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안온한 날들 - 당신에게 건네는 60편의 사랑 이야기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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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네이버 이벤트를 통해 습득한 책인데, 이런저런 사유로 책장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이제서야 겨우 읽어볼 기회를 얻었다.


요즘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터라, 사실 엉덩이를 붙이고 거의 앉아있을 틈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럴 때일수록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은 독서라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틈새 시간을 이용해 읽어나갔다.


그렇게 조각조각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고 나니, 어딘가 모르게 뿌듯함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다. 한동안 의도치 않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책과 멀어진 것 같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책과 마주할 수 있어 기뻤다.



총 2개의 파트로 구성된 이 책의 주제는 '사랑'으로, 응급의학과 의사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마주한 '일상 속 사랑'과 '의사로서 마주하는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파트 1에서는 저자 자신의 삶과 일상 속에서 만난 사랑에 대해, 파트 2에서는 일터에서 목격한 사랑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피가 튀고 죽음이 난무하는 일터를 벗어나 때때로 저자는 안온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 회복의 시간을 갖기도 하는데, 그 행위는 주로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가슴과 머리에 잔상으로 남은 환자들의 고통 혹은 애달픈 보호자의 모습들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으며 더 많은 환자들을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을 키워나간다.


응급상황일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전하는 일화를 전해 듣다 보면, 인간의 불행과 행복, 그리고 생명력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된다.


한 끗 차이로 불행이 행복이 되기도 하고, 또 너무 쉽게 꺼져버리는 생명력에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오늘'을 허투루 살면 안 되겠다는 결심도 하게 된다.


제법 안온해 보이는 삶 속에 사실은 전쟁같이 치열한 삶이 숨어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엿보며,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끌어안아야 할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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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결혼을 결심했지. 그렇게 인생을 결정한 것은 단 한순간이었어. 그 어둑한 객석에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수많은 얼굴과 고개들 사이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나만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얼굴을 찾았을 때, 그때가 내 운명을 결정한 순간이었던 거야.

3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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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삶을 결정짓는 한순간은, 시간과 비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찰나 마주하게 되는 진심과 진정성이야말로 우리 삶을 바꾸는 열쇠이자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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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이 나이 지긋한 의사에게 더욱 신뢰감을 느끼는 것은, 의학은 반복으로 공고해지는 경험의 학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사 개인이 인생 굴곡을 통과할수록 그의 삶도 많은 고통으로 풍성해지기에 의사가 환자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일 테다.


나는 아직 젊고 특별히 아팠던 적도 없으며 주변 사람들도 건강하다. 그러나 이제 삶이 흘러갈수록 나는 더욱 실재하는 고통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점차 내 환자들 전부가 아닌 일부에게라도 더 깊이 공감하며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고통을 내가 겪은 일처럼 조금 더 이해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나이가 들어가며 다양한 고통의 편린을 마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12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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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나', 그리고 의사로서의 '나'가 합쳐져 경험치는 쌓이고, 이것은 곧 타인을 이해하는 척도가 된다고 말하는 저자.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쳐 치료를 받게 된 저자는 환자가 되어 직접 통증을 느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행위가 얼마나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지 알게 된다. 이후 그는 그 시술을 환자들에게 하면서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동시에 공감을 하게 된다.


이렇듯 나이를 먹어갈수록, 경험치가 쌓일수록 환자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리라 기대 섞인 소망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말에서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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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의 태도나 자격이다. 우리는 종종 감사를 표하는 사람에게 폭언을 가하거나 얼굴에 햄버거를 던지는 일을 목격한다. 감사하는 말을 들었을 때, 실상 도움은 내가 받고 있으며, 그 말을 갚으려면 그들의 일이 조금이라도 순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 없이, 다만 자신이 순간적으로 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상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책임이 더 크다. 흩어지는 수많은 언어 속에서, 감사하다는 말의 의미를 정작 되새겨야 할 쪽은 어느 쪽일까.

17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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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흔하게 쓰이는 'Thank you'가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주로 약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일상 속에서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자주 듣지는 못하는듯하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 말을 아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감사하다는 말은 하는 쪽보다, 오히려 듣는 쪽에서 더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하는 말인데 되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위를 점한 사람처럼 굴며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때로 기분이 상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상황이나 기분이 그러하다면 마땅히 '고맙다', '감사하다'는 표현을 한 후 상대방의 반응에 대해서는 대체로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나의 마음을 전한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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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헌혈한 자리에는 다른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물질이 남는다. 그것은 반드시 생명이 위태로워 수혈이 필요한 누군가에게만 쓰인다. 세상에서 타인을 돕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지만, 그중 헌혈은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물질이 나는 봉사다. 이 단순한 교환은 다른 어떠한 존재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이 나누는 분명한 인류애다. 인간을 돕고자 고민하는 사람에게 헌혈을 권한다. 이타적인 당신의 혈액만이 다른 인간을 살릴 것이다.

22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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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에 대해 그다지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글을 읽으며 인류를 위한 최고의 봉사는 어쩌면 '헌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을 살리는 피는 인공적으로 생산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사람의 온기로 전하는 '헌혈'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이자 인류애라고 표현할 수 있을듯하다.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 그리고 인구감소로 인해 현재 우리나라는 피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한다. 헌혈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큰 혜택이 주어지지는 않겠지만, 헌혈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헌혈을 통해 이타심을 발휘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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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1에서 만난 저자는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파트 2에서 만난 저자는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매일을 고군분투하며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양면성을 통해 어떤 직업을 갖고 있던지 사람의 몸과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으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행과 행복 속에서 뒤엉키며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때때로 저자는 의사의 자리를 내려놓고 고통 속에서 한 발짝 떨어져 회복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각기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회복해가고 성장해가는 모습들 덕분에 어쩌면 우리는 제법 안온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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