진에 대한 추억을 나누며 아픔을 치유하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전혀 몰랐던 사이가 어느새 꽤 가까운 사이가 된다.


기대고, 기댐을 받으면서 미진이 머물렀던 곳을 공유하고, 그녀를 회상하며 치유해가는 과정은 사람의 온기가 주는 강력한 힘을 믿게 만든다.


미진이라는 사람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된 소은과 율랴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관계가 된다. 이로써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

미카엘라

=====


이 십오 년 전 엄마는 교황님이 집전하시는 미사를 보고 싶어 멀리서 서울로 올라간 적이 있다. 그때 그녀도 엄마를 따라 함께 왔었는데 당시 기억나는 건 엄마가 그녀의 입속에 넣어준 자두 맛 사탕이다.


성인이 되어 나는 서울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엄마가 서울의 그녀 집에 온 건 한 번뿐으로, 스물일곱이 될 때까지는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있어서 오지 못했고, 그녀가 혼자 살게 되자 그때야 그녀의 집을 보러 왔지만 하룻밤 자지도 않고 금방 떠나게 된다.


엄마는 쉬는 법을 몰랐다.


엄마는 무능한 남편을 부양하고 가장 노릇을 하면서 그것을 늘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 와중에 아빠의 인생은 끊임없는 구직과 퇴직으로 점철되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희생하며 살았는데 아빠의 학생이었던 엄마는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지는 아빠를 업고 도움을 구하러 다녔고, 데이트할 때는 돈을 전부 털어서 보약을 지어 주었다. 결혼식 때는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고, 신혼 기간에는 교도소에서 징역살이하는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늘 감사한 일이라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이번에도 또다시 교황님의 미사를 보고 싶어 서울의 광화문 광장으로 구경 온 엄마는 행사가 끝난 후 딸에게 연락하지 않고 홀로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딸 집에서 자고 온다며 이야기 해둔 채로 말이다.


거기에서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된 엄마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할머니의 친구분과 따님이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월호 희생자 모임 공간에 아이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 친구분과 따님을 찾기 위해 함께 광화문 광장으로 향한다.


복잡하게 뒤엉킨 사람들 속에서 이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고, 아이의 이름 또한 알지 못해 서성거릴 뿐이다. 이때 유일하게 아는 것은 그저 평소 자주 불렀던 아이의 세례명이 '미카엘라'라는 것이었다.


이때 연락이 닿지 않던 엄마를 애타게 찾던 딸 미카엘라가 엄마를 발견하게 된다.



*****


가족을 위해 늘 헌신하고 희생하던 엄마는 유난히 교황님이 참석하는 미사에 직접 참여하고 싶어 한다. 이 십오 년 전 어린 나와 함께 서울에 올라온 뒤로, 다시 교황님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엄마는 홀로 서울 광화문을 찾는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지만, 혹시 딸이 욕먹을까 봐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딸집에서 하루 머문다는 거짓말을 하고, 정작 딸에게는 연락 한 통 없이 그렇게 미사에 참여한 후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이처럼 딸아이를 위하는 엄마의 마음은 같은 세례명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아이에게도 전이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우연찮게 찜질방에서 한 할머니의 사연을 전해 듣고 엄마는 서슴없이 동행한다.


아이를 품는 엄마의 마음으로, 누구든 엄마이고 어린 사람이면 누구든 딸이라는 심정으로.


-----

"참으로 감사한 시간이었지."

-----


엄마는 자신의 삶에 대해 늘 감사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감내하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품고 사는 엄마를 보면 너른 바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비밀

=====


현재 할머니는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처음에 암세포가 발견되었을 때 수술과 항암 치료 결과가 좋아서 오 년 뒤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육 개월 뒤 암세포가 다른 쪽이 전이되면서 계속 악화되고 있는 상태다.


할머니는 같은 길을 딸의 차를 타고 팔 년째 다니며 문득 손녀 지민이 그립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부터 소식이 끊겨 볼 수 없는 지민을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있을 뿐이다.


할머니는 맞벌이하는 딸네의 요청으로 어릴 때부터 지민을 맡아 키웠다.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로 딸아이를 향해 사돈어른이 모진 말을 거침없이 쏟아낼 때면 손녀인 지민과 산책을 하며 달래주곤 했다.


할머니 말자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면서 딸애가 받지 못한 사랑을 손녀 지민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정성을 쏟았다. 지민이 또래의 아이들처럼 해맑게 자라기를 바라는, 철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할머니의 바람이 담긴 애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할머니의 바람이 와닿았던 걸까 어느 날 지민은 책받침 하나를 가지고 와서 할머니에게 열 밤 동안 가나다라를 가르쳐 준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른을 앉혀놓고 가르친다는 게 조금 우스운 일일 수도 있지만 할머니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배운다.


이후 정말 열밤 후에 할머니는 책받침에 적힌 모든 한글을 다 읽을 수 있게 되는데, 덕분에 어릴 적 배우지 못한 설움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였는지 지민은 할머니에게 있어 유달리 더 소중한, 선물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중 지민이 중학교 삼학년 때쯤 지민 아빠의 일자리가 서울에 잡히게 되면서 할머니와는 시외버스로 약 2시간 걸리는 거리로 분가하게 된다.


이후 지민은 쑥쑥 자라 선생님이 되고, 이후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소식을 전해오고는 했다. 그러다 갑자기 중국에 있는 모 학교로 떠나게 되면서 다시는 만나거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워낙 산골 짜리에 위치해 있어 소식을 전하기 어렵다며 딸 영숙을 통해 가끔 소식을 전해오곤 했던 것이다. 조금 이상했지만 할머니는 그러려니 하며 마음속으로 잘 지내기를 응원한다.


또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일 년 반 전부터 딸 영숙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눈에 띌 정도로 살이 빠지고 정신없는 것 같이 횡설수설했다는 점이다.


할머니는 종종 딸 영숙의 집에 들를 때면 지민의 방에 들어가 한참을 둘러보고는 했는데, 그 방은 그 애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탓인지 할머니는 지민이 중국으로 간 뒤 지민의 '할머니'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환청으로 여러 번 듣기도 한다.


그렇게 그리움을 삭히던 중 지민의 목소리가 흐려지거나 그 애가 자꾸 멀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면 할머니 말자는 연필을 깎아 지민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이제 할머니는 일흔이 되었고, 지민은 스물여 덞이 되었다.



*****


설마설마하면서 보게 되는 이 소설은 마지막 내용을 통해 할머니의 죽음 역시 곧 임박했음을 알게 된다.


-----

집배원이 들어갈 수 없다는 그곳으로 어떤 편지도 배달되지 않는다는 그곳으로 말자는 지민에게 직접 전할 그 편지를 접어 가슴에 품었다.

266페이지 中

-----


암이 전이되면서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할머니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다. 그래서인지 딸 영숙은 남편과 협의해 손녀 지민이 세월호 희생자임을 숨기는 듯하다.


할머니에게 지민이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던 딸 영숙은 자신의 아픔은 잠시 접어두고 할머니를 위해 잠시 사고 소식을 숨긴다. 할머니는 굳이 딸에게 사정을 묻지 않지만, 어쩌면 어렴풋이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삶에 의해 시시때때로 침해당하고 괴롭힘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254페이지 中

-----


애지중지하며 정성으로 키웠던 손녀 지민이었기에 아이의 죽음을 할머니에게 직접적으로 알리는 것은 어쩌면 더 큰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가족에게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비밀이 생긴 것이다.


할머니는 아이가 알려준 글자로 편지를 쓴다. 그리고 후에 그리움을 담은 마음의 편지를 직접 전하고자 한다.



=====

마무리

=====


우울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쇼코의 미소>는 독자에 따라, 해석의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힐 여지가 많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키워드는 연대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7편의 단편에는 공통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등장하는 데 이를 통해 우울이나 좌절감으로 힘든 상황을 겪어내고 있는 이들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기대고 기댐을 받으며 연쇄적으로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문득 우리의 모습도 어쩌면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나약하면서도 강한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람 '때문에' 상처받지만, 또 사람 '덕분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은 우울감이나 좌절감 때문에 제자리에 멈추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신, 그 자리를 공감, 연대, 공유와 같은 키워드로 채워 넣어 서로 이해하고 다독여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보면 어떨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달 살기 가이드북 : 동남아시아 - 2024 최신판 #해시태그 트래블
조대현 지음 / 해시태그(Hashtag)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선정한 한달살기 좋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에는 도시별 특성과 교통편, 음식 등의 기본정보는 물론 알아두면 좋을 팁과 관광지에 대한 소개가 함께 있어 여행시 참고하기 좋다. 특히 처음 한살달기를 경험할 경우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시태그 체코 - 2024 최신판 #해시태그 트래블
조대현 지음 / 해시태그(Hashtag)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할때 꼭 가봐야 하는 나라 체코! 맛있는 음식은 물론 아기자기한 풍경들은 동화속 마을을 연상시킨다. 특히 주황색 지붕과 정교한 조각들은 도시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볼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예쁜 길을 걸으며 도시 곳곳에 숨겨진 어여쁜 보물들을 찾아 나만의 지도를 완성해 보면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