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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집으로 간다
나태주 지음 / 열림원 / 2024년 5월
평점 :
힐링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선택한 나태주의 시! 이번 시집의 키워드는 '오늘'과 '나'와 '집'이었다. 겨울에 잘 어울리는 느낌의 시여서인지, 아니면 공감 가는 느낌의 시가 많아서인지 푹 빠져서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과거에는 '시'라고 하면 숨겨진 의미 파악을 하거나 시인만의 표현력을 따라잡느라 어렵게 느껴졌는데, 최근에 출간되는 시들은 쉽게 쉽게 다가와서 더 자주 읽게 되는 것 같다.
만약 아직 시와 친하지 않다면, 이 책을 시작으로 시와 친해져보는 시간을 가져봐도 좋겠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에는 저자만의 감성과 삶을 되돌아보는 시선들이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마치 앨범을 들여다보며 추억을 떠올리듯 선연하게 다가온다.
덕분에 나의 삶, 우리 사회, 올 한 해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특히 연말과도 잘 어울리는 시들이 많아 지금 딱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때때로 사랑이나 이상에 대한 내용만 다루는 시들을 만날 때면 뭔가 좀 공허하거나 겉도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나태주 시인의 시에서는 삶과 세월이 묻어나 오히려 더 정겹게 다가오는 듯하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귤 까먹으며 오늘 시집 한편 읽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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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읽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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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23년이 개인적으로 힘든 한 해였다는 나태주 시인. 스스로 짚어봐도 우울증 증상이 분명했다고 전한다. 하는 수없이 가볍게 우울증 약을 먹으며 두문불출 지내기로 한다. 젊은이들 말로라면 번아웃이 된 것이다.
그토록 허방지방 어지럽던 시기에 쓰인 글들이 모여 이 시집 <오늘도 나는 집으로 간다>가 되었다. 키워드는 '오늘'과 '나'와 '집'.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 세 가지가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누구나 힘든 하루, 집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위로와 기쁨이 아니겠나라고 전한다.
이 시집은 나태주 시인의 52번째 시집으로 새롭게 써 내려간 178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저자는 이 시집에 대해 감사란 말을 넘어서는 감사가 담긴 시집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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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게 다가왔던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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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녕, 오늘아
나 지금 집으로 돌아간다
고달픈 하루, 일과를 접고
무거운 팔과 다리 데리고 집으로 간다
집에 가면 낯익은 얼굴 주름진 얼굴
나를 반겨주겠지
(...)
오래된 얼굴이 기다리는 집
어둑한 불빛이 반겨주는 집
편안한 불빛 속으로 나 돌아간다
안녕 안녕, 오늘아.
18~1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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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올리면 드는 생각들이 압축적으로 잘 담겨있는 시라는 느낌이 든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가는 길이 서글프지 않은 이유는 돌아갈 집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가는 길이 다소 피로하게 느껴지기는 해도 집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안도감, 쉼, 편안함 등이 느껴져 다시금 집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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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식물
잘 자라지 않는다
쉽게 시든다
거름 부족이거나
햇빛 부족이 아니라
물 과잉이 원인이다
오늘날 우리들 삶이 그렇다
3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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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시다. 여러 부분에 이 시의 내용을 접목해 볼 수 있는데, 실제 식물을 비롯해 사람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식물을 키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떤 것이 부족해서 죽기보다 오히려 과잉 관심으로 인해 자주 주는 물이 식물이 죽는 원인이라는 것을.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랑이라 앞세워 말하는 언행이 사실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아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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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회고
잘 사는 인생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인생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되는 것은 없는 것
무언가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만 가능하다
(...)
남 앞에서 떵떵거리며 잘난 체하기 같은 것들도 포기해야 했다.
그런 다음에야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
(...)
어렵게 얻은 자발적 고독
그렇게 사는 것만이 정말로 내가 잘 사는 인생이었다.
130~13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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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무언가는 내려놓고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저자 역시 남 앞에서 떵떵거리거나 잘난 체하기 같은 것들을 포기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갖고 싶은 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난 뒤 비로소 어렵게 얻은 자발적 고독이기에 아마도 저자 스스로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진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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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는 시간
아들아
소리 내어 울지 마라
울 힘이 있거든
그 힘으로 용서하라
그리고 너 자신 편안해져라
그것이 비로소 평화이고
사랑이고
인생의 완성이란다
17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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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제목 '눈 감는 시간'을 나는 '죽음'으로 보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일종의 당부처럼 느껴졌는데, 짠함과 동시에 애잔함, 깊은 사랑의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실제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하는 인사 중에 용서하고 편안하게 가라는 인사말을 건네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에서는 오히려 아버지가 남겨진 아들을 다독이며 마음 편하게 살라는 안부를 건네고 있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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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지 못한다
어머니
어머니 전화번호
어머니 세상 뜨신 지 4년째
내 핸드폰에서 지우지 못한 번호
010-9450-1086
문득 전화 한번 걸어보고 싶어
전화기 누르려다가 멈칫
정말로 어머니가 받으시면 어쩌나?
아니, 다른 사람 목소리가 대신
전화받으면 뭐라고 말하나?
전화기 내려놓고
전화번호 지울까 말까
이번에도 차마 지우지 못한다.
18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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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으며 나 역시 지우지 못한 번호 하나를 새삼 다시 꺼내보았다. 문득 생각나 문자라도 보내볼까 하다가 멈칫 거리며 보내지 못하고 접어두던 세월.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 그만 전화번호를 지우자 마음먹다가도, 차마 지우지 못하고 저장되어 있는 번호.
그런 숨겨둔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던 시를 읽으며, 그때의 나를 다시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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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점점 봄과 가을이 빨리
지나간다
머리를 잠깐 보였는가 하면
이내 꼬리를 보인다
아 그래서 옛 어른들도
당신들 나이를 봄과 가을
춘추라 불렀던 것일까
봄과 가을은 빨리 지나간다
그처럼 너희의 날들도
빨리 지나가리라.
23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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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던 시다. 점점 더 짧아지고 있는 봄과 가을. 붙잡으려 해봐도 붙잡을 수 없는 춘추.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빨라지는 세월. 맞다, 그래서 어른들 나이를 춘추라고 이야기했나 보다.
이 시집 곳곳에는 시인이 자신 또한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쩌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문득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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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일
사람이 아는 길만
길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길만
길이 아니라
더 좋은 길은
숨어 있는 길
사람이 모르는 길
그 길을 짐작으로라도
조금씩 알게 될 때
그 사람은 이미 늙은 사람이 되지만
그때라도 그 길을
알게 됨은 고마운 일이다.
26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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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는 길로만 다니고 아는 길이 정답이라 생각하고 앞만 보고 걸어간다. 하지만 한참 시간이 흐르고 늙은 사람이 되었을 때 문득 모르던 숨은 길을 발견하게 되는 때가 있다.
보이는 길만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관심을 두지 않아서, 숨어 있어서 몰랐던 것이다.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더 나이 들기 전에, 때로는 멈춰 서서 모르던 길, 안 가본 길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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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는 나태주 시인.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며 주며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어 주고 있다.
이 시집은 유난히 힘든 나날을 겪고 난 후 새로 쓰인 시가 많아선지, 인간 나태주에 대한 내용들이 유독 많이 담겨있는 듯하다.
그의 삶, 생각들을 살펴보며, 내 삶 속에 깊숙이 감춰둔 감정도 꺼내보고, 또 미래의 내 모습도 떠올려본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모난 곳 없이 달콤한 과실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의 나를 더 잘 보살펴야겠다고. 매번 알던 길만 가기보다 새로운 길도 가보고, 과한 것은 덜어내어 부족한 부분에 채워줌으로써 균형을 맞춰주고, 몸이 편한 것보다 마음이 편한 것에 더 중점을 두어보자고 말이다.
그러면 언젠가 다시 멈춰서 삶을 돌아 보았을 때 후회로 남는 일들보다 고마움과 행복감으로 남는 일들이 더 많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