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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 - 한 법의학자가 수천의 인생을 마주하며 깨달은 삶의 철학
이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2월
평점 :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
이 책을 마주하는 순간 내심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왜냐하면 재미있게 봤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알쓸인잡'에 출연했던 법의학자 이호가 쓴 책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부검, 사건, 법의학 등 평소 관심 있는 분야의 키워드들이 총망라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 것 같아 내심 호기심도 일었다.
또 가장 가까이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이 바라보는 '삶'이란 어떨까에 대한 궁금증도 한몫했는데, 평소 내가 생각하는 죽음과 삶, 삶의 의미 등과 결이 비슷해 읽으면서 공감 가는 포인트가 꽤 많았다.
특히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배워야 한다는 말과 죽음은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통보도 없이 온다는 말은 가슴에 큰 울림을 주는 말로 다가왔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처음 법의학자로써 일을 시작한 때의 이야기부터 대형 사건사고를 많이 맡으며 깨달은 교훈들, 그리고 의사와 법의학자로서 환자와 고인을 대하는 태도까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오가며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보고 바꿔나가야 할 부분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시스템, 유가족에 대한 변호와 중재, 공감 등의 여러 문제들이 산재함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애초부터 남들은 잘 가지 않는 법의학자의 길을 선택해 지금까지 약 30여 년간 4천여 구의 변사 시신을 부검해 왔는데, 그래서인지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수많은 죽음을 통해 깨달은 삶의 철학과 의미를 이 책에 담아냄으로써, 살아있는 우리가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거나 어리석은 선택으로 삶을 낭비하지 않도록 이끌어 준다.
무엇보다 실질적인 사건 이야기부터 신화 속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법의학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구성과 내용들로 꽉 채워서 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제 '죽음'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죽음을 마주할 용기를 내어보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삶의 가치와 의미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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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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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부터 국립 과학수사연구원에서 법의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국과수에 파견된 첫날부터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등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대형 참사 현장에 투입되었으며, 이후로도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남은 대형 참사 현장 수습에 발 벗고 나섰다.
이외에도 '약촌오거리 사건' 등의 재심 과정에서 법의학자로서 진실을 밝히는 증언을 하는 등 지금까지 30여 년간 약 4천여 건의 시신을 부검하며 법의학자로서 억울한 망자들의 대변인이 되어주고 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내가 책의 저자라면, 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죽음을 기록하고 또 논평할 것이다. 죽음을 가르치는 사람은 동시에 삶도 가르쳐야 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문장이야말로 저자가 이 글을 쓰게 한 힘이었다고 전한다.
저자는 책을 쓴다는 것은 동물들과 나무들의 희생을 무릅쓸 만큼의 가치가 필요한 일이라고 전하는 동시에 그것보다 더욱 고려해야 하는 부분은 독자들의 시간의 가치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알기에 혹여나 독자들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 모습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했다는 말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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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자 '이호'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었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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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자는 부검을 통해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듣게 된다. 고인이 미처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 떠나는 길에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그를 대신해 변호를 해주기도 한다.
2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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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은 사람은 이제 자신이 몸을 의사에게 보여줄 기회는 마지막 단 한 번뿐이 남지 않았기에 더욱 절실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 침상에 누운 그들을 내려다봐줄 의사가 되어주는 것, 법정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억울함을 밝혀줄 증언자가 되는 것, 그것이 법의학자의 역할이다.
2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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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말한다. 법의학자는 고인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자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대변해 주는 사람이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의학자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부검을 한다면, 미제로 남는 사건 또한 많이 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인이 마지막에 만나는 의사가 부검의인 만큼, 더 책임감 있는 자세로 그들을 만나주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 마음은 모든 유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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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게 다가왔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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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사례는 잘 드러나지 않는 까닭에 성공한 사례만을 보고 잘못된 편향에 빠지는 것을 가리켜 생존자 편향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기에 안전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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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나 혹은 범죄로 누군가가 사망했다면 가장 먼저 그 사람의 부주의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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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나는 안전하다는 착각 속에서 불안을 다스릴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얼마나 위험에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네카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무엇이 위험하고 무엇을 고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는 사인 없이 죽어간 2만 8천 명 속에 있다. 우리 옆에서 조용히 사라져간 사람들, 죽어간 사람들 속에 우리 사회의 불완전함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는 거기서부터 찾아야 한다. 보려고 해야 볼 수 있고, 알려고 해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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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도 앎의 완성이 필요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죽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망자를 대신하여, 살아남은 우리가 죽음의 육하원칙을 완성해야 한다. 그것은 떠나간 사람을 위한 일이기도, 또 그들을 밀어낸 이 세상을 살아갈 우리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46~4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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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편향은 어찌 보면 위험한 생각이다. '나는 절대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거야'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언제 어디서든 죽거나 다칠 수 있다.
피해자만의 일이 아니라, 나와 우리 모두의 일임에도 우리는 피해자에게서만 그 원인을 찾으려 하기에 문제는 되풀이된다.
'이번만 넘어가면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빨리, 쉽게 덮고 싶어 한다. 세월호 사건과 이태원 참사 등 여태껏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그렇게 덮였다.
왜 그들이 그렇게 사라져야 했는지 제대로 된 원인 규명도 처벌도, 피해 대책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은 떠나간 자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남아있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조사하고 죽음에 대한 앎을 완성해야 다음, 또 그다음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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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약병 라벨을 혼동할 수 있고, 아무리 타인의 실수를 일깨워 주어도 도무지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개인의 주의 집중만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인간에게 잘못을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다. 책임자의 처벌은 그다음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실수가 인간의 본성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17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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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읽으며 순간 개인적인 경험이 떠올라 깊은 빡침과 깊은 공감의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면서 '왜 사람들은 개인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수'와 관련된 개인적인 일화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병원과 관계된 것이고 또 하나는 도서관에 관련된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한 대로 이 두 기관의 실수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도무지 개선되지 않았는데, 개인의 주의 집중을 바로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처음 문제가 발생한 순간만이라도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고 시스템 개선을 했다면 또 반복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그저 개인에게 주의를 주거나 교육을 한다는 명목으로 넘겨버리니 평생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이다.
외국의 사례처럼 우리나라도 이런 실수에 대해 숨기려 하기보다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당장 고칠 수 있는 시스템 개선에 더 노력을 기울였으면 지금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 실수를 감추기 위해, 우리 기관의 실수를 감추는데 급급한 대한민국의 방식으로 인해 결국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이 실수는 남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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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 버티는 삶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불안은 점점 커지게 마련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즉 죽음을 수용한 상태에서 삶을 다시 바라보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해가 뜨면 일어나 학교에 가고 출근하듯이,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듯이, 때가 되면 태연히 삶을 끝내고 갈 뿐이다.
다만 가급적 처참하거나 비극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면 좋겠다. 급작스런 죽음, 비명횡사, 낯선 곳에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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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이 너무 힘겹지 않을까.
22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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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대하는 시각을 딱 이렇게 가져보기를 권하고 싶다.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마다 시기와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죽는다.
일상을 살아가듯 죽음을 받아들이면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피할 이유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바는, 처참하거나 비극적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암 환자와 같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은 가질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만약 죽음의 시기를 안다면, 일상을 살아가며 미리 신변을 정리할 것 같다. 혹은 그동안 하지 못한 여행을 하며 아름다운 기억을 담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를 위해 미리 나만의 준비 시간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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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를 찾아온 사람들은 몸이든 마음이든 각자의 어려움이 있어서 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공감, 즉 엠퍼시가 필요한 것이다. '공감'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영어 표현으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라는 말이 있다. 공감과 신발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지만, 플루타르코스가 쓴 글 모음의 한 대목에서 그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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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좋아 보이는 신발도 막상 신으면 발이 아플 수 있듯이 세상 모든 일이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하물며 다른 이의 고통을 겉으로 봐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직접 신발을 신어보듯이, 타인의 감정과 고통에 최대한 자신을 이입하면서 공감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242~24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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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다른 어떤 것보다 '공감'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낀다. 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환자가 넘쳐나도 남의 일로 치부하고, 세상이 요동치는데도 내 권력을 잡기에 바쁘며, 아무리 어려움을 호소해도 한 귀로 듣고 흘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문득문득 이들 또한 피해자들이 겪는 아픔과 어려움을 직접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다.
같은 위치, 같은 상황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실한지 느껴봐야 제대로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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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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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속 터지는 여러 상황들을 저자가 하나로 엮어 속시원히 풀어준 것 같아 읽고 난 후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적어도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가 있다는 것에, 더군다나 그 사람이 공신력 있는 법의학자라는 것에 큰 위로와 위안을 얻는다.
특히 사례로 언급한 몇몇 사례들이 나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져 더 공감하며 읽게 되었던 것 같다. 혼자서 애쓰고 중심 잡고 사느라 외로운 측면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어딘가에는 드문드문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 든든함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저자는 마지막 3부 마지막 이야기에서 스승의 죽음과 뒤늦게 배달된 편지 이야기를 통해 펑펑 운 사연을 공개했는데, 나 역시 책이 아니라 저자가 내 눈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면 펑펑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100세 시대라고 말하며, 마치 영생을 사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뒷전으로 미루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이기적이게 구는 걸 쉽게 목격할 수 있는데,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과연 똑같이 행동할지 궁금해진다.
더불어 그들의 삶 속에 사람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고귀한 삶'과 '가치'가 과연 포함되어 있는지도 의문이 든다. 살아있는 매 순간은 기적이다. 기적에 기적이 더해져 우리는 지금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허투루 삶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별안간 앞이 캄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나 불안과 초조함으로 막막하게 느껴질 때 '죽음'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미처 삶을 다 정리하지 못하고 먼저 떠난 이들 혹은 유한한 나의 삶을 떠올려보자.
그러면 삶에 무엇을 어떻게 채워 넣어야 할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정 없는 삶, 애정 없는 관계, 애정 없는 일, 애정 없는 000 은 삶에 아무런 의미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끼며 사는 것! 그것을 위해 우리는 죽음'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