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 마음을 펼 때 빛이 들어오고
박종찬 지음 / 마음연결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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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 날 문득 뒤돌아 봤을 때, 어쩌면 이것 또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은 감정들을 한데 모아놓은 시집을 만났다.


현재 진행형일 때는 알지 못할, 지나고 나서야 기어코 깨닫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는 어쩌면 고마움, 그리움, 미안함, 추억 등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불타는 사랑만이 사랑이 아님을, 때론 서툴고 어설픈 행색으로 스쳐 지나 갈지라도 그것 또한 사랑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시집 안에는,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들여놓을 법한 여러 감정들을 시를 통해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대체적으로 고마움, 그리움, 미안함, 추억과 같은 것들이다.


이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와닿았던 키워드는 '그리움'과 '추억'에 관련된 시들로, 읽으면서 머릿속에 방울방울 그림이 그려졌다.


편안하게 시를 감상하며 이미 지나간 사랑의 향기와 감정들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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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시간이 가면 괜찮을까

나도 모르게 들어선 익숙한 골목

더는 찾을 수 없는 전화 기록

무심코 침대 옆자리 돌아보는 일


익숙함이라는 게

습관이라는 게

6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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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도, 시간이 한참 흘러도 사랑했던 기억만큼은 계속 마음속에 남는 듯하다. 평소엔 기억 저편에 밀어두었다가도 익숙한 골목을 지나거나, 예전에 쓰던 물건을 마주할 때면 문득문득 그때의 그 감정이 솟아난다.


다소 희미해졌을지언정, 그때의 그 사랑의 감정은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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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틈만 나면 그대 생각

틈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7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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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 줄로 사랑의 마음이 시각적으로 느껴졌던 시다. 사랑의 크기가 점점 커져 어느새 전부가 되어버린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지 않는가?



묻는다고 묻어지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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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했다.

한 차면 넉넉히 실릴듯한 짐이

추억에, 삶에 불어 두어 차에 실린다

언제 샀는지 모를 물건에

잊었다 찾은 반가운 기억까지

먼지 뒤에 가려져 있다

텅 빈 집안을 본다

살았던 날 기억할까


이사 가던 날

추억 한가득 싣고 떠나온다

8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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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할 때마다 모두가 한 번씩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한다. 크게 무언가를 산 것 같지도 않은데, 이삿짐을 싸고 정리를 하다 보면, 이사 왔을 때보다 두 배 이상은 불어있는 추억과 삶의 짐들.


지난날을 뒤로하고 다시금 새 마음으로 떠나보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추억이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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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김치



작은 씨 한 톨 파종되어

샛노란 가슴 품고 겹겹이 어깨동무로

누구도 풀기 힘든 단결을 만든다

짠맛에 한잎 두잎 힘없이 자백하고

매운 고춧가루에 한두 놈씩 독에 갇힌다

추위에 얼지도 않고 견뎌 모두를 품는다

대지도 소금도 네 마음도

9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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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김장하는 모양새가 떠오르는 시다. 배추김치를 파종한 후 키워 수확하고 나면, 그것들은 한동안 소금에 절여져 축 늘어진다. 이후에는 양념에 곱게 칠해져 독에 갇혀 땅에 묻힌다.


덕분에 우리는 일 년 동안 맛있는 배추김치로 밥 한 공기 뚝딱이다. 자식과 가족들을 위해 밭을 매고, 수확한 농작물을 다시 맛있게 김장하여 먹이는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느껴져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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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동 골목길



낡은 철문에 능소화 피어나고

롯데껌 낡은 간판 매달려 있고

텃밭엔 옥수수잎 푸르르고

열려있는 대문 드나드는 이 없네

철수야 밥 먹어! 소리 들을 수 없고

동무들 딱지 치던 모습 없이

여름비에 조용히 젖어가는 심장만 있는 곳

이끼 낀 시멘트벽을 따라 벗어난 곳

소년은 장년이 된다

9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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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 담긴 어느 골목길이 떠오르는 시다. 빗물에 젖어 녹슨 철문과 담벼락 사이 피어난 들꽃, 그리고 골목 어디쯤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슈퍼, 그 옆에는 꼭 놓여있던 공중전화와 시끄럽게 뛰어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어스름해지는 시간이면 꼭 여기저기서 '00야 밥 먹어'라는 엄마들의 외침과 개 짖는 소리, 그렇게 골목은 어둠에 잠겨들고 가로등 불빛만 아른거린다.


지금은 추억에만 남아있는 어느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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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추억 속에 하나쯤 있을법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튀어나와 감성을 자극한다. '그땐 그랬지' 하며 그리운 마음에 젖어 들다가도, 이제서야 비로소 깨달은 고마운 마음을 더 이상 전할 수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일기도 한다.


그렇게 추억에 빠져들다 보면 문득 '그땐 왜 그랬을까' 싶은 마음에 미안함이 불쑥 들다가도, 사실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어느새 마음에 훈풍이 인다.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그 모든 이유에는 사랑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추억, 미안함, 그리움 등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은 사랑이 바탕이 된 이야기와 감정들임을 이제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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