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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 - 마스다 미리 에세이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평점 :
얼마 전에 <크리에이터의 인생 만화>라는 책을 읽고 난 후, 기억에 남은 작가와 책 이름을 나중에 읽을 요량으로 따로 기재해 두었었다.
그러다 이번에 기분전환 겸 그중에서 마스다 마리의 책 하나를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상큼하고 말랑한 느낌이 들어 소개해 보려고 한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 속에서 잠시 멀어진, 하지만 너무나 소중하고 따뜻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감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롭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또 불안했던 시절! 세상을 알아나가던 발걸음과 함께 사소하지만 애틋했던 것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떠올려보면 어떨까 한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에피소드를 짤막하게 담고 있는데, 읽다 보면 슬며시 웃음이 배어 나온다.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천진난만하고 기상천외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들이 그런 미소를 짓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와 비슷한 행동을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오버랩되면서 잠시 동심의 세계에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게 된다. 아직은 때가 묻지 않아 세상을 단순하게 보던 나, 서툴러서 실수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경험을 쌓고 배움을 얻었던 나,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움으로 가득 찼던 나의 모습 등.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내, 잠시 행복한 여운에 젖어들게 될지도 모르겠다.
복잡하고 속 시끄러운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힐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 마스다 미리의 <작은 나>를 펼쳐들어 보자.
짤막짤막한 '작은 나'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추억과 그리움, 정다움과 같은 감정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애틋한 나의 모습을 떠올림과 동시에 다시 시작해 보고픈 욕망이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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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수업 때 히라가나를 배웠다.
(...)
조금씩 다양한 히라가나를 배웠다. 그러다가 히라가나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동료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
비슷하게 생긴 동료가 사이좋은 친구처럼 보였다.
곤란할 때도 있었다.
(...)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아이도 많이 있다.
(...)
외톨이인 히라가나는 너무 쓸쓸해 보였다. 비슷하지 않은 아이들은 비슷하지 않은 아이들끼리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더니 마음이 놓였다.
26~2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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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 혹은 상상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면 학습에 목적을 두고 있기에 글자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거나 마음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 또래의 아이들 때만큼은 모든 사물과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여 말을 걸고 또 마음을 내어준다.
저자는 아마도 히라가나를 배우던 와중에 그 모양에 빠져 감정이입을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어쩐지 글자를 보며 고민에 빠진 귀여운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에피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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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첫 소풍날. 동물원에 간다.
(...)
나는 걱정이 있었다. 새로 산 등에 메는 가방.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크기일지 궁금했다.
내 것만 크면 어떡하지.
만약 그러면 분명 다들 웃을 거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내 가방, 다른 아이들 것보다 크지 않아?"
(...)
"창문으로 다른 아이들 가방을 살펴보면 어떨까?"
(...)
나는 창문 너머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봤다.
다양한 가방이 있었다.
(...)
"똑같아 보여."
나는 가방을 등에 메고 밖으로 나왔다. 내 가방을 보고 너무 크다고 말하는 아이는 없었다.
82~8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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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일 때는 이상하게 남들과 '다른'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만 다르면 어쩌지', '나만 크면 어쩌지', '나만 튀면 어쩌지'하는 고민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들이 무색하게도 막상 아이들 속에 섞이면 다 고만고만해진다. 엄마는 아이의 고민을 단칼에 자르기보다, 동조해 주며 아이의 불안을 잠재워준다.
남들과 다르지 않음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아이는 이내 신나게 소풍을 즐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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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사람이 동전 모양의 동그란 초콜릿을 세 개 줬다. 금색이고 반짝거린다.
본 적 없는 외국 동전.
이걸 외국에 가지고 가면 외국 사람은 진짜 돈이라고 착각하겠지. 나중에 초콜릿인 줄 알면 놀라겠다고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밤이 왔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다들 잠든 후 집에 도둑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초콜릿을 진짜 외국 동전인 줄 알고 훔쳐 갈지도 모른다.
(...)
좋은 생각이 났다. 잠옷 바지 안에 넣어 두면 괜찮을 거다.
나는 동전 초콜릿을 내 배 위에 올리고 바지로 감췄다.
이러면 괜찮아. 도둑도 절대 발견하지 못할 거야.
아침이 왔다. 바지 안에서 초콜릿이 전부 녹아 있었다. 잠옷과 이불에 초콜릿이 덕지덕지 묻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했어!"
엄마가 화를 냈다. 왜 그랬는지 엄마한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137~13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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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지만 어쩐지 웃프게 다가오는 에피소드다. 더불어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음직한 내용이라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아마 당시 아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갑자기 초콜릿을 옷 속에 넣어두어 빨랫감만 잔뜩 만들어 두었는지, 오히려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는 나름대로 심각했다. 처음에는 동전 모양의 초콜릿이 신기하고 또 반짝임에 한껏 빠져 즐거웠다. 하지만 밤이 된 후 이내 걱정과 불안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 끝에 동전을 지켜내기 위한 묘수를 냈고 실행했지만, 그 결과는 결국 꽝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억울하고 울고 싶었던 건 어쩌면 아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이는 이런 속 사정을 엄마에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기만의 심오한 뜻을 전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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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마스다 미리는 어른이 되면서 점차 잊혀 가는 어린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그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그러면서 문득 어린 시절 썼던 노트나 일기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자료이기에 어렴풋한 감정 정도만 떠올릴 수 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추억들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계기로 몇 가지라도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나를 웃고 울게 한 사소하지만 중대한 사건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때 나와 부모님의 모습은 어땠는지.
어쩌면 동화 속 이야기처럼 순수하게 다가올 수도, 아니면 까마득한 추억앨범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새로웠던 초등학생 1학년, 그때의 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용기와 희망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더불어 지금의 '큰 나'를 더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시간까지 가질 수 있다면 최고로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