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방구석 미술관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미술이나 예술에 관심은 있지만 접근이 쉽지 않아 포기하게 되는 이들을 위한 책이 여기 있다. 알면 알수록 흥미롭고, 궁금하게 만드는 주제를 통해 이들이 살았던 시대와, 예술을 꿈꾸고 성장한 배경, 그리고 이들이 창조한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나볼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접근해 보면 조금씩 해답이 보인다. 작가의 삶이 궁금해서, 이들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혹은 색채나 구도, 아이디어가 좋아서 등등 어떤 이유도 상관없다.
자신의 취향대로 파보면서 작가를 알아가고, 예술을 공부하고, 전시회와 미술관을 방문하며 눈으로 가슴으로 담으면 된다. 그것이 어쩌면 예술에 다가가는 가장 손쉬우면서 자연스러운 접근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지루하고 따분한 미술사는 없다. 그저 궁금하고 알고 싶은 내용들만 가득할 뿐이다. 우리가 몰랐던 이들의 삶과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통해 작품을 한번, 두 번 자꾸만 보게 되는 마력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보면, 직접 보고 싶은 궁금증과 호기심까지 느끼게 된다.
행동력과 실천력이 뒷받침되어준다면, 가까운 미술관이나 전시관, 갤러리 등 어디든 방문할 수 있다.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다.
· · · · · · · · ·
여담이지만, 한참을 기다려 이 책을 찾으러 간 날 사서 분께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추천해 주시며, <방구석 미술관 2: 한국편>도 추가로 추천해 주셨다. 자신은 2편을 훨씬 더 재밌게 읽었다며, 덕분에 소장 가치를 느껴 책 구매는 물론 가까운 전시회장도 알아보고 직접 방문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읽기 전부터 직접 읽은 독자의 평을 들은 나로서는 기대감이 폭발했는데, 이 책을 읽은 후에 왜 그런 긍정적인 평을 했는지, 또 왜 소장까지 하게 되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책에 담긴 이야기들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작가의 작품들을 언제든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다는 장점과 매력 때문에 소장까지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했다.
나 역시도 이 책을 통해 이들의 작품과 미술에 더 많은 관심이 생겼다는 것은 안 비밀이다!
총 14명의 예술가들이 담겨 있는 이 책에는 재기 발랄한 스토리텔링과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과 작품들을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
마치 놀잇감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다양한 관점에서 미술을 접하고 바라보면서, 집중하게 되는 자신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색다른 아이디어와 미술사의 흐름, 획기적인 생각들을 엿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술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 · · · · · · · ·
한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끝나면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가 소개 페이지를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하단부에 자리한 QR코드를 찍으면 목소리를 통해 스토리텔링을 접할 수 있는 페이지로 연결된다. 만약 책을 읽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것을 활용해 봐도 좋을듯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직접 눈으로 보고 읽는 것이 좋아 책으로 읽는 것이 더 좋았다. 눈으로 읽고, 책에 담긴 그림과 예술작품들을 들여다보면서 상상하고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 가면서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권 뚝딱 읽게 된다.
정말 소장 가치가 충분히 있을 만큼 곳곳에 자리한 작품들은 모두 나의 시선을 끌었는데, 그중에서 유독 더 눈길을 끌었던 다섯 명의 작가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스토리에 관심 없다면 그냥 그림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것이다.
=====
에드바르트 뭉크
=====
■사조: 표현주의
표현주의를 한마디로 말하면 '감정을 표출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회화란 '눈으로 본 것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생각이다.
이런 표현주의의 선구자가 바로 뭉크로, 뭉크의 독창성은 '자전적 표현'에 있다. 이런 뭉크의 표현주의 작품은 독일 표현주의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뭉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머금게 된다. 추운 겨울, 노르웨이 어느 농장에서 다섯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허약했던 어머니 때문인지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선천적으로 류머티즘을 앓아 평생 관절염과 열병에 시달렸다.
이런 그에게 영원히 각인될 고통이 일찍 찾아왔는데, 다섯 살 이란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열네 살이 되던 해에는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아마저 같은 이유로 사망한다. 무엇보다 숱하게 병치레를 했던 그에게 '나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라는 두려움의 근원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내의 사망 이후 우울증을 보이기 시작한 아버지는 고립된 생활을 자처하며 가족들을 신경질적으로 대하기 시작하면서 갈등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뭉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할 쓰레기로 여기지 않고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기로 한다. 여느 거장들처럼 그 역시 이 죽음을 예술로 승화시키게 된 것이다.
뭉크식 죽음의 레퀴엠.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바로 <병든 아이>로 열다섯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창백한 누나에 대한 기억을 고통스럽게 더듬거리며 탄생시킨 첫 번째 작품이다.
자신만의 예술 주제를 찾던 젊은 뭉크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서 예술의 원천을 길어오면서 자신의 삶을 둘러싼 죽음, 가혹한 삶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을 그림 위에 쏟아내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이유다.
뭉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감수성과 우울함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가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게 되면서 여성에 대한 피해 망상과 여성은 남성의 영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흡혈귀>라는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을 살펴보면, 사회적 공감대나 고정관념에 관계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과 생각이 작품에 반영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첫 실연의 아픔이 서서히 잊힐 무렵 뭉크는 어릴 적 친구와 오랜만에 재회하게 되면서 다시 두 번째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뭉크의 절친들이 그녀를 보고 반해버리게 되면서 사각관계에 빠지게 된다.
결국 절친과 그녀가 결혼하게 되면서 뭉크는 사랑의 상처뿐만 아니라, 우정의 멍자국까지 얻게 된다. 이 사건으로 받은 고통 역시 캔버스에 찍어내는데 그 작품이 바로 <마돈나>라는 작품이다.
매혹적이면서도 음산한 마돈나는 젊은 날 두 차례의 사랑과 실연의 고통이 만든 뭉크만의 여인상이다.
이후 또 한 번은 사랑에 협박당하는 파국에 이르면서 총알이 뭉크의 왼손가락 중지를 관통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뭉크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손가락에 박힌 총알을 빼내며 파국은 종결되는데, 이로 인해 뭉크는 영혼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는 총알이 자신의 손을 관통했던 기억 또한 숙성시켜 5년이 지난 1907년 심혈을 쏟아<마라의 죽음>을 그리게 된다.
뭉크는 '보고 있는 것'이 아닌 '본 적이 있는 것'을 그리는 남자로 자신의 삶을 관통해 피 흘리게 한 사건을 숙성시킨 후 심장에서 끄집어내어 예술로 표현하는 남자였다.
이후 뭉크는 점차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지만 피해 망상에 시달리고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신 술은 정도가 지나쳐 중독 증세를 보이게 된다. 하지만 통제력을 발휘하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정기적으로 온천 등의 휴양을 하면서 마침내 완벽하게 청산하는 절제력을 보이게 된다.
뭉크는 결국, 자신의 삶과 예술을 위해 사랑하기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또 평생 절실히 죽음을 피하려 했기 때문인지, 그만큼 그는 오래오래 살게 된다.
이후 죽음과 자신을 평생 연결 짓던 그는 늙어가는 자신에게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되고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을 남기게 되는데, 이 그림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부터 홀로 집에서 그린 그림이다.
죽음에서 꽃 피기 시작해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뭉크의 그림. 그의 삶과 예술은 죽음을 먹고 자란 것처럼 보인다.
=====
빈센트 반 고흐
=====
■사조: 후기 인상주의
반 고흐식 후기 인상주의는 한마디로 '색을 향한 100˚C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 고흐는 그 색이 어디까지 순수하게 정제될 수 있는지, 어디까지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지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색을 통해 '자연의 생기'와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반 고흐는 현실 이면의 '초월적인 것'을 추구한 화가로 사물 속에 숨겨진 본질을 끄집어 내려 했다. 색을 향한 그의 열정의 기저에는 '색에 나의 감정을 온전히 담고 싶다'는 열망이 깔려 있다.
'영혼의 화가'라고 불리는 반 고흐는 색 중에서도 특히 노란색에 아주 푹 빠진 화가였다.
새로운 예술을 발견하고자 무작정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상경한 33세 반 고흐. 그가 파리에 도착할 당시 파리를 접수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녹색 요정'이라 불리는 술 압생트였다. 이 술은 알코올 도수가 40~70퍼센트에 달하던 독주였는데 가격이 매우 저렴했다.
반 고흐는 파리의 코르몽 화실에 들어서면서 안 먹어본 술이 거의 없을 만큼 애주가였던 앙리 드 툴르즈 로트레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녹색 요정'에 빠지게 되면서 파리를 떠날 무렵에는 이미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1888년 2월, 알코올 중독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로 향하게 되는데, 아무도 없는 그곳에 간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색' 때문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를. 그곳에서 고흐는 태어나 처음으로 순도 높은 강렬한 색을 두 눈으로 발견하게 된다. 압생트 산지인 아를에서 말이다.
이후 반 고흐는 불멸의 명작을 쏟아내기에 이르는데, 그 작품이 바로 <노란 집>과 <아를의 밤의 카페>라는 작품이다.
이상한 건 이 작품들 모두 온통 샛노랗다는 점이다. 또 그가 아를에서 남긴 그림에도 역시 노란색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아를에서도 어김없이 함께 한 녹색 요정 때문이었다.
녹색 요정은 산토닌을 품고 있는데, 계속해서 마시면서 산토닌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산토닌은 압생트 주원료인 향쑥의 주요 성분으로 과다 복용 시 부작용이 있는데 바로 황시증이다.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으로 인해 고흐 또한 모든 대상을 노랗게 보게 된 것이다.
색을 표현해야 하는 화가가 색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저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 고흐는 그것을 영감의 원천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부를 수 있는 가장 순도 높은 '고음의 노랑'을 찾아내게 된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던 바 고흐가 생명을 활활 태우며 꽃피운 대표작이 바로 <해바라기>였다.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얼마나 노랑에 심취해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해바라기>는 1888년 오래 설득 끝에 아를로 오기로 한 정신적 지주, 고갱을 기다리는 반 고흐의 기쁨과 설렘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노랗게 타오르는 정열의 에너지를 보는 것만 같다.
고흐가 즐겨 마셨던 압생트는 앞선 황시증 외에도 진정한 저주 하나가 더 있었는데, 바로 튜존이다. 이 성분은 뇌세포를 파괴하고 정신착란과 간질발작을 일으키게 된다. 이로써 압생트는 고흐의 몸과 마음을 뿌리부터 파괴시킨 '녹색 악마'였다.
어쨌든 반 고흐는 요정의 탈을 쓴 '녹색 악마'에게 그야말로 제대로 당하게 되면서 점차 격렬해지는 정신착란과 귀를 막아도 끊임없이 들리는 환청으로 결국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르게 된다.
그때 고흐가 그린 자화상은 유례없는 것이 되었는데 바로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이다. 노란 방, 노란 낯, 초록 눈동자는 마치 압생트를 머금은 듯하다.
이 사건 후 그는 압생트로 인한 온갖 중독 증세를 밀어내고자 노력하며 제 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압생트를 끊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며 갱생을 위한 사투를 벌인다.
그리고 이때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이 탄생하게 된다.
녹색 악마와 최후의 사투, 그 끝에 최후의 고통이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그가 마음껏 창작 활동을 하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주던 동생 테오의 상황이 극도로 나빠진 것이다. 동생의 불행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긴 고흐는 더 이상 세상에서 숨 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테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게 된다.
그렇게 편지를 쓰다 말고 그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 작별을 고하게 된다. 고흐는 결국 압생트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녹색 악마 압생트는 고흐의 영혼을 갉아먹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우리는 반 고흐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노랑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예술가의 영혼이 내지를 수 있는 표현의 극대치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
에두아르 마네
=====
■사조: 분류되지 않음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
왜 인상주의 거장들은 마네를 존경하고 따랐던 걸까? 왜 오늘날까지 불멸의 대가로 추앙받고 있는 걸까?
마네를 한마디로 소개하면 '미래로 가는 문'을 찾아 그림에 숨겨둔 남자'다. 그야말로 마네는 선지자였다. 과거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던 미술을 붓으로 내려쳐 금을 냈고, 전혀 새로운 모더니즘 미술로 가는 문을 찾았다. 또한 후배들이 그 문을 찾아 열도록 자신의 그림 속에 수수께끼처럼 숨겨두었다.
마네는 원래 정통 귀족 출신으로 전통 미술 교육을 받고, 전통 미술 시스템을 따랐던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네가 전통을 파괴하게 된다. 심지어 '미래의 미술로 가는 문'을 한발 앞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올랭피아>를 그린다.
클래식해 보이던 그가 어떻게 180도 달라질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그가 과거를 벗어나 미래로 가는 문을 찾도록 도와준 '두 개의 램프'가 있다.
▶첫 번째 램프: 악의 꽃
천재 샤를 보들레르가 스물한 살에 쓰기 시작해 15년 후에야 비로소 완성한 시집 '악의 꽃'에는 매춘부와 성행위, 시체와 죽음 등 추함과 악함에 대한 묘사로 가득 차 있다. 이것으로 그는 비난을 받고 법정에 서게 되면서 여섯 편이 삭제되고 300프랑의 벌금형을 선고받게 된다.
당시에는 금치산자이며 풍기 문란을 일으키는 방탕아로 천대받았던 저주받은 천재, 샤를 보들레르는 시의 주제를 과거의 고상한 것이 아닌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가져오는 파격을 가하게 된다 또 '악하고 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파격을 시도한다.
사실 보들레르는 시뿐만 아니라 미술 평론으로도 재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런 보들레르를 마네는 깊이 존경하며 사상적 스승으로 여기게 된다.
▶두 번째 램프: 물 건너온 종이 쪼가리
1855년, 만국박람회가 파리에서 최초로 열리게 되면서 여기에 일본도 참여하게 된다. 이때 일본은 파리에 도자기를 보내게 되는데, 험난한 뱃길에 도자기가 깨질 수도 있어 완충 역할을 해줄 종이 쪼가리를 잔뜩 넣게 된다.
그런데 이 도자기를 감싼 종이 쪼가리에 혼을 빼앗긴 파리지엔이 있었으니 바로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이었다. 이 종이는 14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 꽃핀 채색 목판화 '우키요에'로, 속세를 그린 그림'이라는 뜻과 같이 당시 일본 서민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담고 있었다.
당시 파리지엔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의 우키요에를 본 브라크몽은 주변 화가 친구들에게 소소한 입소문을 내기 시작하게 되고 그중 한 명이 바로 마네(그리고 드가)였다. 마네 또한 우키요에를 보고 충격에 빠지게 되는데 기성의 파리 화단에서 절대 진리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우키요에는 비웃기라도 하듯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원근법으로, 마네가 본 우키요에에 원근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미술을 절대 진리로 여기며 르네상스 이후 500년간 이어져온 고전적인 화풍 또한 무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물, 건물, 산 등 모든 사물에 뚜렷한 윤곽선이 있었고 그 안은 순수한 원색이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단순미가 강렬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다.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표현 방법을 고민하던 마네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우키요에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마네가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미술을 개척하는 데 결정적 힌트를 주는 열쇠로 변신하게 된다.
게다가 우키요에에는 보들레르가 항상 말하던 생각의 정수가 담겨 있었는데, 바로 '화가가 살고 있는 동시대를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과거의 신화나 역사가 아닌 동시대 사람들과 생활상을 그려야 한다는 마네의 생각은 우키요에를 통해 더욱 확고해진다.
그렇게 31세의 당돌한 사내는 '보들레르'와 '우키요에'라는 두 개의 램프를 쥐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가게 된다. 드디어 과거의 길이 아닌 미래의 '미술로 향하는 문'을 찾았기 때문이다.
1863년 마네는 <풀밭 우의 점심 식사>를 살롱전에 출품하게 되는데 보수적이었던 심사위원들은 당연히 탈락시키게 된다. 그리고 떨어진 작품들을 모아 전시하는 낙선전에 걸리게 되는데, 이 작품을 본 파리의 평론가와 관객들은 풀밭 위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풍경에 경악하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에서 영감을 얻고 또 라파엘로의 원작을 동판화로 모사한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파리스의 심판> 일부를 그대로 차용한 작품이다. 당시에도 거장의 작품을 재해석해 그리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전에 없던 오마주'가 경악의 원인이었다.
그림 속 인물은 신화, 성서, 역사 들의 인물이어야 하는데 마네의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1860년대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정말 지저분한 누드다. 이게 예술이냐"라며 경악했던 것이다.
더불어 "도대체 뭘 이야기하려는 거야?"라며 두 번 경악하기에 이르는데, 당시에는 그림 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마네의 그림 속에선 평범한 옆집 사람들이 퇴폐적으로 놀아나고 있었다.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현대의 생활, 즉 동시대 사람과 생활상을 그러야 해."라는 보들레르의 한발 앞선 생각이 마네의 정신을 흔들어 깨운 셈이다.
그 결과 풀밭 위에 퇴폐적으로 노니는 1860년대 부르주아들의 생활상을 풍자하는 그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미술은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 비로소 시대와 함께 호흡하기 시작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마네가 발견한 '미래로 가는 문'이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미술 작품이 시대와 호흡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마네의 도발적 시도는 오늘날에 와서야 대중의 코드로 정착된 것이다.
사실 마네에게는 앞서 욕받이가 되었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외에도 숨겨둔 핵폭탄 하나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올랭피아>다. 너무 파격적이라 화실에 꽁꽁 숨겨두었는데 보들레르의 권유에 큰 용기를 내면서 화실에서 꺼내 폭탄을 투척하듯 실롱전에 출품하게 된 것이다.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명작을 오마주한 작품으로 매우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실 '올랭피아'는 당시 매춘부가 주로 사용하던 이름으로, 이 그림은 비너스가 아닌 매춘부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에 걸린 검은색 초커 목걸이는 매춘부를 상징하는 장신구이며 꽃다발은 스폰서가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다.
또 검은 고양이의 꼬리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그림은 신화의 한 장면이 아닌, 당시 매춘부의 현장을 포착한 것이었다.
이렇게 그린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매춘부 '올랭피아'의 눈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관객과 눈을 마주 보고 있는 것으로 당시 이것은 특히 남성 관객들에게는 도발 그 자체로 간주되었다.
마네가 2년 만에 공개한 문제작은 역시나 헤비급이었고 관객과 비평가 가릴 것 없이 마네를 향해 욕을 퍼붓게 된다.
사실 마네는 매춘이라는 주제 외에 사람들이 불쾌해할 무언가를 <올랭피아>속 더 숨겨 두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미래의 회화로 가는 문'으로, 이 그림은 완전 평면으로 당시 절대 진리였던 원근법을 폐기 처분한 것이었다. '완전 평면' 우키요에의 미. 이것이 바로 마네가 숨겨놓은 '미래로 가는 문'이었다.
마네의 발상 전환은 인상주의, 표현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추상주의 등 모든 모더니즘 회화의 기본 정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게다가 이 그림은 단순한데, 관습적으로 이어져온 세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최선이라는 생각을 거부한 것이다. '단순함도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생각한 마네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었던 것이다.
이 역시 마네가 숨겨놓은 '미래로 가는 문'으로 마네의 <올랭피아>이후 150여 년이 지난 지금, 단순미는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미의식은 마네가 발견한 '미래로 가는 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1876년, 44세 마네는 성병인 임질에 걸리고 만다. 심각한 근육통과 마비 증세로 심신이 모두 피폐해진 마네는 사망하기 1년 전 그림 하나를 완성하게 된다. 그것은 마네의 '마지막 수수께끼'를 담은 최후의 걸작인 <폴리베르제르 바>이다.
전경의 바텐더 여성의 뒷모습이 배경에 비치고 있는데 배경은 뚫려 있는 공간이 아니라 거울이다. 마네는 거울 앞에 서 있는 여인을 그린 것으로, 뭔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그림에서는 거울 우측에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이다. 이것은 마네의 '두 개의 시점'을 하나의 그림 안에 넣은 것으로, 즉, 전경을 그린 시점과 배경을 그린 시점이 다른 것이다. 전경은 정면에서, 배경은 좌측으로 약 45도 이동한 시점에서 본 것을 그린 거라고 할 수 있다.
<폴리베르제르 바> 이전에 모든 회화는 '단 하나의 시점'만을 적용했는데, 그 시점은 보통 그림의 정중앙이었다. 하지만 마네는 이 고정관념을 파괴함으로써 한 장의 그림에 단일 시점이 아닌 복수 시점을 적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와 유사한 생각은 세잔의 작업 과제가 된다. 세잔은 '두 개 이상의 시점'을 하나의 그림 속에 당당히 집어넣게 된다. 그래서 세잔이 그린 사과를 보면 테이블 위에서 굴러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또 이 세잔의 사과를 본 피카소는 수십수백 개의 시점을 하나의 그림 속에 집어넣게 된다. 그렇게 '입체주의'라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처럼 '미래의 미술로 가는 문'을 발견하고, 그 문을 그림에 수수께끼처럼 숨겨둔 마네. 단 세 점의 그림으로 이후 근대미술의 꽃이 만발할 토양을 다지게 된다.
=====
마르크 샤갈
=====
■사조: 분류되지 않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성, 마르크 샤갈
샤갈에게는 사랑만큼 소중했던, 어찌 보면 사랑보다 더 소중했던 나머지 반쪽이 있었는데, 나머지 반쪽의 예술 세계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쪽을 알아야 인간 샤갈, 예술가 샤갈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샤갈의 나머지 반쪽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샤갈은 유대인으로 본래 이름은 '모이세 하츠켈레프'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내내 이유 없이 차별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샤갈. 그는 상업, 수공업 같은 유대인이 관습적으로 해야 할 일을 거부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화가가 되기에는 비테프스크가 너무 좁다고 느낀 열아홉 살의 시골 촌놈 샤갈은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게 된다.
그 도시에서 유대인 변호사 골드 베르크를 만나게 되면서 체류허가증을 받게 되고 이후 왕실 협회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학교의 고전적인 수업 방식에 회의감을 느껴 결국 자퇴하고,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즈반체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처음으로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의 최신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1년 정도 공부한 그는 즈반체바 학교에서 배울 건 다 배웠다고 생각하면서 1910년 8월, 스물셋의 나이에 파리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쉽게 부르고 기억할 수 있도록 '큰 걸음'이라는 뜻을 가진 '마르크 샤갈'로 개명하게 된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파리에서의 삶을 꾸리게 된다.
샤갈에게는 매일 열리는 파리의 미술관과 전시 그 자체가 선생이었다. 그는 파리의 미학을 스펀지가 되어 흡수하기 시작한다. 피카소가 주도한 입체주의는 샤갈의 양식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계기가 되고, 결정적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영원한 스승 '빛의 화가' 렘브란트를 만나게 되면서 예술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샤갈은 파리에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4년 동안 주옥같은 거장들의 미학을 골고루 씹어 먹으며 소화시키면서 도착한지 1년 만에 마침내 자신을 대표할 걸작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바로 <나와 마을>이다.
이 작품을 통해 샤갈은 '나 샤갈은 비테프스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예술의 영감으로 끌어오게 된 것이다.
1914년 여름, 어느덧 스물일곱이 된 샤갈은 누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비테프스크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잠시 머물다 다시 파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8년 동안 머물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샤갈에게 불운이었던 것만은 아닌데, 이때 연인 벨라와의 사랑을 담은 젊은 날의 걸작들이 탄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첫사랑의 설레는 감정 그대로를 색채로 표현한 걸작 중의 걸작으로 이 작품에도 파리에서 습득한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의 개념이 여지없이 녹아들어 있다. 동시에 샤갈만의 뿌리인 유대인 감성도 엿볼 수 있다.
샤갈의 전매특허인 '둥둥 떠나니는 '인물은 사실 샤갈의 신앙인 유대교의 하시디즘의 오랜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유대인이었던 샤갈에게 '둥둥 떠다니는' 사람과 동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발상이었을 것이다.
파리와 유대인의 감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만든 청년 샤갈. 그는 고향에서도 서서히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고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더욱 자신 있게 작품에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는 직접적으로 고향 마을에 있는 유대인을 화면에 담기 시작하는데 일면 '비테프스크 연작'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그림들이다.
<밝은 적색의 유대인>은 고향에 있는 평범한 유대인 노인을 그린 것으로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와 박해의 역사를 담고 있다.
전례 없는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러시아에도 혁명의 폭풍이 불기 시작한다.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유대인에게 러시아 시민권을 약속하고 유대인 거주지인 게토 역시 철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핍박만 받던 유대인 샤갈은 비테프스크 예술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러시아 혁명 1주년 기념 거리 장식을 감독하게 되고, 정부에서 샤갈의 작품을 대량으로 구입하기도 한다. 또 국가적 예술 행사인 제1회 국가 혁명예술 전시 회의 전시실을 두 개나 할당받는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예술 활동에 급제동이 걸리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샤갈의 인생은 생각만큼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간 이념 갈등이 심해지면서 예술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국가는 샤갈의 구상 회화가 아닌, 말레비치의 추상회화를 '국가대표 회화'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를 채택하며 유럽 국가들과 이념적으로 경쟁구도를 만든 러시아는 미술도 유럽과 전혀 다르길 원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절대주의를 밀어주게 된 것이다.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시되는 분위기에서 샤갈의 그림은 정치적으로 쓸모 없어지고 국가가 천시하는 화가로 전락하면서 샤갈은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자신을 버린 조국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샤갈은 1923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성공과 행복의 아우토반에 오르게 된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푼돈을 손에 쥐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던 열아홉 살 소년이 정확히 20년 후 세계적 예술가로 도약한 것이다. 이로써 샤갈은 운명으로 여겼던 그림으로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그렇게 평온하고 행복한 40대를 보낸 그는 이때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노라고 말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1940년, 전쟁과 유대인 박해를 피해 샤갈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고향 비테프스크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울분을 토하게 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비극을 샤갈은 붓으로 눈물을 내어 기록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샤갈이 평생의 숙원 사업처럼 시작한 일이 있었다. 바로 <구약 성경> 삽화 작업으로, <구약 성경>은 유대인들에게 성경 그 자체이며, 정신 그 자체였다.
<구약 성경>은 유대인 샤갈의 삶을 이끌어준 정신적 지주이자, 예술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샤갈은 1930년 마흔셋의 나이에 그 방대한 대서사시를 이미지로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105가지 장면으로 추려 동판에 새기고 또 새기는 작업을 26년간 하게 된다.
마침내 69세의 노인 마르크 샤갈은 105점의 동판화가 담긴 <구약 성경>을 출판하게 되고, 26년간 쌓아온 영감이 떠나지 않도록 가슴에 꼭 부여잡고 인생 최후의 걸작이 될 작업에 바로 착수하게 된다.
105점으로 제작했던 <구약 성경>이야기를 단 12점의 <성서 이야기> 시리즈로 집약하는 일생일대의 작업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이 작업 역시 10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져 그의 나이 79세에 비로소 완성하게 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이가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빛나는 색채의 미를 승화시킨 것이다.
연인과의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줄만 알았던 샤갈. 알고 보니 그에겐 '유대인'이라는 아주 중요한 반쪽이 있었다.
=====
마르셀 뒤샹
=====
■사조: 다다, 초현실주의
뒤샹은 지금의 현대미술을 낳은 혁명적 창조자로, 눈으로 보는 미술이라는 관념을 파괴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미술(개념미술)이라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제시한 예술가다. 그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은 '레디메이드'이다.
뒤샹은 똑똑한 머리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수학경시대회에서 2등을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1등을 한다. 사실 그의 두 형도 수재들이었는데 첫째 형 가스통은 파리에 있는 법대를, 둘째 형 레이몽은 의대를 갔다.
뒤샹은 타고난 머리를 체스를 통해서 후천적으로 더욱 개발해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는 평생 체스를 두었는데, 고도의 집중력과 사고력을 요하는 체스를 향한 열정은 그의 두뇌 능력을 분명 한 단계 더 키워주었을 것이다.
뒤샹은 체스를 하며 깊은 사고력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기르게 된다. 그 결과 동시대의 전위 예술가들보다 더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이런 명석한 뒤샹이 예술가의 길을 걷도록 톡 건드려준 사람은 바로 그의 친할아버지 에밀 니콜로, 그는 사업가로 성공해 집안을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었다.
그는 성공한 후에 예술가로 전행하면서 자신의 그림들을 집 안에 도배하다시피 걸어 놓게 되고 이걸 보고 자란 손주들 역시 예술가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법학과 의학을 배우러 파리에 갔던 두 형마저 예술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형과 절친하게 지냈던 뒤샹도 그 뒤를 따라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904년 열일곱 살 뒤샹은 예술의 중심지 파리로 상경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운명적으로 '풍자만화'와 만나게 되는데 당시 형 가스통은 생계를 위해 풍자만화가로 활동하게 있었다.
그 역시 스무 살부터 본격적으로 약 3년 동안 풍자만화로 활동하게 되고 이 경험은 이후 뒤샹 예술의 '비장의 무기'가 된다.
뒤샹은 풍자만화가로 일하며 풍자 정신을 깊이 체득하게 된다. 현실은 무조건 맹신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시각으로 보며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된 것이다. 유머감각 또한 보너스로 얻게 된다.
뒤샹은 풍자만화가로 활동하면서도 화가의 꿈을 놓지 않았는데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보며 '나도 화가가 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수년간의 훈련이 필요한 '기술력'보다 기존의 틀을 깨는 '사고력'이 미술에서 더 중요해졌음을 간파한 것이다.
1910년 뒤샹은 입체주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따라 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아 갓 태어난 입체주의에 변형을 가하게 된다. 입체주의에 '움직임'이라는 요소를 추가로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수차례의 실험 끝에 완성된 회심의 역작은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Ⅱ>다.
1912년 뒤샹 나이 스물다섯. 이 해는 그에게 너무나 중요한 해로 예술 인생의 방향이 180도 바뀌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냥' 입체주의를 넘어 '움직이는' 입체주의를 창안한 뒤샹은 부푼 마음을 품고 '살롱 데 쟁데팡당'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Ⅱ>를 출품하게 된다.
살롱 데 쟁데팡당은 1884년 보수적이고 아카데믹한 살롱전에 대항하여 젊은 예술가들이 독자적으로 연 전시로 새롭고 진보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전시회였다.
이런 멋진 전시에 뒤샹은 회심의 역작을 출품했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주최 측으로부터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Ⅱ>를 전시에서 제외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알고 보니 기존의 입체 주의자들이 이 작품을 보고 불쾌해했다는 이유였는데, 불쾌함의 원인은 '움직이는' 입체주의라는 것이었다. 즉, 자신들이 하고 있는 입체주의를 위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신출내기가 움직이고 있는 인물의 다시점을 분석해 그리고 있으니 싫었던 것이다.
주최 측에서는 작품 제목에서 '내려오는'을 빼면 전시를 허락하겠다며 뒤샹을 압박하지만 무심사 제도를 가진 전시에서 심사도 아닌 검열을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는 뒤샹은 제목을 바꾸지 않고 격분하며 작품을 집으로 가져간다.
기존 세력에서 따돌림당하고 자유로운 창작을 억압당한 뒤샹은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모순점을 발견하게 되면서 어이없는 진실을 몸소 깨닫게 된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그는 뿌리부터 바꾸는 지적 혁명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미술의 천지창조를 시작한다. 한마디로 '안티 미술!'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기존 미술의 모든 것을 거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뒤샹은 기존의 미술을 조롱하겠다는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먼저 미술작품이 아닌 자신의 삶에 먼저 적용한다. 그는 기존 예술가들의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작품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예술가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거부한다.
그래서 뒤샹은 다른 일자리를 얻는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번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작품은 팔 생각 없이 자유롭게 창작한다.
그는 생전 안 하던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미술 이론 공부에 몰두한다. 샤르트르 학교에 입학해 서지학(책을 분석해 기술하는 학문) 강의를 듣고 이를 통해 '안티 미술'을 실현할 자신만의 '미술 콘셉트(개념)'을 창조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던 중 1912년 11월, 항공기 전시회에 가서 항공기 모터와 프로펠러를 본 뒤샹은 회화는 끝났음을 직감한다.
뒤샹은 인류 탄생 이후 존재한 적 없는 미술을 창조해내려고 한다. 그는 손재주가 아닌 '머리로 하는 예술'의 가능성을 어렴풋이 발견한 것이다. 예술가의 기술력이 아닌 사고력으로 예술을 하려고 한 것이다.
뒤샹의 이런 발상은 수천 년의 미술사에서 양식 변화의 근본 원인은 결국 '생각의 변화'에 의한 것임을 꿰뚫어 본 것이다.
'생각하는 미술', 즉 개념미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뒤샹은 미술계에서 따돌림을 당한 후 자신만의 미술 콘셉트를 정립하기까지 이 모든 과정을 단 1년 만에 단기 완성하게 된다. 뒤샹의 현대미술 천지창조는 이렇게 시작된다.
과거의 모든 미술을 거부하기로 한 뒤샹은 거부의 의사표시로 '조롱'을 선택한다. 그리고 자신의 뼛속에 새겨져 있던 '풍자와 유머' 정신을 미술에 장착하기 시작한다. 의자에 자전거 바퀴 붙이기 신공! 뒤샹은 이렇게 기성 미술계를 향한 '풍자 놀이'를 시작한다.
<자전거 바퀴>는 심심풀이 땅콩 같은 미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미술이었다. 말 그대로 그냥 재미난 생각이 떠올라 심심풀이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관객은 이 물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무의미의 미술'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물체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치 뒤샹이 '작품에 어떤 의미가 꼭 있으라는 법이 있냐?'라고 물음을 던지며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뒤샹은 작품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하는 관객의 역할을 간파했고 작품은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창조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객을 관찰자가 아닌 창조자로 보았다.
그의 작품 덕에 이제 전시장은 작품을 중심으로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하는 '생각의 놀이터'가 되기 시작한다. 관객이 작품을 보며 자유롭게 생각의 놀이를 펼치는 창조자가 되는 순간이다.
1915년, 고민 끝에 그는 여기에 '레디메이드'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Ready-made)으로써 예술가가 만들지 않고 '선택해' 예술이 된 미술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공산품이 가진 고유의 기능을 제거한 후 예술가가 마음대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공산품을 작품 제작의 재료로 쓰며 대량 생산된 상품을 미술에 끌어들인다. 그는 '현대미술의 씨앗'이 된다.
1915년, 뒤샹은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 뉴욕으로 간다. 미국에서 그는 많은 후원자와 예술가를 만나 교류하고, 각종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된다. 뉴욕에서 그는 구시대적인 예술을 파괴하는 인습 타파의 상징으로 이미지를 굳힌다.
미국에 도착한 후 2년 동안 뒤샹은 삽, 머리빗, 모자걸이 등으로 레디메이드 작업을 한다. 손수 창안한 '레디메이드'개념을 알려 미국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뉴욕 미술계 사람들의 반응을 영 시큰둥했다.
그러자 그는 한 전시를 이용해 스스로 강력한 스캔들을 만들어낼 묘수를 생각해낸다. 이것은 '체스 게임 속 신박한 묘수'같은 전략이었다.
1917년 1월, 뒤샹은 독립미술가 협회의 디렉터로 임명된다. 그리고 4월에 열릴 첫 번째 독립미술가협회전 준비에 참여하게 된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수를 두는데, 바로 <눈먼 사람>이라는 잡지를 창간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디렉터로 참여한 전시에 남몰래 작품을 출품한다. 시중에 파는 변기를 사와 거꾸로 뒤집어놓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으로 출품하진 않고, '리처드 머트'라는 아무도 모르는 무명작가의 이름으로 출품한다.
1917년 4월 5일, 준비해온 독립미술가협회전이 열린다. 이 전시의 출품 자격은 단돈 6달러만 내면 어떤 예술가든 자유롭게 전시할 수 있다. 그런데 전시장에 떡하니 놓여 있는 변기를 보고 경악한 협회 회장이 변기를 칸막이 뒤 보이지 않는 곳에 두게 한다. 전시를 못하게 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무명작가 리처드 머트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상황에 전시 디렉터였던 뒤샹은 항의의 뜻으로 사퇴를 선언한다. 이로써 <샘>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1917년 5월, 잡지 <눈먼 사람> 2호에 익명의 사설이 실리게 된다. 그는 "그들은 6달러를 내면 어떤 예술가든 전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리처드 머트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어떤 논의도 없이 이 작품은 사라졌고 전시되지 않았다."라고 밝히며 <샘>이 거부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음란하고 천박한 것으로 봤다.
2. 표절이며, 위생용품일 뿐이라고 했다.
머트가 <샘>을 본인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를 중요치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평범한 물건을 가져와 새로운 관점과 제목을 부여했다. 그리고 원래 가지고 있던 기능이 상실되는 장소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는 이 오브제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위생용품이기에 전시할 수 없다는 생각, 그것은 어이없는 생각이라고 밝히며 미국이 지금껏 만든 유일한 예술 작품은 위생용품과 다리라고 말한다.
익명으로 남긴 누군가는 바로 뒤샹이었고 이렇게 <샘>은 뉴욕 미술계에 뜨거운 감자가 된다. 모든 전시 관계자와 대중을 상대로 둔 뒤샹의 묘수는 계획대로 성공하게 된다. 전시를 볼모로 잡은 그의 엽기적 행각은 '미술계는 여전히 보수적'이라는 실체를 까발린 것이다.
1917년 전시 디렉터가 된 그는 전시마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체재로 활용하는 능수능란함을 보이는 고단수가 된 것이다.
이 몰카 풍자쇼로 인해 <샘>으로 대표되는 레디메이드 개념이 뉴욕 미술계에 뿌리내리게 되고 이제 그는 운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쟁취하는 전략적 예술가가 된다.
나이 서른 '다다의 조성'으로 불리게 된 마르셀 뒤샹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즐겼던 체스에 다시 빠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1923년에는 만들던 작품도 중단하고 체스에 올인하기 시작한다. 매해 미술 전시보다 체스대회에 더 많이 얼굴을 비춘다.
1932년, 그는 국제체스연맹의 대표가 되고 체스 관련 책까지 출간하게 된다. 1933년에는 결국 '체스의 거장'이라는 칭호까지 듣게 된다. 체스 예에서도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룬 그는 1934년에 다시 미술계로 복귀하고 놀듯이 자기만의 예술을 만들어간다.
어느덧 거장의 칭호를 받는 79세 뒤샹은 한 인터뷰에서 "예술가로 살며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무엇이었냐?"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이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 작품들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
'안티 미술' 뒤샹은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술가는 죽을 때까지 평생 예술만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조차 깨부쉈다.
도서관 사서, 예술가, 체스 기사 등을 거치며 자신의 삶을 유일무이한 'Duchamp life(뒤샹 라이프)'로 만들어 삶 자체로 행위예술을 한다. 삶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남자였다.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물은 몰카 장인. 이번에는 체스를 떡밥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다. 'Life란 무엇인가?'라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눈이 호강하는 느낌이다. 세세한 설명에 에지 있는 스토리라인이 시선을 잡아끈다. 재미에 가치를 더한 느낌이다. 기록에 모두 다 담지는 못했지만,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도 눈여겨볼법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키스>라는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성장 과정들이 담겨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과 적나라한 19금의 그림 세계를 보여주는 에곤 실레, 로맨틱 풍경 속 자신만의 철학을 담은 클로드 모네, 그리고 바실리 칸딘스키와 가브리엘레 뮌터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와 작품들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넘기기 아까운 작품들이 가득했다. 덕분에 그림 보는 맛과 즐거움도 알 수 있었고, 추가적으로 이들의 작품과 이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알고 보는 맛'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자신만의 철학과 생각을 삶에 투영해 '나만의 삶'을 완성한 이들의 사상도 눈여겨보았으면 좋겠다.
타인의 시선이나 말에 흔들리기 보다 자신의 뿌리와 삶의 방향성에 더 무게를 두었던, 예술을 불태웠던 이들의 낭만과 인생 그 자체를 즐기는 여유도 가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