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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녘
권근 지음 / 좋은땅 / 2025년 12월
평점 :
"동물과 자연 이미지를 통해 삶의 시간과 흔적을 보여주는 시"
내심 기대를 하며 시를 마주했는데, 생각과 다르게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여러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연속성이 없는 행동들을 이어가고, 거기에는 감정이나 흔적들이 잠시 머물거나 스쳐 지나가는 형상만 잠시 포착될 뿐이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당황스러움과 멋쩍음만 남는다. 책을 보통은 내 경험과 이해에 기반해서 읽는데 반복해서 읽어도, 페이지를 넘겨도 도통 정체를 모르겠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슴, 곰, 뱀, 나비 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들이 취하는 행동과 상황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은, 계절의 흐름을 네 개의 부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을 따르지만, 실제 소비되는 소재는 자연이나 동물이 주다.
연속성 없는 특정 장면이 툭 던져지듯 나열되고, 감정이나 상황은 설명되지 않는다. 동물이나 풍경 등이 감정이나 감각을 대신하는 것으로 추측되나 독자가 이것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결론에 다다르기는 어렵고, 그저 개인적인 여운만 남을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같은 시를 두고도 독자마다 느낌이 천차만별로 나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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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무덤
앳된 소년 옆에
늙은 할매가 누웠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이면
할매의 몸에서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
가끔씩
기근이 잦아들면
멧돼지들은
이쪽까지 찾아와
앳된 소년을 괴롭힌다
할매는 쫓아내기 위해
몸의 풀들을 지그시 뭉갠다
앳된 소년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어색한 듯 조용히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고
할매는 조용히 소년을 바라보며
뭉개진 풀들을 쓸어내린다
그러면 꼭 그날에는
비가 억수로 내린다
50~5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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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시 중에서 그나마 조금 나의 방식대로 이해가 가능했던 시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앳된 소년은 갈 곳 없이 헤매다 산속 어딘가에서 머무르고 있다. 늙은 할매는 이미 죽어 흙이 된 존재지만, 그런 소년을 위해 기꺼이 위험한 상황일 때마다 풀들을 지그시 뭉개는 방법으로 소년을 보호한다. 어쩌면 이것을 통해 소년이 머무르는 곳은 단순한 풀밭이 아니라 무덤 어딘가 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기근이 잦아들면 살아있는 소년을 노리고 멧돼지들이 찾아와 소년을 괴롭히지만, 그럴 때마다 할매는 조용히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소년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만 이후 어쩐지 뻘쭘한 마음에 시선을 멀리 둔다. 할매는 그런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뭉개진 풀들을 쓸어내릴 뿐이다.
그런 날이면 비는 억수같이 내리는데, 이것은 어쩌면 정비 혹은 정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비를 흠뻑 맞은 풀들은 또다시 풍성하게 자라나고 이것은 곧 다른 의미에서는 소년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호, 성장, 생명의 순환 등으로 연결되는 이미지를 앳된 소년과 늙은 할매에 비유해 상황 묘사를 그린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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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 담긴 시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각 동물들의 상징성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너무 궁금해진다.
오히려 이미지가 더 자연스럽게 그려져서 쉬웠을까 아니면 나처럼 의미나 이해를 찾지 못해 헤매었을까. 또 저자는 어떤 감각을 전달하고 싶어 이 시를 쓴 것일까.
뚜렷하게 무언가 잡히지 않아서 개인적으로는 모호하게 다가왔던 시집 <사슴 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