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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의 바깥
이제야 지음 / 에포케스튜디오 / 2025년 2월
평점 :
이 책은 의미심장한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시집인데, 책 제목을 읽을수록 자꾸만 곱씹게 되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항상 '진심'을 다하는 것만 생각해 왔는데, 책 제목을 곱씹다 문득 진심의 바깥에서 바라보는 세상과 나 자신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아마도 진심 안에서 바라보는 관점과는 아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흔히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시점(이를테면 1인칭 혹은 2인칭에서 벗어나 3인칭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세상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해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 또한 진심의 바깥에서 살펴본 일상과 생각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담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품고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에는 작고 사소한 순간들에 대한 시인의 감정들이 섬세히 담겨있다. 그래서인지 시인이 다루고 있는 소재 또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대다수다.
눈빛, 언덕, 기념일, 밤, 다락방, 책, 바나나 등등. 별것 아니라고 넘길 수 있는 이런 소재들에 시인의 감정과 시선이 어우러져 시집으로 엮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직관적으로 다가오거나 공감이 되는 시들은 아니다. 저자의 감성과 시선이 많이 담겨 있어서인지, 독자 입장에서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거나 어렵게 다가오는 시들이 꽤 많았다.
반복해서 읽으면서 곱씹고 의미를 여러 번 되새겨야 겨우 이해되는 풍경과 감성들이라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후반에 산문 형태로 쓴 글에 더 공감이 많이 갔다.
후반부에 함께 수록된 인터뷰를 살펴보면, 시어 자체에 대한 난해함을 주고 싶지 않아 일상어를 많이 사용하려 했다고 이야기했는데, 표현이나 비유의 방식 때문인지 다소 난해하게 다가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재미있게 다가왔던 독특한 표현들이나 시를 쓴 배경에 대해 쉽게 풀어쓴 산문을 통해 공감 갔던 부분을 함께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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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발견한 독특한 표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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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수 없는 날들의 일기를 줍다가
달이 뜨면 기지개를 켜고 낮잠을 잤다
3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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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달'이 뜨면 기지개를 '켜고' '낮잠'을 잤다고 표현하고 있다. 문맥상 살펴보면 전혀 맞지 않는 표현들이다.
보통은 해가 뜨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아니면, 달이 뜨면 밤잠을 자러 간다.
하지만 시인은 어우러질 것 같지 않은 반대 상황들을 엮어 미래의 '내'가 힘겨웠던 '어린 나'에게 위로를 전하듯 말을 엮어 시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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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흔들의자에 앉아 일기를 쓰면
단정하지 않은 글이 완성됩니다.
읽고 싶지 않고 쓰고 싶지 않은 만큼만
조각난 가방을 열다가 나를 잃을 것 같아
잘 익은 귤을 통째로 삼켰습니다.
3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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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의자에 앉아 일기를 쓰면 '단정하지 않은 글이 완성'된다는 표현과 조각난 가방을 열다가 나를 잃을 것 같아 잘 읽은 귤을 '통째로 삼켰습니다'라는 표현은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더해 '읽고 싶지 않고 쓰고 싶지 않은 만큼만'이라는 조건을 단것으로 보아 단순히 흔들의자에 앉아서 일기를 썼기 때문에 단정하지 않은 글이 완성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조각난 가방이라는 표현도, 뒷부분에 연결되는 귤을 통째로 삼켰습니다라는 표현으로 보아 가방이나 귤은 우리가 아는 단순한 물체 혹은 과일이 아닌듯하다.
그것들에 나 자신을 대입한 감성을 담아낸 시어로 보인다. 짐작건대, 당시의 상황은 아마도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 내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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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서 발견한 공감 갔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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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종이 인형을 쌓아두는 걸 좋아했다. 그때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어른이 되어 해석해 본다.
(...)
흰 종이에 두 사람을 그리고 오려 나란히 눕히고 둘을 겹치면 모든 마음마저 포개질 거라 믿은 마음, 둘이 껴안아 하나가 되면 그것이 위로라는 믿음, 마치 여름밤 가로등 아래 하나가 되었던 우리 그림자처럼.
13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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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마음 표현이었을 종이 인형 쌓아두기! 어른이 된 후 그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봤을 때 이 행동들은 아이였던 본인이 바라던 마음 혹은 결핍이 아니었을까?
어린 시인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힘껏 껴안아주며 서로를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자. 그렇게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어주며 너를 믿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면 다시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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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가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랑을 한다. 영원히 없다는 것쯤은 이제 안다. 당신의 눈빛이 사랑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림자는 우리라는 형체로 산다. 숨기기 좋았고 외면하기 좋았던 둘의 모습처럼.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각자의 그림자와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
14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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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을 안고 사랑을 한다는 문장을 읽으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지속된다면 결국 각자의 본체가 아닌, 그림자와 걷고 있는 것과 같다는 표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는 무한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에, 영원은 있을 수 없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한순간이라도 서로를 믿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값진 인생이 또 있을까?
오늘, 영혼 없는 껍데기로 상대의 곁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함께 있는 동안이라도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 것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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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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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자신의 감성에 깊이 빠져 글을 쓰게 되면, 타인은 그 글에서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일상의 언어로 표현한다 할지라도 꼬고 비틀고 뒤집은 단어와 내용들은 혼란 그 자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적절 수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은유와 비유를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시라지만, 대중이 쉽게 간파할 수 있는 함축적 의미로 쓰이는 표현과 나만 아는 표현과 감성은 엄연히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요즘과 같이 복잡하고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하는 글들은 더 손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
당장 나를 챙기기도 부족한 상황에 타인이 쓴 어려운 감성의 글을 읽고 해석하고 생각해 볼 겨를이 없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앞서 읽은 시보다, 오히려 뒤에 담긴 산문 글이 더 좋았다. 어떤 감정과 상황으로 그 글을 쓰게 되었는지, 또 그 글 뒤에 지금의 심정은 어떤지를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문글 덕분에 이해되지 않던 앞선 시의 내용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거꾸로 산문 글을 읽고 시를 읽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섬세한 감성 시였지만, 파고들 여지가 없어 난해하게 다가왔었는데, 산문 글과 인터뷰 글 덕분에 무사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