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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원이면 좋겠습니다 - 릴케 수채화 시집 ㅣ 수채화 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한스-위르겐 가우데크 엮음, 장혜경 옮김 / 모스그린 / 2025년 1월
평점 :
릴케 수채화 시집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상당한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되었다. '시+수채화'의 조합만으로 이미 너무 낭만적인 느낌이 들어 더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다 읽고 난 소감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릴케의 시에 대한 그림 감상평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통상의 사람들은 감상평을 말이나 글로 표현한다면, 이 책의 화가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림으로 감상평을 표현함으로써 자신 안의 느낌의 소감을 담아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인지 릴케의 시를 읽고 느낀 개인적인 감상평과 화가가 그린 이미지는 비슷한 부분도 있었고, 또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나의 감상평은 이러했고, 화가의 감상평은 이러했다는 또 다른 독자의 주관적 견해라고 생각하며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겼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깨달았는데, 릴케에 대한 책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맙소사) 이것저것 지금껏 꽤 많은 권수의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작가가 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수많은 작가가 현존했고, 또 현존하고 있다는 말 같아서 한편으로는 더 부지런해져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읽을거리가 많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릴케의 시는 이 책에 그림을 담은 한스-위르겐 가우데크의 말처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번 쓱 읽고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시가 결코 아니다.
자꾸 읽고 상상하고 곱씹어야 그 맛이 제대로 살아난다. 어떤 색으로 피어날지, 어떤 모양으로 펼쳐질지 계속 입안에서 굴리고 또 확장적 생각을 거쳐야 제대로 아름답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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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작가. 한스-위르겐 가우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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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11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일을 하면서 그림에도 열정을 보여 화가 그룹 "메디테라네움"에서 활동하였고, 그 기간 "자유 베를린 미술 전시회"에 참여하여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이어 수많은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미국 등지를 두루 여행하며 넓은 세상을 만나고 있다. 자신이 그린 아름다운 그림에 고운 문학작품을 담아낸 책을 계속해서 펴내고 있다.
그림을 그린 한스-위르겐 가우데크는 청소년 시절부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많이 읽었다고 전한다. 언어와 운율을 가지고 노는 릴케의 유희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말한다.
특히 이 책에 실린 시들은 릴케의 풍성한 작품 중 자연과 직접 관련이 있는 시들을 고른 것으로, 한스-위르겐 가우테크는 그런 릴케 시의 느낌을 살려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기법이 수채화였고, 수채화를 이용해서 가까이에서 멀리 뻗어 나가는 그 황홀한 변화를 잘 담아낼 수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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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시 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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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 책에 실린 릴케의 시 중 나에게 좀 더 특별하게 다가왔던 시 몇 편을 소개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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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장미 덤불
비 내리는 저녁, 날은 어둑어둑해도
그대는 싱싱하고 순수합니다.
제 덩굴에서 선물하듯 손을 내뻗지만
장미라는 자기 존재에 푹 빠져있지요.
바라지도 가꾸지도 않았건만
납작한 꽃잎은 벌써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그렇게 끝없이 자신을 뛰어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스스로 흥분하여
장미는 나그네를 외쳐 부릅니다.
저녁의 상념에 잠겨 길가는 나그네를,
오, 걸음 멈추고 나를 봐요. 여기를 보아요.
보살펴주지 않아도 나는 걱정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2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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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장미의 화려한 자태와 덩굴손이 여기저기 뻗쳐있는 모양새가 절로 그려져 읽는 순간 이미지가 쉽게 그려졌던 시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푸르름과 싱그러움이 입안에 퍼지는 느낌이 들어 더 푹 빠지게 되었달까? 들장미는 누군가 도움을 주지 않아도, 보살펴 주지 않아도 혼자서 알아서 피고 지며 살아간다.
그런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어쩌면 더 시선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길 가던 나그네가 잠시 멈춰 돌아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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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푸르네스
과거가 제멋대로 넓혀놓았습니다.
분노와 항거, 사형수를
형장까지 동행하는 난장판,
상점과 시장통에서 고함을 지르는 입,
말을 타고 지나가는 공작,
부르군트 왕국의 용맹이 넓혀놓았습니다.
(사방을 배경으로 삼아서)
광장은 넓은 제 공간으로 들어오라며
먼 곳의 창문들을 쉬지 않고 불러들입니다.
그사이 빈 땅의 신하와 수행원들은
다툼의 차례에 맞추어 천천히
나뉘어 정렬합니다. 합각머리로 올라가며
작은 집들은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하고
탑들은 서로가 겁나서 입을 꾹 다문 채로
늘 지나치게 집들 뒤로 물러섭니다.
3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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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광장의 모양새를 굉장히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는 시가 아닐까 싶다. 면밀한 관찰력을 가지고 광장을 에워싼 풍경과 그리고 중심부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는 시처럼 보인다.
탑들은 서로가 겁나서 입을 꾹 다문채로 집들 뒤로 물러서있다는 표현에 순간 쿡하고 웃음이 나다가도, 한복판에서 이런저런 일로 난장판이 된 시장통을 보면 절로 고개가 내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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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무희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날름대는 혓바닥을 뻗기 전,
손에 들린 하얀 성냥개비처럼, 빙 둘러
가까이 다가온 구경꾼들 한가운데에서 그녀의 동그란 춤이 허겁지겁, 환하게, 뜨겁게 요동치며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홀연히 춤은 불꽃이 됩니다. 온전히.
그녀가 한 번의 눈길로 제 머리카락에 불을 붙이고
대담한 춤 솜씨로 단숨에 옷을 통째로
이 뜨거운 불길 속으로 던지니
그 불길에서 맨팔이 깜짝 놀란 뱀처럼
깨어나 덜컥대며 기지개를 켭니다.
그러다 불길이 사그라든 듯
그녀는 불길을 모아 아주 당당하고
거만한 몸짓으로 집어던지고는
지켜봅니다. 불꽃은 땅바닥에 누워 몸을 뒤채고
여전히 타오르며 굴복하지 않습니다.
허나 그녀는 승리에 취하고 확신에 차서
달콤하고 다정한 웃음을 띠며 얼굴을 치켜들고
작은 두 발로 불꽃을 짓밟아 꺼버립니다.
5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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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무희의 열정적인 춤사위를 생각나게 하는 시다. 뜨거운 불꽃처럼 붉은색 옷을 펄럭이며 때론 화려하고 큰 동작으로, 또 어떨 때는 불길이 사그라들듯 고요하고 느리게 강약을 조절하며 한껏 신명 나게 춤을 추는 무용수가 떠올라 시를 읽는 내내 집중과 몰입을 하게 만든다.
마지막에는 달콤하고 다정한 웃음으로 한껏 당당한 자세를 잡고 있을 무희에게 나도 모르게 절로 박수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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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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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그린 감상평을 눈으로 보니, 내 머릿속의 그림들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어 타인의 느낌을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이를 통해 처음 읽어보는 릴케의 시뿐 아니라, 오랫동안 릴케의 시를 애정하며 읽어왔던 또 다른 독자의 마음까지 한 번에 알 수 있어 유용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에는 릴케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나보면서 색다른 재미와 유희를 느껴보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