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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ㅣ 현북스 소설 1
위기철 지음 / 현북스 / 2020년 5월
평점 :
예전부터 자주 눈에 띄던 제목이었지만, 이번에서야 비로소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어쩌면 내심 '아홉 살 인생'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책을 읽어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책이 내 삶의 발걸음에 맞춰 찾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러고 보면 지금이 딱 이 책을 만날 시점이어서 만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총 25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책에는, 아홉 살 여민이의 눈에 비친 삶과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상을 전혀 모른다고 하기엔 이미 눈치껏 바라볼 줄 알고, 그렇다고 모든 걸 안다고 하기엔 아직 어린아이인 여민이.
아홉 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떤지, 그 시선을 따라가며 다양한 인간 군상과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을 함께 해보면 어떨까 한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서울에서도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며 몇 해를 보낸 뒤에야 겨우 얻은 낡아빠진 판잣집들이 우글거리는 산꼭대기 집!
이곳에서 여민은 비로소 아홉 살 인생을 제대로 만끽하게 되는데, 과연 어떤 삶이 여민을 기다리고 있을지 지금부터 함께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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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이라는 숫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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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은 정말 묘한 숫자다. 아홉을 쌓아 놓았기에 넉넉하고,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에 헛헛하다. 그 아홉이 지나면 또다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기에 불안하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이건 모두 십진법의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지만, 그게 때때로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들곤 하니 우습다. 이게 다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탓이리라.
(266~26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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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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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여민(주인공)
-다섯 살이 되던 무렵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간 뒤 여러 번의 이사를 하며 붕붕 뜨는 생활을 이어감
-그러다 아홉 살 삼학년 여름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 판잣집들이 우글거리는 산꼭대기 집으로 이사 가게 되면서 비로소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게 됨
-싸움을 꽤 잘하지만 싸움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음
-정의로움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음
-별명: 노란네모
■백여운
-다섯 살 여동생
■백철홍
-여민의 아빠
-정의롭고 선함
■여민의 엄마
-여민이 다섯 살 무렵 잉크 공장에서 일하다 약품이 얼굴에 쏟아지면서 한쪽 눈을 잃게 됨
■신기종
-산꼭대기 집으로 이사 온 뒤 가장 먼저 친구가 된 아이
-별명: 시궁창
-공상하기를 좋아하며 어딘가 엉뚱함
-누나와 단둘이 살고 있음
■검은 제비
-산꼭대기 아이들 사이에서 대빵으로 통하는 아이
-오학년(열두 살)
-검은제비네 아버지는 유명한 술주정뱅이
-검은 제비는 주정뱅이의 장남임
■오금복
-옆집에 사는 싸움쟁이 부부의 첫째 딸
-둘째 동생은 은복, 그다음 동생은 돈복
-하는 짓마다 밉살맞고 정이 가지 않는 아이
■장우림
-새로 전학 간 교실에서 처음으로 짝꿍이 된 아이
-깔끔한 얼굴에 말쑥한 옷차림의 아이
-건방진 태도로 아이들의 신임을 잃어 친구가 없음
-허영심이 많음
■골방철학자
-부잣집 아가씨이면서 피아노 선생님인 윤희를 짝사랑 중
-기종이네 뒷집에 살고 있음
-온종일 골방에 처박혀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음
-현재 고시공부 중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음
■풍뎅이 영감
-속물로 불리는 사람
-몸집이 땅딸하고 얼굴이 까무잡잡함
-정식 호칭은 '최 영감님' 혹은 '최 씨 할아버지'
-산동네 주민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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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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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떠돌다 부모님이 어렵게 장만한 집은 산꼭대기 판자촌으로, 가장 위쪽에 자리해 있다. 처음으로 갖는 우리집이라는 소리에 여민은 한창 기대감을 갖지만, 이내 동네 분위기를 보고는 실망하게 된다.
하지만 점차 동네에 적응해 가기 시작하면서 여민은 어느새 친구들도 사귀고 숲에서 다양한 놀잇감들도 발견하게 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된다.
한시도 조용할 날 없는 산꼭대기 마을에서 여민은 매일 새로운 인간 군상과 세상을 마주하게 되면서 아홉 살 인생에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나름대로 뚝심과 정의로움을 가지고 있는 여민이기에 집단적 행동에 가담하거나 싸움과 같은 물리적 행동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부분은 어른인 우리들도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
각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순수한 모습에 웃음이 나다가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순간 씁쓸함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를 통해 인생은 지속되고, 삶은 이어져 있구나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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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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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도 진짜 불쌍하지는 않아. 단지 불쌍하게 보일 뿐이지."
(...)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고자 한다면 정말 누구나 불쌍해진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대로 어떤 사람도 정말로 불쌍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태여 불쌍함을 구걸 받으려 할 필요는 없다.
5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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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아이가 깨닫기에는 꽤 하이레벨의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문장 자체만 봤을 때는 명언처럼 다가오는 문장이었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없다. 그저 불쌍하게 보일 뿐!"
이 문장을 기반으로 현시대에 불쌍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첫 번째는 색안경을 끼고 누군가를 불쌍하게 보기 때문에 불쌍하게 보이는 사람, 두 번째는 불쌍해 보이려는 의도로 불쌍한 척을 해서 불쌍해 보이는 사람!
타인의 관점까지 내가 컨트롤할 수는 없기에 첫 번째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두 번째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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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나 이별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기 때문이야. 잘해 주든 못해 주든, 한번 떠나 버린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슬픈 거야..."
17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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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 보면 몇 번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에피소드를 만나게 되는데, 특히 갑작스러운 이별은 늘 후회와 깊은 슬픔을 남긴다.
곁에 없기에 더 이상 무엇을 해줄 수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후회와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다면 지금 곁에 있을 때 잘하자. 영원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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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검은 제비는 잘 있습니까?
슬픔과 외로움과 가난과 불행의 정체를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자신을 향해 애꿎은 저주를 퍼붓고 뾰족한 송곳을 던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저히 용서해선 안 될 적들은 쉽사리 용서하면서, 제 피붙이와 자신의 가슴엔 쉽사리 칼질을 해 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검은 제비는 잘 있습니까? 혹시, 당신이 검은 제비 아닙니까?
18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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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제비에 비유해 우리들 모두에게 포효하듯 내지르고 있는 말처럼 느껴져 읽는 내내 깊은 슬픔이 느껴졌던 문장이다.
읽다 보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내용들이 많은데 살펴보면 이렇다. 현재의 불행한 환경이나 상황을 앞뒤 따지지 않고 그저 자신 탓이라며 저주를 퍼붓고 있는 사람들, 권력이나 쉽사리 넘어설 수 없는 힘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쉽게 져 주면서 되려 약하고 힘없는 가족들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내리꽂는 사람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모습들이라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검은 제비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며 언젠가 그런 아버지를 제 손으로 죽일 거라 다짐하지만, 아버지는 제풀에 지쳐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후로 이를 갈며 버티던 검은 제비는 이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우리네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더 인상 깊게 다가왔던 문장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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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맹장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한 거야?"
"물론 맹장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걸 내가 못 가졌다는 사실이야. 난 그걸 참을 수 없는 거야. 이해할 수 있겠니?"
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아홉 살은 사람들의 부질없는 허영심까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므로. 그러나 허영심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알게 되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맹장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조차 기필코 차지하려 드는 멍텅구리들이 세상에 뜻밖에도 많다는 사실을.
20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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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인생에 뭐 이런 속 깊은 내용까지 포함될 일인가 싶지만, 아이들 세상이나 어른들 세상이나 별반 다르지 않으니 이해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중요하지 않음에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필코 차지하려 드는 인간 군상. 허영심에 찌들어 남에게 과시하기 좋아하는 이런 유형들은 더 이상 내 인생에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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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느 한 측면만을 지나치게 과장해, 그것이 인생의 전부이리라 착각할 필요는 없다. 기쁨 때문에, 슬픔 때문에, 낭만 때문에, 고통 때문에, 욕망 때문에, 좌절 때문에, 사랑 때문에, 증오 때문에.... 또는 과거 때문에, 현재 때문에, 미래 때문에... 혼자만의 울타리를 쌓으려 드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짓이다. 못된 거인이 정원에 울타리를 치자 봄이 오지 않았다 하지 않던가!
263~26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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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떤 부분이 고장 나면 보호본능이 발동되어 한 측면만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지워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 문장처럼 서서히 그 높다란 울타리를 낮출 필요는 있어 보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세상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되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나 자신이기에, 조금은 적립된 기쁨, 슬픔, 분노, 고통, 욕망, 좌절, 과거, 현재 등등을 낮춰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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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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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인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다소 성숙한 면모가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함과 인생의 쓴맛을 동시에 맛볼 수 있어 꽤 알찬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아홉 살 인생이라고 해서 항상 단맛만 경험하라는 법은 없으니, 어쩌면 이 책에 실린 아홉 살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참맛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인생의 맛을 여민이처럼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학창 시절을 거치며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홉 살, 열아홉 살, 스물아홉 살, 서른아홉 살 등등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오늘의 인생을 <아홉 살 인생>에서 배워보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