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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ㅣ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평점 :
앞서 읽었던 <방구석 미술관> '서양'편을 재밌게 읽으면서, 다음 편인 '한국'편까지 섭렵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한국편이 더 좋았다는 도서관 사서분의 추천도 한몫했는데, 그래서인지 호기심을 가지고 더 적극적으로 읽게 되었던 것 같다.
모두 읽고 난 후의 소감부터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개인적으로 더 흥미롭고 재밌게 읽었던 책은 한국편보다는 오히려 앞서 읽었던 서양편이었다.
서양편의 경우 익히 알려진 유명 화가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시대의 화가들을 다루고 있어 그만큼 다양한 작품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화가의 일대기보다 특정 작품의 설명을 더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 인상 깊게 다가오면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때문에 후에 이 책에서 한번 만났던 작가나 작품을 다른 미디어나 책에서 만났을 때 더 반가웠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척도가 되어 주기도 했다.
반면, 한국편의 경우 특정 시대에 국한된 작가들을 다루고 있는 데다 삶의 일대기에 더 집중하듯 풀어내고 있어 작품보다 오히려 작가의 삶이 더 부각되어, 마치 전기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다뤄지면서 오히려 앞선 서양편보다 신선한 느낌은 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방구석에서 관람한다는 설정으로 바라봤을 때, 작가의 삶에 대해 다룬 일대기는 줄이고 작품에 얽힌 비화나 특징들에 대한 비중을 더 많이 다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한편 어쩌면 먼저 읽은 서양편이 강렬하게 다가와서 혹은 서양편에 다뤄진 화가들의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나 격정적인 일화가 한국편의 화가들에게는 발견되지 않아서 이렇게 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없는 일화를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 물 흐르듯 삶의 일대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간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10명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살펴보면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다루고 있어선지 서로 얽히고설킨 인연들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미술을 전공한다는 것, 유학을 갈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이런 관계들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한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도 함께 다뤄지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작가의 일대기에 대한 내용들이 많아 책에서 다뤄진 내용 중심으로 인상 깊게 다가왔던 세 명의 화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여담인데, 화가 '이중섭'의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작가와 작품을 만날 기회를 여러 번 갖게 되면서, 보다 더 가깝게 다가왔던 인물 중 하나다. 이에 대한 콘텐츠는 후에 별도로 추가적으로 공개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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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술 하면 서양미술을 먼저 떠올리고 서양미술만 즐기게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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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20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닌 서구 주도로 이루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 유산은 과거의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며 단절되었습니다.
(...)
그런 근대화 현상은 서구에서 만든 것이 우리가 만든 것보다 좋다는 착오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근대화의 잔재는 현재까지도 사회문화 전반에 남아 있으며, 미술에 대한 인식에도 역시 남아 있습니다.
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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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어느 순간 급격히 우리의 문화유산이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며 서구의 것이 훨씬 세련되고 좋다는 인식이 강력하게 발휘되던 시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한국 문화유산이 관리되지 않으면서 소실된 문화유산도 많고, 또 잘못된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부분 역시 인정한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을 알리는 한편, 독자들에게 알기 어려운 한국 현대미술을 전파하고 흐름의 맥을 짚고 보여주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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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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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916년 4월 10일 ~ 1956년 9월 6일
■미술사적 의의
서구에서 유입된 표현주의, 야수주의를 한민족의 예술적 유산과 융합해 힘찬 기상과 자신의 감정을 순도 높게 표출해 독보적 예술세계를 창조하고, 한국 현대회화에 이정표를 세움
■대표작: <흰 소>, <황소>, <도원>, <서귀포의 환상>, <길 떠나는 가족>, <투계>, <바닷가의 아이들>
이중섭은 한민족의 문화유산과 정신을 회화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리길 꿈꿨던 인물이다. 이를 위한 소재로 그는 한반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가축을 택했습니다.
중섭에게 소는 민족의 상징이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가 그린 소는 민족의 힘찬 기상이나 당시 그가 처한 상황에 따른 감정 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죠.
반면 닭은 아내 마사코와 자신의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두 마리의 닭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모습은 중섭과 마사코의 깊은 사랑과 재회에 대한 간절함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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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그에게는 평생 두 개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1916년 가을 무렵, 평안남도 평원군 어느 부유한 대지주 가정에 장차 화가가 될 운명을 지닌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보통학교(현재 초등학교) 때부터 '편협하리만큼 그림에 열중하거나 하나의 소재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파고드는 습성'이 옆에 있는 친구(화가 김병기)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소년이 화가로 성장하는 것은 정말 운명이었나 봅니다.
이후 열다섯이 된 중섭은 오산고등보통학교(이하 오산고보)에 입학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더 단단하게 다질 기회를 얻습니다. 오산고보는 독립운동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의 일원이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기도 했던 독립운동가 이승훈이 세운 학교입니다.
단단한 민족정신과 진정성 있는 삶을 전수하는 오산고보에서는 일찍이 백석, 김소월이라는 걸출한 시인을 배출하기도 했죠. 이런 환경에서 중섭은 자연스럽게 민족 고유의 정신을 그림에 담아내는 것을 일생일대의 화업으로 삼게 됩니다.
더불어, 한국 근대 서양회화의 시작을 연 화가 부부, 임용련-백남순이 오산고보 미술 교사로 부임합니다. 이 화가 부부는 당시 유학을 가야만 배울 수 있던 인상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구성주의 등 서구의 회화 양식을 중섭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강화되며 점차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하기 어렵게 되자, 임용련은 한글 자모로 구성하는 회화를 학생들과 함께 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중섭의 작품 속 서명에서 'ㅈㅜㅇㅅㅓㅂ'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서명을 한글 외에 다른 언어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예술이 단단한 민족정신 안에서 일구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의 첫 번째 사랑
오산고보 시절부터 그는 민족의 정서와 정신을 담는 존재로 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타국에 나라를 빼앗긴 슬픈 현실에 말문마저 탄압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이중섭은 민족의 존엄성을 그림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 존엄성을 은밀하게 담아 우리 민족만이 알아챌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할 존재는 소였습니다.
'소를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내겠다'는 그의 열정은 주변 지인들이 보았을 때 미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두 번째 사랑
이중섭이 사랑하는 것은 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소를 그리던 스물셋 중섭은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3년간 꾸준히 엽서에 그림을 그려 애정 공세를 펼치는 중섭. 사랑으로 활활 타올랐을 1941년에는 무려 80여 통을 그려 보냅니다.
1943년,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섭은 원산으로 돌아옵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사랑을 나누며 가슴 앓이 하던 둘. 결국 그해 5월 마사코가 바다를 건너 이중섭을 만나러 오며 둘은 결혼합니다. 중섭은 조선의 여인이 되었다는 뜻에서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조용하고 평안한 생활 속에 두 아들까지 얻게 된 중섭-남덕 부부. 행복도 잠시. 안타깝게도 시대는 중섭 가족의 평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원산에 있던 중섭 가족은 포화의 위협 속에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제주도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제주에서 버티던 시절도 잠시. 다시 돌아온 1952년 부산에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아내는 폐결핵에, 두 아들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맙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영영 이별할지도 모르는 상황. 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을 아내의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떠나보냅니다.
전란 속에서도 그가 삶을 이어갈 유일한 힘이 돼주었던 가족과의 생이별. 이제 중섭은 가족과 재회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불도 땔 수 없는 작은 판잣집. 종이 살 돈도 없는데 고가의 수입 물감을 가지고 있을 리도 만무했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물어야 했던 그는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피난지에서 그리고 또 그렸던 은지화는 초벌 그림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형편이 나아지면 유화로 옮기기 위해 미리 준비하던 것이었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은지화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소실되거나 은박지 위에만 남아 있습니다.
다행히 그 원대한 구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은지화를 유화에 옮긴 <도원>이죠.
나아가 중섭은 자신의 원대한 기상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원천을 고구려인에게서 얻어옵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서 고구려인이 표현한 산을 <도원>에 끌어온 것이죠. <도원>은 중섭이 가슴에 꽉 쥔 '희망의 불꽃'인 것입니다.
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이 최악이었던 상황. 그러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렇게 은지화에 이어 편지화가 탄생합니다.
분명한 의지를 전하는 선과 투명하고 맑은 색채로 자신과 가족을 새겨 편지에 담은 그림. 현실은 비참했음에도 바다 건너 가족에게 보내는 그림은 한없이 밝기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품에 안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그의 간절함이 너무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절절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가족과 헤어지고 일 년 후, 중섭은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탑니다. 수소문 끝에 체류 기간 일주일이 허락되는 선원증을 어렵사리 구한 것이죠.
일주일의 시간은 너무나 달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법,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보고 싶던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 중섭. 그 어느 때보다 기운이 넘쳐흘렀습니다.
1953년 겨울, 그는 통영으로 갑니다. 전쟁의 상흔 없이 남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 그곳에서 그는 지금껏 쌓아온 자신의 모든 내공을 쏟아낸 소를 완성합니다.
어릴 적 호기심에 소를 그리기 시작한 소년. 이후 온갖 시련을 겪은 서른아홉의 사내는 어느덧 서양의 붓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던 '서예적 소'를 창조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통영에서 중섭은 소를 포함해 많은 걸작을 남깁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합니다. 그 자신이 <흰 소>가 되어 억세게 전진, 전진, 또 전진합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작업을 하느라 그는 이미 깡말라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지만, 가족을 위한 마음 하나로 붓을 움직입니다.
1955년, 마흔에 접어든 그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5년간 쉼 없이 준비해온 최후의 결전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개인전을 연 것이죠. 이 전시를 위해 그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온 것입니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이 열립니다. 출품작 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20여 점이 판매되죠.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쁘지만도 않은 성과였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 작품값을 받는 데에 있었습니다. 작품을 사간 이들 중 대부분이 작품값을 치르지 않았던 것이죠.
전쟁 후 사회적 시스템이 안정되기 이전에 전시를 강행한 화가에게 돌아온 건 그 빈틈을 노린 비열한 자들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구에 내려가 남은 작품들로 전시를 열어 보았지만, 판매 성과는 보잘것없었죠.
이렇게 5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최후의 전시는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5년간 참아왔던 울분은 허무와 좌절이 되어 터져 나왔죠.
1955년 4월 대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중섭은 지인에게 자기 작품이 가짜라며 비하했다고 합니다. 시대의 오작동 속에 처참히 짓밟힌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좌절. 안타깝게도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중섭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1955년 4월 대구에서 개인전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남은 작품을 지인들에게 나눠줍니다. 그리고 그 외 나머지는 불에 태워버립니다. 그가 그렇게 정신줄을 놓고 있을 때, 일부 속물들은 하이에나처럼 그의 방에 찾아 들어 훔치듯 작품을 가져가 유용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던 예술에 대한 비하는 곧 자신에 대한 비하와도 같았습니다. 중섭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리고 엄지손가락을 피가 날 때까지 문지르며 자학을 하기도 합니다.
우울증, 피해망상 등으로 추정되는 정신질환과 함께 음식 섭취를 거부하는 거식증으로 영양실조에 이른 그는 황달병과 간장염이 심화되며 온몸이 노랗게 물들고 맙니다. 불과 2년 전 통영의 기운을 받으며 그린 초인적 소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생명력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화면 밖을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소가 중섭이 마지막으로 그린 소, <덤벼드는 소>입니다. 그 자신이기도 했던 소. 이 소의 깡마르고 처참한 모습에서 스스로 생의 마지막으로 치닫는 중섭의 구슬픈 울부짖음이 들려옵니다.
"남덕 씨에게 태현이와 태성이를 맡겨 고생시킨다는 게 너무 미안하오. 부족한 나를 널리 이해해 주기를 바라오."
1955년 12월 어느 날. 중섭이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꺼내고 싶지 않았던 미안하다는 말을, 그는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며 계속 쇠약해져 가던 그는 결국 스스로 걸을 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죠. 전쟁 이후 조선 땅을 홀로 떠돌며, 가족을 그리며, 소를 그린 마흔하나의 사내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어느 병원 침대 위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합니다. 시대의 혼돈이 낳은 비극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중섭을 국민화가라 부를까요? 아마도 그의 삶에서 나온 소를 비롯한 모든 그림이 20세기 한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가 겪은 고난과 아픔은 당시 한반도 위에서 생을 이어가던 모든 이의 고난과 아픔이었습니다.
중섭과 중섭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와 '애달프면서도 따뜻한' 기억의 조각이 됩니다. 그렇게 중섭은 국민화가로 우리 마음 한편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56년,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그의 은지화 3점을 소장품으로 결정합니다.
알고 보니 1955년 서울 전시에서 한 미국인이 은지화를 구입했고, 그것이 바다 건너 뉴욕으로 가게 된 것이죠. 그가 포기한 꿈은 그의 삶 끝에서 이뤄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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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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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913년 2월 27일 ~ 1974년 7월 25일
■미술사적 의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한민족이 가진 미의 정수를 추상회화에 녹여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창조해 한국 현대회화에 이정표를 세움
■대표작: <론도>, <항아리>, <산월>, <사슴>, 점화 연작
김환기는 한국에서 아무도 추상미술을 하지 않던 때 추상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1947년 결성한 모임이 신사실파입니다. 당시 유일하게 추상을 추구하던 유영국, 이규상과 의기투합한 동인입니다.
하나의 공통된 회화 양식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추상에 민족의 미와 얼을 담아내겠다는 뜻에서는 공통점을 보였습니다. 또 순수한 조형예술을 추구하는 것 역시 공통점입니다. 이들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동인으로 기록됩니다.
진정 새롭고 경이로운 '김환기만의 추상 우주'를 창조해 세계인과 나누려 했죠. 그는 점화로 그것을 성취합니다. 현재 그의 점화는 한국을 넘어 세계의 미적 유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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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는 바로 김환기입니다.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말년 점화 작품 <우주>가 약 132억 원에 낙찰되며 환기는 한국작가 중 가장 비싼 작품가를 기록한 주인공이 되었죠. 심지어 역대 가장 비싼 한국 작가의 작품 10점 중 9점이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왜 가장 비싼 작가일까?'
우선 환기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한국 20세기 현대회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단색화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이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미술사적 가치를 공고히 인정받는 작가일수록 작품가는 고공상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김환기의 경우 이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작품이 너무 좋습니다.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로 좋습니다. 작품이 가진 미술사적 가치도 가치지만, 환기가 그린 그림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에너지가 있습니다.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모든 세계인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그의 그림은 '돈의 가치'마저도 무색하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을 품고 있습니다.
환기와 향안, 이 두 사람이 함께 창조해가는 부부의 세계 속에서 꽃 피는 환기의 영롱한 예술세계.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낳고 기른 향안. 오늘 이 아름다운 부부의 세계를 함께 만나볼까요?
일본에서 중학교 유학을 마치고 온 환기에게 아버지는 '학력은 그 정도면 충분하니 이제 가업을 이어 대지주의 삶을 살기'를 요구했습니다.
소작인들의 소작료를 받으며 쉽게 부가 쌓이는 편한 삶이었지만, 환기는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고 싶었죠.
단식투쟁을 하며 다시 유학을 보내달라는 환기에게 아버지는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협상안을 제기합니다.
이 협상안에 동의한 환기는 약속대로 아버지가 연결해 준 여인과 결혼하며 아이를 가집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비로소 아버지의 속셈을 알아챈 환기. 그렇지만 자신이 정한 뜻은 절대 꺾지 않는 환기는 아버지 몰래 섬을 탈출합니다. 그는 일본으로 가는 데 성공합니다.
타인의 간섭 없이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그 고민의 끝에 '예술'이 있었고, 그 예술의 다양한 분야 중 '그림'을 택했습니다.
환기는 니혼대학 예술 학원 미술부에 입학해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본기와 유화를 익히는데요. 이때 한 활동 중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방가르드 양화 연구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곳에서 환기는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주의 회화와 거기서 진화되어 탄생한 추상회화를 접하게 됩니다.
당시 연구소의 많은 젊은 화가들은 추상 중에서도 가장 최신의 급진적인 '순수 추상'을 실험하고 있었는데요.
환기는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대세이기도 했던 순수 추상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구상과 추상을 짬뽕시킨 '반추상'을 추구했죠. 다시 말해, 관객이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리는 '구상'과 화가의 머릿속 상상력으로 색채와 형태를 캔버스 위에 구성하는 '추상'을 조화롭게 섞어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창조하려 한 것이죠.
'반추상' 양식과 함께 환기는 '조선이 가진 미의 정수'를 자신의 그림에 담아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청소년 때부터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이라는 타지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 보니 고향이 그리워지고, 조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거죠.
환기는 자신의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상을 그림에 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환기는 틈날 때마다 고향 안좌도로 향합니다. 고향과 조국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또 바라본 환기. 그 결과 그것들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스물다섯이 되던 1937년에는 오직 '조선의 미'를 더 깊이 탐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일본을 떠나 고향으로 완전히 돌아오고, 이로써 작업에 전념합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7년이 지나 환기는 <섬 이야기>라는 참 소박하고 귀여운 작품 한 점을 남깁니다.
그가 순수 추상이 아닌 반추상을 고집한 이유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조선의 미'를 누구든지 명확히 알아보고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이미 이때부터 환기는 동서양의 모든 미술 작품을 통틀어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참 정직하고 참 깨끗하다. 환기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는 실제로 참 그랬습니다. 1942년 환기의 아버지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아버지의 모든 재산과 이권을 내려놓습니다. 환기는 모든 소작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고 땅문서까지 돌려줍니다. 또 아버지 등에 떠밀려 혼인했던 아내(밀양 박씨)와도 이혼하게 됩니다.
진정 사랑해서 혼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을 만큼의 재산을 나눠주며 작별합니다. 이로써 환기는 세 딸과 함께 사는 돌싱 화가가 됩니다.
▶변동림과 이상의 만남
그리고 이 시기, 경성에 있던 한 여인은 상을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스물한 살의 여인, 변동림이 사내를 만난 건 1~2년 전인 1934~35년 무렵. 그녀의 오빠(변동욱)가 경영하던 다방 낙랑파라에서였죠.
이화여전 영문학과 학생이었던 동림은 매일같이 커피와 음악을 즐기러 낙랑파라를 찾았는데요. 그곳을 그녀만큼 자주 찾던 단골이자, 또 절친이었던 화가 구본웅과 함께 그곳을 설계, 시공했던 사내가 있었죠. 바로 이상입니다.
본명 김해경.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건축가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잠재울 수 없는 예술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죠. 이상이란 필명으로 시대의 관습을 파괴하는 기괴한 예술작품들을 발표하는데요. 그가 천재적 재능을 분출한 곳은 시와 소설 등 문학이었습니다.
그 무렵 이상은 낙랑파라에서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던 동림을 봅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하게 되죠. 상은 동림에게 '자신이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으니 꼭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하고, 동림을 그 말에 끄덕이며 상과의 연애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은 동림에게 별안간 물었죠. "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
'먼 데 여행이 맘에 들었고 또 죽는 것도 싫지 않았던 동림. 1936년 상과 결혼하면서 신혼의 단꿈에 젖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결혼하고 3개월이 지난 즈음 상은 일본 도쿄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상 불온 협의로 일경에게 체포되는데요.
얼마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수년 전부터 그를 괴롭히던 폐병이 급속히 악화되며 결국 생사에 기로에 서게 됩니다. 상이 오늘 내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동림은 한걸음에 도쿄로 달려가 병실에 누워 죽어가는 상의 손을 붙잡습니다.
"무엇이 먹고 싶어?"라는 동림의 물음에 상은 "메론이 먹고 싶다" 답하고, 이후 상의 감긴 눈과 입에서 더 이상 그 어떤 언어도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동림의 첫사랑이자 한국 근대문학의 별은 26년 7개월의 생을 마감하고, 동림은 스물둘에 혼자가 됩니다.
▶동림과 환기의 만남
그 이후 동림은 한 시인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노리다케 가츠오라는 일본인이었죠. 이상 사후에 그의 시를 사용하는 문제로 동림을 만나며 시작된 인연이었습니다. 어느 날 노리다케는 동림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 한 명을 소개해 주는데요. 이렇게 해서 각자의 삶을 살던 환기와 동림이 한자리에 마주 앉게 됩니다.
남편 이상과 사별하며 고통을 겪었던 동림. 그렇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밝고 건강한 자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또한 뛰어난 현실감각을 가진 지적이고 명석한 문필가였죠.
그런 동림과 대화를 나누며 환기 역시 짙은 매력을 느낍니다. 첫 만남 이후 동림이 잊히지 않던 환기는 고민 끝에 동림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1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글로써 대화를 나눈 둘은 정신적으로 친밀해지게 되죠.
조혼과 이혼, 그리고 세 딸을 두고 있던 환기는 고백 앞에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직접 만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무렵, 환기의 사정을 알게 된 동림은 그의 과거를 넉넉히 끌어안습니다. 그런 동림에게 환기는 시집을 와주겠냐고 물었고, 동림은 그러겠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집안의 반대 앞에 동림은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꿔 새로 태어나기로 합니다. 김향안. 환기의 성(김)과 환기의 아호(향안)을 받아 변동림은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아호를 그녀에게 온전히 준 환기는 수화(나무와 이야기를 좋아해 지음)라는 아호를 다시 만듭니다. 이렇게 부부로 다시 태어난 둘. 앞으로의 삶을 우리들의 의사와 능력으로 이상적인 생활을 설계해서 실행, 해가기로 맹세합니다. 그 맹세를 지키며 그들만의 지고지순한 세계를 창조해갑니다.
1944년, 서른둘의 김환기와 스물아홉의 김향안은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뜨거운 낭만주의자인 환기는 '나는 그림 그리고, 너는 글 쓰며' 행복하게 살자고 말했지만,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던 향안은 그림과 글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 '생계를 유지할 일'을 찾자고 조언합니다.
향안의 현실감각과 명석함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환기는 아내의 조언 따라 종로에 화랑을 엽니다. 이곳에서 전시를 열어 작품도 판매하고, 고미술품도 판매하며 생계의 기반을 마련할 요량이었죠.
결혼 후에도 자나 깨나 '조선의 미'가 무엇인지 탐구하던 환기. 오랜 탐구 과정 끝에 '하나의 대상'이 점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조선의 백자'였습니다.
백자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해버린 환기. 마음이 가는 것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100% 정열을 쏟아붓는 기질의 소유자 환기는 백자를 닥치는 대로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10년의 세월 동안 언제나 변함없이. 자세히, 그리고 오래, 환기는 백자 항아리를 보고 품고 만지고 쓰다듬고 또 봅니다. 그 미의 정수가 환기의 마음속에 피어올라 몽우리를 터뜨리며 만발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조형과 미와 민족을 우리 도자기에서 배웠다." 환기는 자기 미학의 핵심을 우리 도자기, 그중에서도 조선의 백자에서 얻어왔다고 단언 합니다.
그리고 환기는 '지극히 평범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을 직관으로 깨닫습니다. 자연과 하나 되어 무심의 경지에 이른 도공이 빚었기에 백자 항아리가 '자연 그 자체의 미=평범의 미'를 고스란히 품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조선이 가진 미의 정수이며, 우리의 미가 가진 특유의 멋임을 통찰하게 됩니다.
자연이 평범하듯 백자도 평범하고 자연이 불가사의하듯 백자도 불가사의함을. 그것이 자연미임을. 이제 환기는 자신의 예술은 그 자연미를 고스란히 반영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20대 때부터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조선의 미'를 비로소 40대가 되어서야 찾아낸 것입니다. 진정한 예술, 그것은 한 인간이 낳은 평생의 작업인 것입니다.
그 와중에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환기는 피난지 부산에서 호박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삼복더위로 숨이 콱콱 막히는 세 평 남짓한 그 다락방에서 하루 종일 허리를 구부린 채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립니다.
그렇게 백자의 미, 곧 조선의 미가 담긴 환기만의 '한 걸음 더 진화된' 반추상 세계가 세상에 뽀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 환기의 곁에는 그의 예술을 무한히 사랑하고 이해하며 지지했던 아내 향안이 있었죠. 전시 중에도 환기가 오직 화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묵묵히 생계를 책임진 향안.
백자 항아리는 이렇게 밤하늘로 둥실 떠올라 달이 됩니다.
비로소 이 항아리는 환기의 그림에 담겨 '달 항아리'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환기의 달 항아리는 그를 이은 후배 미술가들에게도 현재까지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달 항아리를 소재로 '조선의 미'를 그림에 담아내는 과제를 수준 이상 이뤄냈다고 판단한 환기. 이제, 세계를 무대로 작품 활동을 하는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예술의 중심지, 프랑스 파리에 가고 싶어 했죠. 그는 자신의 예술이 세계에서 어떤 위치쯤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향안 역시 파리에 너무 가고 싶어 했죠. 1955년 4월, 향안은 홀로 파리로 향합니다. 환기가 파리에서 화가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죠.
파리에 도착한 향안은 환기의 작품 포트폴리오를 손에 쥐고 파리에 있는 수많은 화랑을 두루 돌아다니며 전시 가능 여부를 타진합니다. 더불어, 향안도 미술학교를 다니며 그림을 배웁니다.
"남편이 화가인데 아내가 미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 가정생활은 다소 절름발이 격이 되지 않을까. 부부란 서로의 호흡을 공감하는 데서 완전한 일심동체가 되는 것인 줄로 안다."
그렇게 환기의 파리 진출을 타진한 지 어느덧 9개월이 지난 1956년 1월. 향안은 '파리의 명망 있는 베네지트 화랑에서 전시를 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환기에게 전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갈 여윳돈이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수향 부부와 세 딸,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 한 채뿐이었죠. 파리에 갈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 그 앞에서 환기는 그 집을 팝니다.
그는 파리에서 3년간 활동하며 자리를 잡은 후 가족 모두를 파리로 데려올 작정입니다. 3년 후 매매자에게 집을 내주는 조건으로 집을 판 마흔넷의 환기는 파리로 향합니다.
파리라는 도시 자체는 물론 파리지엔의 생활상도 세심하게 관찰하며 미술 작품 밖에서도 풍부한 영감을 얻죠. 그리고 그런 미적 영감의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오직 그림 그리기에만 쏟아붓습니다.
고국을 향한 그리움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그의 화면에 담기는 '조선의 미, 민족의 미'는 조금씩 더 짙어지기 시작하고, 이내 짙고 강렬한 민족의 노래가 화면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죠.
이렇게 파리에서 3년 동안 200여 점의 작품을 쉼 없이 쏟아내며 민족의 노래를 부른 환기. 베네지트 화랑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파리, 니스, 벨기에 브뤼셀 등지에서 여섯 차례 개인전을 갖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유력 매체로부터 호평을 얻게 됩니다.
고무적인 수차례의 개인전과 평단의 호평, 그리고 컬렉터들의 관심 속에 판매가 이루어진 작품들. 그렇지만, 파리라는 타지에서 안정적으로 체류를 이어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파리 체류 막바지인 1959년 2월에는 수개월 간 밀린 월세도 치르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런 중에도 환기와 향안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싣고 받은 원고료를 한국에 있는 세 딸에게 보냈습니다.
그 사이 환기의 어머니는 파리에 있는 아들과 미처 재회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아끼던 동료 중섭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9년 4월, 수향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어떤 기반도 없던 파리에 가 3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수향 부부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둘의 상호 신뢰는 더더욱 단단해졌습니다.
파리에서의 3년은 그의 내면에 무언가 전혀 새로운 영감을 생성시켰습니다. 환기는 그림 <달 두 개>를 그립니다. 그림에는 '점'이 등장하는데요. 우리네 산천으로 넉넉하게 채워진 보름달을 '두 개의 점'이 사이좋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 두 개의 점은 환기와 향안 아닐까요?
1963년 10월. 어느덧 쉰하나에 접어든 환기는 미국 뉴욕에 갑니다.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서양화 부문 참가 작가로 선정되며 브라질에 방문하게 되는데요.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뉴욕으로 가 예술인생 최후의 도전을 하기로 합니다.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한국에서는 자타 공인 추상회화 선구자였지만, 뉴욕에서는 무명화가에 불과했던 환기. 정착 초기에는 체류 경비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지만 록펠러재단을 통해 1년간 미국에서 예술 활동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됩니다. 빚을 내 마련한 비행기 티켓으로 뉴욕에 도착한 향안. 이렇게 수향 부부의 뉴욕 생활이 시작됩니다.
파리에서 귀국한 지 5년 만에 다시 시작된 뉴욕에서의 도전. 그렇지만 초기 상황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뉴욕의 화랑들은 환기에게 전시 제안을 해오지 않았죠.
천신만고 끝에 1966년 한 화랑에서 전시를 제안해 30점을 출품하는데요. 화랑 주인이 작품 일체를 가지고 잠적하며 작품을 도난당하고 맙니다. 이 무렵부터 수향 부부의 경제 상황은 바닥 그 자체였습니다.
한 달 버틸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향안은 백화점 판매사원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혼자였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애정, 신뢰, 존의로 언제나 변함없이 환기를 신실하게 지지해 주는 향안이 있었습니다.
환기는 하루 종일 서서 자신의 예술세계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점까지 가기 위해 모든 혼을 아낌없이 불사릅니다.
그렇게 뉴욕에서 7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1970년. 한없이 점을 찍고 또 찍길 반복하던 쉰여덟 화가의 화면은 어느새 달 항아리처럼 온전히 무심해졌고, 순수한 코튼 위에 무한한 '점의 우주'를 창조하기에 이릅니다.
오직 푸른 점으로 가득 찬 '점의 우주'를 짓는 무심한 창조자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조선의 도공과 환기. 그 도공이 빚은 달 항아리와 환기의 점화. 그 완벽한 미의 일맥상통! '점화 한 점 한 점'은 '달 항아리 한 점 한 점'이 품고 있는 미를 쏙 빼닮았습니다.
환기의 점화는 뉴욕 미술계를 단번에 홀려버립니다. 평단의 극찬과 함께 뉴욕타임스에 격찬의 기사가 실립니다. 이제 환기의 작품은 그 가치를 인정받고 고가에 거래되기 시작하죠. 그림 인생 40년 만에, 뉴욕 생활 8년 만에 이룬 결실이었습니다.
참 애석하게도 점화가 탄생한 1970년부터 환기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허나 부담스러운 보험료로 의료보험 가입도 하지 못한 탓에 환기는 병원도 가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며 버티기만 했죠.
하지만 영감이 샘솟듯 터져 나오며 예술세계가 활짝 꽃 피는 이 시기를 절대 놓칠 수 없기에, 환기는 매일 쉼 없이 점을 찍는 강행군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환기는 자신의 생명과 예술을 바꿉니다.
매일 하루 종일 서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온 정신을 집중한 채 점을 찍는 행위. 그것은 그의 목과 척추에 심대한 손상을 입히고 말았습니다. 1974년 7월 12일.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든 고통에 척추 디스크 수술을 진행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향안은 병실에서 급한 호출을 받고 달려갑니다. 갑자기 환기의 상태가 악화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는 소식이었죠. 알고 보니 병원이 실수로 낙상 방지 장치를 해두지 않은 탓에 환기가 그만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떨어지며 머리에 충격을 받아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되고, 꿈을 이루고 고국으로 향하겠다던 환기는 이렇게 갑자기, 한순간, 너무 허무하게 떠나버립니다.
환기의 그림들, 이제 아빠를 잃어버렸습니다. 엄마 향안은 그 아이들이 생명을 잃지 않도록, 가장 좋은 환경에서 건강히 잘 자라도록 잘 키우는 일에 남은 생을 바칩니다.
"너도 같이 그림 그리면 좋지 않니?" 그렇게 넌지시 묻던 환기의 물음에도 그리지 않았던 그림. 작업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환기의 물감을 보던 향안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환기가 가장 사랑했던 그 행위를 차곡차곡 이어가며, 향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아이들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도록 뉴욕, 파리, 브라질, 한국 등 국경을 넘나들며 전시를 엽니다.
환기 재단을 설립해 환기의 작품과 예술정신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을 고국에 보내고 싶었던 환기의 꿈을 이어 1992년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엽니다.
모든 것을 세심하게 고민한 엄마 향안의 마음이 담긴 환기미술관. 그렇게 아이들을 건강하게 장성시킨 엄마는 2004년 비로소 환기 곁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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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 여인상을 그린 화가 '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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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913년 2월 27일 ~ 1974년 7월 25일
■미술사적 의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한민족이 가진 미의 정수를 추상회화에 녹여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창조해 한국 현대회화에 이정표를 세움
■대표작: <론도>, <항아리>, <산월>, <사슴>, 점화 연작
그녀는 물감을 겹겹이 발라 진한 색을 우려내며 자신의 한을 아름답게 정화하려 했습니다. '그리기'가 곧 '굿'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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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능을 잘 이해하고 있는 화가, 천경자. 우리는 보통 천경자를 '여인상을 그린 화가'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린 여인상을 곰곰이 바라보다 보면 그녀는 여인의 말 못 할 감정을 담은 '눈'을 그리기 위해 여인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경자는 자신의 감정을 그 여인들에게 이입시켜 그렸습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린 여인상들은 모두 그녀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신의 감정. 그 오묘한 감정을 자신이 그리는 여인의 눈에 담아 '말없이' 전하려 했던 화가, 천경자.
그런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순간에 꼭 그리던 'X'가 있었습니다. 그리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X'였습니다. 정말로 자신이 살기 위해, 다시 태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려야만 했던 'X'였습니다.
도대체 그 'X'는 무엇일까요?
그녀가 회상하는 어릴 적 기억의 대부분이 '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어린 경자는 그만의 예민한 색채 감각을 기르게 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색에 대한 그 추억을 자신의 화폭에 진한 색채로 물들였죠. 그녀의 꽃다발처럼 화려한 색채 구성과 꽃잎처럼 진한 색채 밀도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유산인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 'X' 역시 어릴 적 고흥에서 처음 보게 됩니다.
1941년 열일곱 살의 경자는 일본으로 가 동경여자미술 전문학교에 입학합니다. 전공으로 서양화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기질에 맞는 섬세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녀는 동양화를 택합니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가 집안에 유일한 재산이었던 논밭을 모두 탕진하게 되면서 경자의 유학 생활은 이내 궁핍해집니다.
꾸역꾸역 유학 생활을 이어가면서 주변 학생들에게 열등감도 느낍니다. 그렇지만, 그림을 제대로 그리겠다고 혈혈단신 타지에 온 경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과 거리를 두고 오직 그림 훈련에만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악착같은 노력은 실력으로 드러납니다. 유학 온 지 약 1년 후 완성한 <조부>가 제22회 조선미술 관람회에(이하 선전) 입선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죠. 당시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선전에 그것도 열여덟 어린 나이에 입선한 것은 집안의 경사였습니다.
수많은 수재 중 그녀는 왜 선전 첫 출품작으로 외할아버지를 그린 것일까요? 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어릴 적 행복한 추억,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처럼 행복' 했던 시공간을 선물해 주었던 외할아버지, 그런 그가 경자가 유학 간 후 중풍으로 쓰러지며 반신불수가 되고 맙니다. 이 그림은 그런 외할아버지를 다시 꼿꼿하고 정정한 모습으로 살려내고 싶은 손녀의 마음이 담긴 작품입니다.
1944년, 태평양 전쟁 끝 무렵, 1941년 미국의 영토인 진주만을 습격하며 이 전쟁을 시작한 일본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런 불안정한 일본의 정세와 더불어 몰락해버린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맏이 경자 역시 귀국을 택합니다. 그 귀국이 시련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시련 1 : 이철식과 결혼
당시 전세가 악화된 일본이 조선행 배편을 줄인 탓에 배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때, 우연히 마주친 어느 조선인 유학생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배표를 구해 귀국하게 됩니다. 그 유학생의 이름은 이철식. 이후 그는 조선에 도착한 경자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며 마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3개월 후 조선으로 귀국한 그와 재회한 그녀는 몇 차례 만남 후 운명이라 찰떡같이 믿으며 결혼하게 됩니다. 둘 사이에 1945년 딸 하나(혜선), 1949년 아들 하나(남훈)가 생기게 되죠. 여기까지는 영화의 한 장면같이 잔잔합니다.
시련은 결혼 이후 곧바로 불어닥칩니다. 결혼 전 주었던 믿음과 달리 남편은 너무나 무능했습니다. 고등학교 수학 교사를 조금하다 그만둔 이철식은 특별한 일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한량 생활을 시작합니다.
상습적으로 찾아와 돈을 구걸하거나,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협박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리죠.
이런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경자는 포기할 수 없는 화가의 길을 잇기 위해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화업을 악착같이 이어갑니다. 이 결혼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결혼이었는지.
돈을 구걸하다 사라지는 원수, 이혼하자고 요구해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원수. 20대 초반, 너무 젊은 나이에 경자는 삶의 쓴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시련 2 : 김남중과의 불륜
1948년. 스물넷 그녀는 신문기자 김남중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남중은 유부남이었습니다.
그는 본처와 경자 사이를 오가고 있었던 것이죠.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경자는 그녀 자신을 위해 연을 끊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경자는 김남중과의 애매모호한 관계를 끊지 않고 20여 년간 이어갑니다.
1954년 딸 하나(정희), 1957년 아들 하나(종우)를 출산하며 그 생활을 지속합니다.
자신의 삶에 비애와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그림의 재료로 써야만 하는 화가. 천경자는 그런 예술가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 그녀는 삶에서 시련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재료이기에 그녀 자신을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만들기를 자처한 것입니다.
▶시련 3 : 한국전쟁
1950년 한국전쟁, 일, 출산과 육아, 거기에 뒤죽박죽 엉켜버린 애정사에 치여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경자의 일상은 한순간에 모두 없었던 일이 되어 허무하게 무너져버립니다.
첫 번째 남자 이철식은 한국전쟁 발발 후 행방불명이 되며 영영 소식이 끊기게 되고, 두 번째 남자 김남중은 군에 입대해버립니다. 전쟁통에 밥줄이던 교직마저 끊긴 상황. 집안의 맏이였던 경자는 친정 부모와 두 아이(혜선, 남훈)를 먹여 살려야 하는 극한의 처지가 내몰리게 됩니다.
전쟁 중이라 더 팔릴 길 없는 그림을 경자는 악착같이 그려 직접 팔러 다닙니다. 그림뿐 아니라 글을 써 문예지에 글을 싣기도 합니다. 원고료 한 푼이 귀하고 절박한 때였습니다.
▶시련 4 : 여동생 옥희의 죽음
말 그대로 '억척스럽게' 20대를 헤쳐가던 경자. 그러던 중 정신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련이 닥쳐옵니다. 그녀가 아끼는 여동생 옥희가 결핵에 걸리고 만 것이죠.
너무 비싸 구할 수 없었던 약을 구하고자 경자는 닥치는 대로 돈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성과 없이 시간만 흘렀고 결국 결핵균이 장과 후두까지 번지며 옥희는 1951년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 일은 자신이 (아버지가 하라고 권했던) 의학 공부를 하지 않아 생긴 '저주'라고 여길 정도로 경자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환하게 꽃 필 나이 20대. 그 시기에 온갖 저주를 무차별적으로 받고 있는 여인. 그녀는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기 치유'를 택합니다. 그녀의 자기 치유법은 그림(예술)이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마음마저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부어오를 때, 불현듯 X가 빠르게 그녀의 뇌리를 '스스슥'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 X는 '뱀'이었습니다.
"나는 소녀 적부터 가슴속에 커다란 감상의 주머니를 지니고 있다. 그 주머니가 이날 이때까지 나를 살게 하는 것 같다."
소녀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 온 '감상의 주머니'.
그러나 경자에게 뱀은 행복한 추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릴 적, 친구가 산나물을 캐다 독사에 물려 죽은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는 만큼 뱀은 '저주를 불러오는 악한 것'이었죠.
자신의 삶이 저주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상의 주머니'에서 뱀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그 저주의 대상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기로 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저주를 물리치기 위해 뱀을 그리며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합니다.
그녀는 약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광주역 근처 뱀 집을 찾아가 뱀을 보고 또 보며 탐구하고 스케치합니다. 1951년 3월 여동생 옥희가 죽은 후 참을 수 없는 울분을 토해내듯 종이 위에 뱀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삶이 퍼붓는 저주를 깨끗이 씻어 이겨내려는 자기 치유의 시간. <생태>는 그렇게 전모를 드러냅니다.
독을 품고 있는 악의 상징, 뱀. 그 뱀을 집요하게 추적해, '악의 실제'가 무엇인지 밝혀, 그림 속에 포획해, 악을 소멸시키려 했던 경자. 이를 위해 매일같이 뱀을 뚫어지게 관찰하던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을 체험하게 됩니다.
악하고, 징그럽다고 여겨온 뱀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버린 모순된 상황. 경자는 뱀으로부터 발견한 그대로를 <생태>에 반영합니다. 그리고 이내 깨닫습니다.
뱀에게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저주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슬픔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서러움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저주스럽고 슬프고 서러운 것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시키는 생명력, 이게 바로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그것이 자기 예술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그녀는 깨닫게 됩니다. <생태>로 얻은 이 깨달음은 이후 그녀의 작업에 원동력이자,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자 주제로 자리하게 됩니다.
1952년, 경자는 피난지 부산의 칠성다방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생태>를 출품하는데요. 작품이 너무 괴기스러우며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전시에서 제외되고 맙니다. 이후 그녀는 <생태>를 다방 주방에 방치하듯 보관해둡니다.
오상순 시인이 '기괴한 뱀 그림이 주방에 있다'고 여기저기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이 소문은 여기저기 퍼지며 '천경자는 호주머니 속에 뱀을 넣고 다닌다'는 어이없는 루머까지 양산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런 루머가 퍼지며 <생태>는 오히려 유명세를 얻게 되죠.
이에 힘입어 곧바로 천경자 개인전이 열리고, <생태>가 정식 공개됩니다. 이 뱀 그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며 경자의 개인전은 화제의 전시로 등극하죠. 이렇게 <생태>는 20대 신예 작가 천경자를 미술계에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효자가 되어줍니다.
<생태>를 보기 위해 인파로 가득 찼던 그날, 그 서른다섯 마리 뱀을 노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어떤 화가가 있었습니다. 1954년, 홍익대 서양화가 교수였던 그는 경자에게 동양화과 교수직을 제안합니다. 그 은인은 바로 김환기.
환기는 그렇게 경자에게 서울에 올라와 예술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줍니다. 이렇게 뱀 그림 <생태>는 시련으로 점철된 저주의 20대 시절을 그녀 스스로 치유할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자기 예술의 핵심 주제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954년 나이 서른에 환기의 러브콜로 홍익대 교수가 되며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사실 경자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여전히 김남중과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티격태격하며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또 1년 동안 학교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아 신문 삽화, 출간한 수필집 등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연명하는 등 여전히 경제적 불안정함을 겪습니다.
'채색화인 천경자의 그림은 일본화의 잔재'라는 오해를 받기로 하고, 동시에 추상미술이 유행하면서 구상미술을 하던 그녀의 그림이 저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의 화풍을 고수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갔습니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온 지 약 10년이 지날 즈음. 마흔을 앞둔 경자의 삶은 드디어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맞게 됩니다. 마치 그때 그린 <비 개인 뒤>처럼 말이죠.
어느덧 서른여덞. 그녀는 <비 개인 뒤>를 그립니다. <생태>를 그린 지 11년이 지나 그녀의 그림은 촉촉하게 서정적이고 몽롱하게 환상적으로 변모했습니다.
오랜 세월 바래진 원삼 자락의 슬픈 색, 그 색을 기가 막히게 아름답게 느낀 그녀는 그 색감을 어떻게 자신의 종이 위에 옮겨놓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법의 단초를 동양화가 아닌 서양화에서 찾았습니다. 1957년, 그녀는 모던아트협회에 들어가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유일한 동양화가였던 경자는 그들이 유화 무감으로 색채를 겹쳐서 독특한 색감을 만들어내는 작업 방식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진한 원색을 칠한 곳에 흰색을 겹쳐 칠하는 방식으로 그녀만의 바래진 원삼 자락 같은 촉촉하고 몽롱한 색감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경자만의 독창적인 회화세계가 꽃 피게 된 것이죠.
▶시련 5 : 슬럼프! 영감의 고갈
대학교수로 생활하며, 화풍도, 가정생활도 안정기에 접어들며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40대. 그런데 모순적으로 이런 안정된 생활은 '뼛속부터 예술가'인 경자의 숨통을 다시 옥죄어오기 시작합니다.
사회적으로나 대외적으로는 좋아 보였던 그녀의 삶. 그러나, 예술가로서 내면의 자아는 병들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죠. 가장 큰 문제는 '그림을 그릴 영감이 고갈'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그녀는 자신의 삶에 놓인 '고통'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자신의 영감의 근원인 '고통'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창작을 지속할 수 없음에 큰 혼란을 겪습니다. 소위 슬럼프가 온 것이죠.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우울증, 심지어 자살 충동도 느꼈다고 합니다. 당시 그린 그림이 바로 <자살의 미>입니다.
화가 자신을 믹서기로 상징한 그림.
"뱀이란 주제가 내 생명과 예술을 연장시켜 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상기한 마흔다섯 경자는 본능적으로 다시 뱀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사군도>는 그렇게 폭발하듯 그녀의 영혼에서 뛰어나옵니다. 그런데 이번 <사군도>에 푼 뱀은 다릅니다. 뱀이 '무당'이 되었습니다.
경자의 삶을 옥죄고 있던 살을 풀어주는 무당으로 소환된 것이죠. 보는 누구라도 정신 놓고 무아지경이 되도록 신명 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마치 경자의 삶에 들러붙어 있는 하얀 살을 뱀이 미친 듯이 춤추고 널뛰며 몰아내는 듯합니다.
그렇게 경자와 뱀이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완성된 것이 <사군도>입니다.
<사군도>를 풀어헤치며 굿판을 마친 경자. 심신에 땀을 흠씬 흘리며 자신을 정화하고 난 후, 그녀는 예술가로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방향을 정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 여행! 1969년(45세)부터 1999년(75세)까지 약 30년 동안 20여 개국을 여행하는데요.
오직 살기 위해서. 나라는 사람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영감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만 살 수 있기에. 그녀는 1~3년에 한 번씩 장기간(짧게는 2개월, 길게는 8개월)의 세계 여행을 홀로 떠납니다. 새로운 곳에 가 새로운 영감을 얻어,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것. 이것을 자신의 힘이 닿을 때까지 지속합니다.
이 과정에서 20여 년간 얽히고설켜 풀리지 않던 김남중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합니다. 주변 지인들과의 관계마저도 정리하죠. 그녀는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자유'가 되고자 했습니다.
시간의 굴레 없이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야 했던 그녀에게 이제 대학 교수직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마저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30년간 세계 여행에 드는 경비는 여행을 다녀온 후 창작한 그림과 수필집 판매로 충당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경자의 세계 여행 30년. 1069년 생에 첫 해외여행지는 미국 뉴욕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그녀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부 김환기와 김향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기-향안 부부의 집에 들러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후 타히티에 가서는 그녀보다 79년 앞선 그곳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고갱의 발자취를 찾아 나섭니다.
이전에는 어린 시절 추억에서 영감을 길어왔다면, 이제부터는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에서 영감을 길어와 그림을 그려나가죠.
프랑스 파리에 가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벨 에포크' 시절 예술가들의 성지였던 몽마르트 언덕을 찾아 물랭루즈의 화가, 툴루즈-로트레크의 향기를 맡아보기도 하죠. 이탈리아 피렌체에 가서는 치밀하고 완벽한 데생을 보여주는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자신의 실력을 반성하며 고개 숙이기도 합니다.
고갱, 툴루즈-로트레크 등 자신이 사랑했던 화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본 후, 경자는 이제껏 가보지 못해 상상만 해왔던 풍물을 직접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가보고 싶었던 아프리카 대륙으로 떠난 것이죠.
새로운 풍물에 대한 그녀의 호기심은 계속 이어져 인도, 남미까지 이어집니다. 또 자신이 사랑했던 소설, 영화 등 작품과 관련된 곳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과거를 반추해 봄과 동시에 앞으로 자신의 창작을 위한 새로운 영감을 얻었습니다. 30년 동안의 길고 긴 세계여행. 그 여행길에서 그녀가 창작을 위해 얻은 '영감'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고독'을 얻기 위해 그렇게 홀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정의 덩어리를 함께 나눌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 30년간 반복되어온 그 사실은 거대한 고독이 되어 그녀의 텅 빈 가슴을 마구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고독을 원했습니다.
고독이 주는 고통이 그림을 그리게 하는 가장 거대한 영감이기 때문이었죠. 천경자, 그녀는 고독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나의 슬픈 전설의 40페이지>는 1974년 다녀온 케냐의 초원을 그린 작품입니다. 코끼리, 기린, 얼룩말 등을 그려 넣고 있습니다만, 사실 중요한 것은 그것들 모두 무리를 지어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 고독으로 발가 벗겨진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곧 고독이었습니다.
경자는 비로소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되고, 그 대화는 (자신의 자화상과도 같은) 여인상 <나의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 기록됩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여인이 품고 있는 고독의 눈. 더 이상 세상에 널리 그 어떤 풍물도 그릴 필요가 없다 느낀 경자. 자기 마음속에 혼자 쭈그려 앉아 흐느끼고 있는 '고독의 여인'을 캐스팅해 무대 위에 올립니다.
꽃이 가진 황홀한 색채에 흠뻑 취했던 어린 시절, 이후 삶에서 고통이 들이칠 때마다 그 살을 풀어주었던 뱀, 그리고 결국 고독이란 고통이 있어야만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
그 유쾌하지도, 달갑지도 않은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어떤 여인의 한. 눈을 통해 전해지고 있나요?
눈. 우리는 눈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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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가들을 살펴보다 보면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다. 모두 지난한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대상, 집안의 반대, 여건 등 이런저런 상황들과 맞물려 하나같이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화가의 길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의지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은 자신의 모든 걸을 내걸고 꿈을 향해 나아갔으며, 마침내 자신만의 '무엇'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무엇도 이들의 신념이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으며, 여기에는 경제력, 가족, 병마, 죽음 등도 포함된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열망, 여기에 더해지는 끊임없는 노력과 관찰은 세월의 흔적이 쌓임에 따라 무르익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꽃을 피운다. 그렇게 이들은 현재에 이르러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남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을(이별, 사랑, 고독, 슬픔, 우울, 가족, 소, 닭, 조선의 백자, 점, 항아리, 뱀, 여행 등) 자신 안에 담고 소재로 삼으며 오로지 예술에만 몰두했던 삶에서 집요한 광기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모습들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를 통해 어쩌면 이들에게 있어 예술은 삶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예술, 특히 미술사에 있어 한국미술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데 <방구석 미술관> 시리즈를 통해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의 화가와 작품들까지 골고루 만날 수 있어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덕분에 다음에 이 책에서 만난 화가와 작품들을 어딘가에서 또 만나게 된다면, 기꺼이 다가가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의 친밀감은 이제 형성된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